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과 국제범죄조직의 쫓고 쫓기는 전쟁이 치열하다.
첩보는 구체적이었다. 국제범죄조직이 다카 교외의 ‘특정 창고’에서 인쇄기와 컴퓨터 등의 장비를 갖추고 원화(한국 돈)와 달러화를 위조한다는 것. 이전까지 원화를 위조한 국제범죄조직은 알려진 바 없었다.
국정원이 이 첩보를 입수한 것은 2002년 8월. 방글라데시인으로 구성된 위폐 조직이 원화, 달러화, 유로화를 만든다는 단순 첩보였다. 이들 조직이 위폐를 동남아와 미국 LA에 유통시킨다는 추가 첩보는 국정원의 추적 뒤 ‘정보’로 격상됐다.
A 씨는 그들이 위폐를 만들 때 사용하는 장비까지 완벽하게 파악한 뒤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요원이 수집한 범죄정보는 국정원의 ‘자료 파일’에 저장됐고, 국정원은 방글라데시 수사당국과 공조해 일당을 검거했다.
마피아·삼합회 등 한국에서 활개
해외에서 원화를 위조한 일당이 드러난 것은 최초일 뿐 아니라 큰 뉴스였다. 그러나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보도하지 못했다. 사건을 밖으로 알리거나 요원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국정원이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검찰, 경찰 등 공개된 수사조직이 검거했다고 발표하는 국제범죄 사건의 상당수가 국정원 작품이다.
국정원은 노무현 정부 출범 후 국제범죄와 관련해 407건(2640명)의 적발 실적을 올렸다고 한다. 마약범죄가 170건(950명)으로 가장 많고, 출입국 범죄 121건(1106명), 금융범죄 44건(267명), 위폐범죄 9건(29명), 밀수 등 기타 범죄 63건(288명) 순이다(2005년 말 현재).
국정원이 국제범죄 수사에서 검찰, 경찰보다 비교 우위를 점하는 것은 촘촘하게 깔린 해외정보망 덕분이다. 해외 요원들의 첩보와 정보가 뒷받침해주고 있어 음지에서 ‘보이지 않는 손’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국정원 B 수사관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요원들과 내·외국인 제보자가 눈과 발 구실을 하고 있다”면서 “국제범죄 수사는 신뢰할 만한 제보나 첩보가 없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 전략문제연구소에 따르면 글로벌 범죄 조직은 9200개(조직원 약 150만 명)에 달한다. 이들은 전 세계를 누비면서 연간 1조 달러 안팎의 수익을 올리는데,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국경 및 인종을 초월한 조직 범죄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물론 한국도 국제범죄의 안전지대가 아니다. 야쿠자·삼합회·마피아는 말할 것도 없고, 최근엔 아프리카 조직까지 암약하고 있다.
2004년까지 한국에서 활동한 나이지리아 국적의 O. C. 프랭크는 전설적인 아프리카 범죄조직의 보스다. 아프리카 범죄조직은 나이지리아, 가나, 토고, 코트디부아르 등 서아프리카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들은 마약밀매, 금융사기, 밀입국, 인신매매, 다이아몬드 밀수 등에 개입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프랭크의 전공은 마약 밀매로, 한국 진출 이전에는 유럽에서 활동했다.
아프리카 범죄조직의 원조격인 나이지리아 조직의 두목이 서울에서 암약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프랭크는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유령회사를 세운 뒤 한국을 국제범죄의 베이스캠프로 활용했다. 그의 조직은 대량으로 마약을 다루는 ‘마피아 스타일’의 조직과 달리 소량을 빈번하게 운반, 밀매함으로써 틈새시장을 공략했다.
방글라데시 다카 교외의 위조지폐 제조공장.
프랭크가 조직원들과 함께 서울에 똬리를 튼 것은 한국의 감시망이 허술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국정원의 정보망은 날카로웠다. 프랭크는 수사망이 좁혀오는 것을 감지하고 유럽으로 도주했다가 독일 수사당국에 의해 검거됐다. 사정당국은 수사 및 기소를 위해 신병인도를 요구하려 했으나, 그는 범죄를 저지른 덴마크로 먼저 인도됐다가 탈옥해 현재는 행방이 오리무중이다. 따라서 그가 한국에서 얼마만큼의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소 생소한 아프리카 조직이 철저히 음지에서 움직이는 반면 홍콩·중국의 삼합회, 일본의 야쿠자, 러시아의 마피아 등은 국내 호텔과 기업체를 인수하는 등 합법을 가장해 국내 활동의 거점을 마련하고 있다. 국정원에 따르면 러시아 마피아는 수산물 분야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으며, 야쿠자는 금융 및 비즈니스 분야, 삼합회는 마약 밀매에 손을 대고 있다. 일부 환치기 조직도 삼합회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야쿠자는 재일동포를 비롯한 한국계 조직원을 사업가로 위장, 한국에 입국시킨 뒤 국내 폭력조직과 교류하게 하면서 대부업, 사기, 유흥업소 운영 등의 이권에 개입하고 있다. 일본 야쿠자 33개 조직 8만7000명 가운데 ‘야마구치구미’ 등 8개 조직이 국내 범죄조직과 결탁해 금융·부동산 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으며, ‘스미요시카이’는 재일동포 A 씨의 명의로 한국에서 호텔 하나를 인수했다. 이들은 합법투자를 가장해 한국을 돈세탁 기지로도 활용하고 있다.
전체 조직원이 1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삼합회는 국내 조직 및 중국동포와 연계해 마약 밀매뿐 아니라 중국인 밀입국 알선, 신용카드 범죄 등을 통해 한국에 이름을 알리고 있다. 북한 및 중국산 마약과 가짜 담배 판매 루트에도 삼합회가 관련됐다는 말이 나온다. 국정원은 지난해 9월 홍콩에서 제작한 위조 신용카드를 갖고 입국해 고가의 물품을 구입한 뒤 되파는 수법으로 돈을 챙긴 삼합회 일당 4명을 적발했다. 위조 카드는 한국 시장 진출을 저울질하는 동남아 조직들의 수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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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경찰에 압수된 동희 1호 적재 코카인.
“첩보 없으면 꼬리 잡기 힘들다”
국정원 요원이 드코크에 은닉된 히로뽕을 발굴하고 있다.
마약 생산 및 밀매는 국경을 넘나들며 은밀하게 이뤄지는 범죄라 해외 정보를 다루는 국정원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국내에서의 마약 생산은 1990년 범죄와의 전쟁 이후 뿌리뽑혔다는 게 수사당국의 판단이다. 국정원은 국제범죄조직의 마약 밀매 수익금이 필리핀, 아프가니스탄 등의 테러조직으로 흘러 들어가는지도 추적하고 있는데, C 수사관은 “해외 정보망을 총동원해 마약 조직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다음, 네이버 등 대형 포털사이트와 대포통장을 이용해 중국에서 항공택배, 국제우편으로 마약을 거래하는 수법도 정보망을 통해 이미 파악한 상태다. 최근엔 향정신성의약품을 판매하는 ‘인터넷 약국’도 포착했는데, 이들 국제범죄조직은 한국어 서비스와 무료배송을 미끼로 한국인 고객 유치에 나섰다고 한다. 인터넷 약국은 원래 의약품만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사이트로서 미국, 일본 등에서는 합법화돼 있다.
마약뿐 아니라 위조지폐, 밀입국, 여권 위·변조(무비자로 입출국이 가능한 나라가 많아지면서 한국 여권은 국제범죄조직의 표적이 되고 있다. 특히 구형 여권은 복제가 간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사기, 밀수 등의 범죄에서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국정원의 활약은 눈부시다(상자기사 참조).
KT&G가 만드는 ‘레종’과 ‘원’이 중국에서 위조된다는 사실을 최초로 포착한 곳도 국정원이다. 국정원 D 수사관은 1월 중국에 심어놓은 정보원에게서 L 씨가 중국 범죄조직과 연계해 중국산 가짜 한국 담배를 밀반입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 첩보는 중국 항구에서의 선적 및 한국 도착 시점까지 담겨 있을 만큼 신빙성이 있었다.
“정보가 가장 중요합니다. 근거 있는 첩보가 확보되면 그때부터는 잠복이지요. 가짜 담배 사건도 마찬가지였어요. 아이가 ‘아빠, 오늘은 집에서 자고 가라’고 조를 만큼 잠복이 잦지만, 국제범죄는 나라의 신인도와 관련된 문제라 다리품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짝퉁 국산 담배 밀수 적발도 국정원 작품
D 수사관은 ‘레종’과 ‘원’ 45만 갑이 국내에 반입된 과정을 포착한 뒤, 가짜 담배가 도매상에게 넘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3월 말 경찰과 함께 일당 4명을 검거했다. 한국 담배 위조 및 밀수가 처음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최근 국정원은 국제범죄와 산업스파이 방지 등을 눈에 띄게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불법도청과 정치공작 등 독재 및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음습한 이미지를 떨쳐내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국정원은 중국, 러시아 등 국제범죄 취약 국가에 대한 해외정보 수집 채널을 더욱 다원화할 계획이다. 또한 외국 정보기관과의 공조를 통해 대량 살상무기 및 위폐 밀거래에 대한 정보 활동도 강화할 예정이다. 국정원이 갈수록 첨단화, 지능화돼가는 국제범죄와의 전쟁에서 어떤 성과를 거둘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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