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정체성이라는 글자가 쓰인 ‘우영미’의 갈색상자.<br>2.\'트로바타의 비밀주머니에 들어 있는 편지와 동전으로 만든 목걸이.
좌석에 앉아 땀을 식히는데 홍보 담당 직원이 갈색 상자를 들고 와서 건넨다. 상자 뚜껑의 반은 반투명한 기름종이로 돼 있어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다. 기름종이 한쪽엔 정체성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고, 다른 한쪽은 갈색 바탕 그대로다. 무슨 뜻일까.
‘뜬구름 잡는’ 정체성이라는 글자의 뜻을 추리하고 있을 때 무대 한쪽에선 패션쇼와는 별도로 그림자 퍼포먼스가 열렸는데, 두 남성 무용가가 격렬하면서도 관능적인 안무를 선보이고 있었다.
쇼가 끝난 뒤 만난 우영미 씨는 “인간의 몸을 다양한 형태로 보여주고 싶었다. 인간의 몸은 완벽한 것이고, 디자이너의 역할은 단지 이 온전함을 조금 더 보기 좋게 포장해주는 것이다”라고 퍼포먼스의 콘셉트를 설명했다.
패션엔 이처럼 스토리가 있다. 디자인 이면에 담긴 얘기가 패션 자체보다 흥미롭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감성과 이미지로 점철된 럭셔리 패션 브랜드에서는 이러한 스토리 텔링이 더욱더 강조된다.
최근 프렝탕 백화점에 쇼핑을 갔다 왔다. 북적대는 사람들 틈에서 ‘트로바타’라는 미국 브랜드 옷 두 벌을 골라 들었다. 집에서 이리저리 살펴보다 옷 안쪽에 붙어 있는 옷감 취급주의 표시에서 재미있는 요소를 발견했다. 다른 브랜드 같으면 ‘드라이클리닝’ ‘손빨래’ 등이 기호로만 표시돼 있을 텐데 이 브랜드의 디자이너는 고객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림자 퍼포먼스가 열린 7월3일 우영미의 패션쇼.
“오래 입으시려면 이 ‘강아지’를 찬물에 손으로 목욕시켜주세요. (중략) 그런데 이런 거 말 안 해도 다 아시는 거 아닌가요?” - 샘.
옷 안쪽에 비밀스럽게 달려 있는 주머니는 또 뭔가.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이곳저곳을 갈색으로 염색한 이 작은 주머니에는 여분의 단추와 함께 꼬깃꼬깃하게 접은 종이 한 장, 동전으로 만든 목걸이 하나가 들어 있었다. 종이는 ‘미스터 본 캠벨 씨에게’라고 수신인이 적혀 있는 편지 두 장이 양면으로 인쇄된 것이었다.
-(앞면) “(탐험가)협회에 입회하려는 당신의 9번째 요청을 다시 한 번 거절합니다.”
-(뒷면) “행운을 빌기 위해 고대 바빌로니아 유적에서 찾은 동전과 아름다운 옷을 선물로 보냅니다.”
평범한 옷 한 벌에 웬 이런 황당한 문구들인가. 이 브랜드의 디자이너들은 한 인터뷰에서 “미스터 본 캠벨은 황당하고 유치한 세계 탐험가 지망생으로, 우리의 이번 시즌 패션 테마를 보여주기 위한 가상의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디자인에 앞서 함께 모여 질릴 때까지 T. S. 엘리엇의 문학작품을 읽고 스토리를 구상한다고도 했다. 물론 영감을 얻기 위해서다.
이야깃거리가 없는 브랜드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패션뿐 아니라 산업, 출판 등에서도 마찬가지일 듯싶다. 포스트모던한 소비자들이 점점 더 브랜드와 감성적 교류를 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패션 디자이너들이 패션 콘셉트를 설명할 때 종종 ‘웬 뜬구름 잡는 얘기?’라는 생각을 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 상상력의 형태가 춤추는 근육남이든, 아마추어 탐험가든 디자이너들의 ‘뜬구름’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뜬구름 잡는 사람이 없는 세상엔 문학도, 디자인도, 그리고 재미도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