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다니엘 헤인시우스의 연작 판화 ‘사랑의 엠블럼(1608)’
그림은 어느 무명의 수집가가 1620년에 만든 그림 앨범에서 나온 것이다. 그림의 작자는 다니엘 헤인시우스. 원작은 흑백의 동판화인데, 나중에 수집가가 채색을 하고 금박을 입혔다. 헤인시우스의 원작에는 그림을 두른 테두리 안에 ‘어둠 속의 빛’이라는 모토와 더불어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왜 그대는 저 어두운 망망대해에서 카스토르를 찾느뇨? 사랑에서는 하늘의 별이 아니라 눈이 길잡이라오.”
원작에는 그림 아래로 시 텍스트가 붙어 있다. “밤이 나의 사면에서 하늘을 감추네. 이 위험 속에서 내가 큰곰자리에 의지할 수 없다면, 나는 그대의 눈이 내게 보여주는 방향을 취하려네.” 이제 저 그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게다. 저것은 한마디로 사랑의 항해. 거기서 나를 이끌어주는 것은 쌍둥이자리의 알파성(카스토르)도, 북두칠성(큰곰자리)도 아니고, 나를 바라보는 연인의 눈이다.
상징적 그림 ‘엠블럼’
대개 이미지는 그 자체로 이해가 되기에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지만, 이 그림은 뜻을 따로 풀어줘야 한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이미지 아래로 보이지 않는 의미를 담은 그림을 ‘엠블럼’이라 부른다. 이 낱말의 어원인 그리스어 ‘엠블레마’는 원래 모자이크 속의 타일처럼 ‘삽입된 조각’을 의미했는데, 나중에 의미의 변화를 겪어 상징적 그림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엠블럼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먼저 그림의 제목 노릇을 하는 표제(inscriptio). 이를 ‘모토’ 혹은 ‘레마’라고도 부른다. 둘째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상(pictura). 하지만 이 그림은 그냥 봐서는 의미를 알 수 없기에, 그 뜻을 풀어줄 해제(subscriptio)가 필요하다. 해제는 아름다운 운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고, 내용적으로는 신화나 성서, 그밖의 문학 고전을 바탕에 깔고 있다.
엠블럼은 르네상스 말기에 시작해 특히 바로크 시대에 크게 유행했다. 17세기는 합리주의 시대였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모든 관념은 명석 판명해야 하고, 이 원칙에 따라 고전주의 비평가들은 그림에 단 하나의 분명한 의미를 가질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엠블럼은 바로 그 합리주의와 고전주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발터 벤야민이 엠블럼에 주목한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더니즘은 고전주의 미학의 해체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 잣는 큐피드
여기에서 모든 엠블럼의 예를 들 수는 없고, 17세 초에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던 판화가 헤인시우스의 것만 보기로 하자. ‘사랑의 엠블럼’(1608)이라는 제목의 그의 연작 판화를 보자면, 적어도 사랑이라는 면에서 ‘진보’나 ‘진화’ 따위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로크 시대나 21세기의 디지털 시대나 사랑의 근본문제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 먼저 사랑을 하면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
실을 잣는 큐피드 앞에 하녀 옷을 입은 한 여인이 서 있다(그림 2). 무슨 뜻일까? 표제에는 이런 모토가 적혀 있다. “여인에게 구애할 때 나는 이렇게 된다.” 이것으로 보아 하녀복을 입고 서 있는 사람은 실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인 모양이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여인에게 시중을 드는 하녀가 된다. 그림 속에서 큐피드는 실을 잣고 있다. 사랑을 위해서 남자는 실 잣는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어서 표제는 신화 속의 일화를 암시한다. “나는 실 잣는 일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헤라클레스도 이 일을 했음을 알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천하장사 헤라클레스는 리디아 여왕 옴팔레의 사랑을 얻기 위해 여자의 옷을 입고 하녀가 되어 실 잣는 일까지 했다고 한다. 남자가 여자 옷을 입는다는 것은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사랑에 빠지면 자기가 더 이상 자기가 아니라는 얘기다.
사랑의 게임
사랑만큼 복잡한 게임도 없다. 다음 그림을 보자. 큐피드 둘이 톱질을 하고 있다(그림 3). 이 그림의 모토는 “톱은 항상 위아래로 움직여야 한다.” 사랑에 빠지면 기쁨과 고뇌 사이를 오가며 여러 번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게 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톱은 위아래로 움직이지 않는 한 나무를 자를 수 없는 것을. 사랑에 왕도는 없다. “그대가 성공을 원한다면 끊임없이 이 일을 반복해야 한다.”
다음 장면에서 큐피드는 물구나무를 선다(그림 4). 표제가 재미있다. “모든 것을 본성에 반하여(omnia natrurae contraria)”라는 모토 옆에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랑에 빠진 이는 어디가 머리이고
어디가 발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해제에는 사랑에 빠진 이는 “모든 일을 거꾸로, 모든 일을 그릇되게 한다”고 적혀 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연인들은 실제로 하고 싶은 것과는 정반대로 말하고 행동하다가 결국 일을 그르치고 만다.
이때 사랑은 고문자가 된다. 사랑은 고문대 위에서 내 몸을 늘어뜨리고, 화형대의 장작불 위에서 내 몸을 불태운다(그림 5). 그리하여 “나는 고통 속에 살게 된다(in poenam viuo).” 하지만 “여인이 내게 가하는 고문을 견디는 것도 힘들지는 않으리라. 만약 그 벌이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가져다준다면.” 사랑 때문에 고통을 받다가 죽는 것. 그보다 더 힘든 일은 사랑을 잃은 상태로 사는 것이다.
다시 소년으로
그래도 사랑을 하고 싶은가? 그러면 “다시 소년으로(puer denuo)” 돌아가라. 사랑을 하려면 잠깐 “너의 정신을 접어두고, 약간은 바보가 되어라.” 그림 아래에 붙은 해제는 이를 이렇게 푼다. “사랑을 하게 되면 대개 분별력이 없어진다. 턱에 수염이 난 이들이 목에 아기의 턱받이를 걸친다. 너무나 사랑을 많이 하면 언제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목마를 탄 저 조그만 신처럼.”(그림 6)
남들이 반대하는 사랑을 하고 있다면 “저 부지런한 큐피드(amor eruditus)”처럼 하라. 그는 한 손에는 월계수를, 다른 손으로는 지혜의 책을 들고 독수리 등에 앉아 하늘을 난다. 개들이 짖어댄다. 하지만 사랑을 하려면 남들이 짖는 소리에 귀를 닫고 오로지 자신의 지혜만 믿어야 한다. 그때 너는 승리의 월계수를 휘날리며 “저 광대한 우주의 천개(天蓋)를 가로질러 날아가게 될 것이다.”(그림 7)
사랑의 불길에 타 죽을 것 같다고? 그럼 “타오르는 불길에서 자양분을 얻는 이 살라만더를 보라.” 사랑을 하는 이는 불 속에서 생명을 얻는 살라만더와 같다. 다른 것들에게 죽음을 가져다주는 그 불길이 “외려 우리의 마음에 달콤한 양식이 되고, 또한 그것이 “사랑의 고뇌로써 우리의 마음을 단련시켜준다.” 사랑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자는 살라만더처럼 불로 단련된 불사(不死)의 생명을 얻을 것이다(그림 8).
상형문자
최근에 바로크 엠블럼에 대한 관심이 대두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표제, 도상, 해제의 구조는 묘하게도 사진, 표제, 기사라는 신문의 형식과 일치한다. 물론 기사가 중요한 신문, 잡지와 달리 엠블럼에서는 도상이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아직은 저널리즘이 텍스트 위주지만, 이미 사진에 표제를 달고 거기에 기사를 붙이는 시각화의 경향은 강화되고 있다. 미래의 저널리즘은 엠블럼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엠블럼은 관념의 그림이다. 가령 헤인시우스의 연작 판화는 사랑에 관한 추상적 관념, 즉 사랑에 관한 격언과 잠언을 시각화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어떤 현대성이 숨어 있다. 이를테면 컴퓨터를 켜자마자 나타나는 윈도 창의 아이콘들 역시 명령어를 시각적으로 요약한 텍스트의 그림이다. 공항이나 지하철역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종류의 픽토그램들 역시 관념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는 영상의 시대. 텍스트를 시각적으로 요약해 프레젠테이션하는 것이 날로 중요해지고 있다. 아마도 21세기의 문화는 엠블럼의 전성기였던 바로크의 부활, 한마디로 디지털 시대의 바로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