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군 관할의 마르티레스 고지에서 내려다본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부시 미 행정부가 2001년 9·11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구실로 수감자를 고문하는 등 인권을 짓밟는 일이 예전보다 훨씬 늘어났다.”
국제적 인권단체인 국제사면위원회(AI)는 6월 말 발표한 ‘2006년 연례 인권 보고서’에서 미국의 인권정책이 신뢰를 잃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보고서가 말하는 ‘수감자’는 2002년 1월 쿠바의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에 세워진 포로수용소에 갇힌 450명을 가리킨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의 명칭은 ‘엑스레이 기지(Camp X-ray)’. 이 기지는 펜타곤(미 국방부)의 서류에는 GTMO로도 표기된다. 하지만 미군들 사이에선 발음대로 흔히 ‘지트모(Gitmo)’로 일컬어진다. 이 기지 안에는 군인 1000명, 관련 미국인 2000명이 머물고 있다. 탈레반과 알카에다 관련 혐의를 받는 포로들을 격리시킨 별도의 삼엄한 수용소는 ‘델타 기지(Camp Delta)’로 불린다.
인권침해 말 많은 국제법 사각지대
수감자들에 대한 인권침해로 ‘국제법의 사각지대’라는 비판을 받아온 관타나모 포로수용소를 찾기 위해 지난해 쿠바로 갔다. 관타나모는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900km쯤 떨어진 외딴곳에 자리잡고 있다. 서울-부산 간 거리가 445km이니, 그보다 두 배쯤 먼 길이다.
관타나모 포로수용소는 세계 언론 미디어의 사각지대다. CNN을 비롯한 미국의 주요 언론사들도 근접 취재가 어렵다. 그런 곳을 멀리서나마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쿠바군 관할의 마르티레스 고지다. 관타나모 일대의 높은 산인 시에라 크리스탈 능선이 바다와 맞닿는 고지 정상에 올라서니, 멀리 미 해군기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는 주권국가인 쿠바의 영토 안에 파고든 사실상의 식민지다. 1898년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필리핀과 더불어 쿠바를 빼앗으면서, 관타나모만 일대는 미 해군기지로 개발했다.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은 1959년 혁명에 성공한 뒤 줄곧 관타나모를 돌려달라고 요구해왔지만, 미국은 못 들은 체하고 있다.
최근 관타나모를 뒤흔드는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바람의 진원지는 워싱턴의 미 연방 대법관들이었다. 6월29일 대법관들은 5대 3으로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의 군사위원회에서 벌이는 간이 군사재판은 법적 근거가 없는 행정부의 자의적인 월권 조치로, 미국법과 제네바협약에 모두 위배된다”는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이 판결은 알카에다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의 운전사였던 살림 아흐메드 함단(36)이 “군사위원회의 약식 재판이 아니라 정식 군사재판을 받게 해달라”며 2004년 11월 이의신청을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오로지 생계를 위해 빈 라덴의 운전사로 일했을 뿐이므로, 공정한 재판을 받게 해달라.” 예멘 출신 고아였던 함단은 자신이 9·11테러나 알카에다 활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번 판결을 두고 워싱턴 정가와 펜타곤에서는 “빈 라덴의 운전사가 모는 차에 부시 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치였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았다. 가뜩이나 국제사회로부터 폐쇄 압력을 받아온 관타나모 포로수용소는 이번 판결로 전환점을 맞은 셈이다.
2005년 초 포로 학대로 지구촌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감옥과 마찬가지로 관타나모 포로수용소도 새삼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9·11테러 뒤 불어닥친 애국주의 바람에 침묵하던 미 언론조차도 관타나모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뉴욕타임스’는 “관타나모는 국가적 수치이므로 빨리 폐쇄하라”는 사설을 실었다.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는 지난 4년 동안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붙잡힌 759명이 갇혔다. 이 가운데 300명가량은 이렇다 할 혐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 풀려났다. 수감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영어를 잘 못하고, 포로 심문에 대해 전혀 훈련받지 못한 현지인들의 부적절한 통역 △현상금을 노린 인간 사냥꾼들과 아프간 군벌들의 농간 등으로 인해 쿠바행 비행기에 실려온 경우가 많았다.
현재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수감자는 450명. 이 중 9명만이 미 군사법정에 기소됐을 뿐, 나머지는 재판받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거의 대부분이 변호사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지내온 셈이다. 부시 행정부는 이들에게 전쟁포로가 아닌 ‘적성 전투원(enemy combatant)’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1949년 제정된 제네바협약에 따른 전쟁포로 대우를 하지 않았다.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의 수감자들은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장기구금과 ‘정보’를 끌어내기 위한 갖가지 심리적·육체적 고문, 비인간적이고 부당한 처우에 항의해 최근까지 여러 차례 단식투쟁을 벌이곤 했다. 수용소를 지키는 미군들은 단식자들의 입을 강제로 벌려 영양 공급 튜브를 집어넣는 등 수감자들에 대한 거친 행동으로 또 다른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6월 초엔 수감자 3명(사우디아라비아인 2명, 예멘인 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미군 측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관타나모 수감자들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미 인권단체인 시민자유연합(ACLU)이 미국의 정보공개법에 따라 획득한 FBI(미 연방수사국) 전자우편들과 국제적십자사 보고서 등은 미군이 정보를 얻어낸다는 구실로 수감자들을 마구 다뤄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부 미군 조사관들은 FBI 요원을 사칭하면서 ‘FBI 고문기법’을 수감자에게 사용한 것으로도 드러났다.
수감자 450명 중 9명만 군사법정에 기소
2003년 3월, 미 국방부에 보고된 한 문서는 관타나모 수감자들에 대한 정신적·육체적 고문을 허용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윌리엄 헤이네스 장군을 우두머리로 한 펜타곤 태스크포스팀이 작성한 그 문서는 “미국 시민 보호를 위한 정보를 얻어내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고문 금지 규칙을 관타나모에 적용할 필요가 없다고 건의했다.
그렇다면 관타나모 포로수용소는 폐쇄될 수 있을 것인가. 부시 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검토하는 방안은 폐쇄와는 거리가 멀다. ‘일부 석방, 나머지는 재판’ 쪽이다. 알 카에다 핵심 분자가 아닌 수감자들은 그들의 본국으로 송환하고, 나머지 핵심은 미국 법정에 세워 장기형을 받게 하겠다는 것이다. 미 공화당이 다수당이라는 이점을 살려 재판을 합법화하는 쪽으로 입법을 밀어붙이겠다는 것이 부시의 속내다.
관타나모 현지에서 만난 쿠바 사람들은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가 우리 손으로 돌아와 쿠바의 해군기지로 거듭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의 태도로 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미군 당국은 올 연말까지 관타나모 기지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제2의 수감시설을 지을 계획이다. 이로 미뤄볼 때 관타나모 포로수용소 폐쇄와 수감자 석방을 둘러싼 논란은 앞으로도 수그러들지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