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보유한 태조 왕건상(위)과 중국의 저명한 학자 허광웨가 쓴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금나라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다).
10·9 북 핵실험의 파장으로 잠시 수면 아래로 내려간 이슈지만 중국의 ‘동북공정’은 반드시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현재의 필요에 의해 과거 역사를 송두리째 왜곡하여 남의 역사를 빼앗는 것은 지극히 비문명적이며 제국주의적인 행위다. 그 왜곡 대상국인 우리로서는 한반도 역사를 총체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대응해야 한다. 그 첫걸음으로 만주족과 우리 민족의 역사적 관련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고려와 금나라는 밀접한 관계
먼저 고려와 금나라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하는 ‘고려사’의 여러 기록을 살펴본다. ‘고려사’ 세가 권 13 예종 을미 10년 3월조 편을 보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옛적에 우리나라 평주(平州)의 중 김준이 여진으로 도망하여 아지고 촌에 살았는데 이가 금나라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평주의 중 김행지의 아들 김극수가 처음 여진의 아지고 촌에 들어가 여진인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 고을(古乙) 태사(太師)를 낳았고, 고을은 활라(活羅) 태사를 낳았다. 활라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다. 맏이는 핵리발(劾里鉢)이요, 다음은 영가(盈歌)였는데, 영가가 가장 뛰어나 민심을 얻었다. 영가가 죽고 핵리발의 맏아들 오아속(烏雅束)이 그 뒤를 이었다. 오아속이 죽은 뒤 그의 아우 아골타가 위(位)에 올랐다’고 하였다.
예종 기축 4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기해일에 동번 사절인 요불(弗), 사현(史顯) 등이 내조하였다. 경자일에 왕이 선정전 남문에 나가 요불, 사현 등 6명을 접견하고 그들이 온 이유를 물으니, 요불 등이 아뢰기를 ‘지난날 우리의 태사 영가(盈歌)는 우리 조상이 큰 나라(大邦, 고려)에서 출생하였으니 의리상 자손의 대에 이르도록 거기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고, 지금 태사 오아속(烏雅束)도 역시 큰 나라를 부모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예종 정유 12년 편을 보자.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에는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에서 왔다는 기록이 있다.
금나라 황실이 고려의 후예라는 사실은 만주족이 자신들의 최초 왕국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발해의 상부 구조를 대조영 등 고구려인들이 구성하고 있던 사실과 상당한 유사성을 띤다. 이는 비교적 높은 수준의 문화적 소양과 사회의 운용·통치 경험을 지니고 있던 한민족의 지식층과 만주족의 대중이 결합해 국가를 건설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음으로 언어의 기원을 통해 만주족과 한민족의 연관성을 유추해 보자. 중국의 저명한 민족원류사 연구학자인 허광웨(何光岳)가 쓴 ‘여진원류사(女眞源流史)’를 살펴보면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주신(珠申)’ 혹은 ‘제신(諸申)’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두 단어 모두 중국어 발음은 ‘주선’이며, 만주어 발음 또한 주선(jusen, ‘사람’이라는 뜻)으로 우리의 ‘조선’과 매우 흡사하다.
사실 여진의 중국어 발음은 ‘뉘전’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이들을 우리 방식의 한자어 독음 그대로 ‘여진족’이라 불러온 것은 잘못된 것이다. 원래 만주족 발음대로 ‘주선족’이라고 불러야 맞다.
한편 말갈(靺鞨)족의 중국어 발음은 ‘모허(mohe)’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민족구성원이던 맥족(貊族)의 ‘맥(貊)’ 자의 중국어 발음이 바로 ‘모(mo)’이다. ‘전국문화정보자원공향공정’이라는 중국 정부의 관영 사이트에 소개된 자료에서도 ‘靺鞨, 是貊族同音詞(말갈은 맥족의 동음어이다)’라고 분명하게 기록돼 있다. 말갈족이 맥족으로부터 연유하고 있음을 분명히 규정한 것이다.
‘동북공정’ 반격할 수 있는 이론적 무기
중국 문헌에 따르면 만주족은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만주족의 순서로 이어져 왔다. 그런데 청나라 건륭제가 지시해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여진이 숙신으로부터 전래된 용어이며 그 발음은 ‘주선(珠申)’이라고 밝히고 있다. 물길(勿吉)의 중국어 발음(wuji)은 ‘옥저(woju)’와 유사하며 위에서 인용한 중국 정부의 관영 사이트도 물길이 옥저로부터 기원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압록강은 ‘읍루강’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 시조 누르하치의 6대조이며 청나라 황실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는 우리나라 경원과 회령 지방에 거주하면서 당시 회령에 살던 이성계와 교류했다. 조선 건국 후에는 조선 정부로부터 만호(萬戶), 상장군(上將軍)이라는 벼슬에 임명되기도 했으며 이후 조선군과 공동 토벌작전에 나섰다가 장남과 함께 전사했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과 만주족 역사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만주 지역과 한국 북부 지역의 역사는 한민족과 만주족이 공동으로 이뤄낸 역사다. ‘고려사’에는 수많은 거란족과 여진인, 그리고 발해인이 고려에 귀속했다는 기록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어, 그들이 한민족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었음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만주족과 한민족은 그 기원과 계통이 매우 유사하다. 심지어 동일한 기원을 지녔을 가능성도 높다.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은 중국 영토 내의 모든 역사를 중국 자신의 역사로 편입시킨다는 대전제하에 진행되고 있다. 최근 서길수 교수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 ‘만주사를 우리 역사에 편입하자’는 주장을 제기한 바 있다. 만주족을 오랑캐로 멸시하고 우리 스스로 작은 나라로 자기 폄훼를 해왔던 ‘소국주의적 경향성’은 중화사상을 극복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그러므로 역사적 실재에 토대를 둔 한민족과 만주족의 공통성 연구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근본적으로 반격할 수 있는 강력한 이론적 무기로 작용하는 동시에 우리 민족사의 지평을 확대, 심화하는 작업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