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한 환자(왼쪽)와 대법원 전경.
만약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의 기대는 산산이 깨질 것이다. 회사 업무상 마신 술과 과로로 인해 몸이 상했다고 해도 ‘법적으로는’ 거의 보상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2001년 6월 갑작스런 황달 증세로 입원, 급성 간경변 진단을 받고 간이식 수술 끝에 겨우 목숨을 건진 김동원(가명·50) 씨. 처음 그는 다니던 대기업 S사로부터 2억원이 넘는 치료비와 요양비를 지원받았다. 회사 측이 산재로 인한 질병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2003년 말 회사에 복직, 다음 해 2월 퇴사했다.
그러나 김 씨는 이 과정에서 병마와 싸우는 한편으로 근로복지공단과 힘겨운 법정 다툼을 벌여야 했다. 공단이 산재보험금 지급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김 씨는 1, 2심 소송에서는 승소했지만, 지난해 10월 대법원은 공단의 손을 들어주었다. 대법원이 “과로 및 스트레스가 간 경화를 악화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의학적 근거가 없다”며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낸 것. 그로서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법원 패소 판결 직후 그는 자신이 20여 년간 몸담았던 S사로부터 2억여원에 달하는 치료비 반환을 요구받았다. 20년간 알뜰히 모아 장만한 집에는 가압류 딱지가 붙었다. 그는 고등법원 파기환송심 패소 판결 이후 대법원에 재항고했지만, 법조계에서는 대법원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있다. 김 씨는 “외환위기로 인한 구조조정 당시 노무담당자로서 매일 노조와 힘겨운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업무상 음주가 결국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만, 법은 이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2~3년간 승소 판결 거의 없어
2000년 5월 간경변과 간세포암 등으로 사망한 금융감독원 전직 간부 이명훈(가명·60) 씨도 비슷한 경우를 당했다.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한 1, 2심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간질환의 진행과 과로 및 스트레스의 인과관계가 의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으며, 환자가 자신의 질병을 방치했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결 내용이었다.
두 경우와 비슷한 사례는 최근 대법원 판결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확인된 판결만 10여 건에 달할 정도다. 2000년 초까지만 해도 간 질환과 관련한 대법원의 판결은 환자인 근로자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대법원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한 결과, 승소율도 60% 정도로 높았다. 대법원이 우리 사회의 술 문화와 업무상 스트레스가 간질환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법 해석을 광범위하게 했던 것.
그러나 이러한 판결 경향은 최근 몇 년 사이 달라졌다. 근로복지공단 측에 따르면 최근 2~3년간 업무상 스트레스와 음주로 인한 간질환자들이 낸 산재보험금 청구 소송에서 대법원 승소 판결을 받은 경우는 없었다.
대법원 관계자는 “‘어떤 질환은 무조건 안 된다’는 식의 기준을 가지고 판결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다만 업무상 스트레스와 음주가 간질환과 거의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의학적으로 입증되면서 판결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는 것.
그는 이어 “의사들의 소견을 들어보면 간질환의 경우 원인이 무척 다양해 구체적으로 특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면서 “개인 사정을 생각하면 딱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덧붙였다. 이제부터라도 술자리가 잦은 직장인들은 그것이 비록 업무의 연장이라고 해도, 자기 몸은 자기가 챙긴다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