밀레, ‘만종’, 1857~59, 캔버스에 유채, 55.5x66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드린 기도를 묵상하노라면 내 안의 비루한 욕심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이 들고 무엇이 올바르고 가치 있는 삶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위대한 영혼의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기도는 일반적으로 초자연적인 신앙의 대상과 교감하는 행위로, 그 신앙의 대상에게 축복과 가호를 비는 일을 말한다. 개인의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소망에서부터 국가와 사회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비는 일, 신에게 스스로를 바치고 헌신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기도는 그 내용과 범위가 매우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눈에 보이는 대상세계를 넘어 초자연적인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며, 그 존재로부터 응답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초자연적인 존재와 응답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고는 기도는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렇듯 현실 너머의 세계와 잇닿아 있는 기도는 그 초월성과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의 이미지로 오랜 세월 중요한 회화적 소재가 되어왔다. 서양 회화사에서 기도 이미지의 대표적인 걸작을 꼽으라면 아마도 밀레의 ‘만종’이 가장 윗자리에 위치할 것이다.
초자연적 존재와 관계 맺는 기도, 서양회화 중요 소재
밀레의 ‘만종’은 젊은 부부가 밭일을 마치고 교회 종소리에 맞춰 신에게 감사 기도를 드리는 그림이다. 젊은 부부의 행색을 보면 남루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 어디에도 슬퍼하거나 부끄러워하는 흔적이 없다. 그들은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한다. 비록 힘든 노동이었지만 하루 일과를 무사히 마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머리를 조아릴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부부는 행복하고 감사한 것이다. 이 이미지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진정으로 자신을 낮춰 자연과 우주를 관통하는 위대한 힘 앞에 머리를 숙일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보다 커진다는 사실이다. 누구도 기도하는 이 부부를 얕잡아보거나 값싸게 동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래된 거석처럼 지평선을 뚫고 서 있는 부부는 그 모습 그대로 영원한 기도의 기념비다.
이 그림과 관련해 밀레는 다음과 같은 추억을 들려주었다.
“‘만종’은 내가 옛날 일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다. 옛날, 우리가 밭에서 일할 때 저녁종 소리가 들리면 나의 할머니는 한 번도 잊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일을 멈추게 한 뒤 꼬박꼬박 삼종기도(오전, 정오, 오후 종소리에 맞춰 하루 세 번 드리는 기도)의 마지막 기도를 드리게 하셨다.”
‘만종’에는 그렇게 기도를 통해 배운 밀레의 겸손과 삶에 대한 긍정이 잔잔히 배어 있다. 이 그림의 복제본이 한때 우리나라 이발소 대부분을 장식하곤 했던 것은, 그 아름다운 겸손의 미덕과 삶에 대한 긍정이 세상 어떤 가치보다 소중하게 다가왔기 때문이 아닐까.
기도할 때 사람들은 주로 두 손을 모은다. 손바닥을 마주하고 가지런히 모은 손은 매우 정결하고 온화한 인상을 준다. 이런 기도의 이미지로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가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사소페라토의 ‘기도하는 동정녀’다.
사소페라토, ‘기도하는 동정녀’, 1640~50, 캔버스에 유채, 73x59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사소페라토는 베네딕투스 수도회와 매우 가까웠다. 베네딕투스 회칙을 따르는 은수자(隱修者)들이 수도원에 들어올 때 순명, 청빈, 정결을 서약한다는 사실과 이 회의 모토가 ‘일하는 것이 기도하는 것(laborare est orare)’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림 속의 성모마리아가 어찌 저리도 순수하고 헌신적인지 또 그의 기도가 어찌 저리도 진지한 노동의 인상을 풍기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지극히 높은 작품의 완성도에서 우리는 또, 사소페라토가 이 그림을 그리느라 엄청난 시간을 들이고 땀을 흘렸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공력 자체가 이렇듯 고귀한 예술로 승화된 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일하는 것이 기도하는 것’임을 절감하게 된다.
마스, ‘기도하는 노파’, 1655, 캔버스에 유채, 134x113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기도를 주제로 한 그림은 서양미술사 내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으며 제작됐다. 이는 인생이라는 게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고, 때로 자신의 무능력과 불안정성, 불완전성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경건한 기도의 이미지가 그만큼 큰 위로가 됐음을 의미한다. 특히 오랜 풍상을 겪은 노인이 기도하는 모습은 삶에 관한 비할 나위 없이 따뜻한 성찰과 위로를 전해주는데,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니콜라스 마스가 그린 ‘기도하는 노파’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외로운 노파가 소박한 소찬 앞에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천사가 날고 하늘이 열리는 요란한 광경을 보지는 못하지만 진정한 신앙, 진정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분명한 이미지로 보게 된다. “기도란 하느님을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한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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