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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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했던 시대 ‘두통이’로 웃음 선물

  • 안중규 만화가 titicaca@korea.com

    입력2006-10-25 18: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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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울했던 시대 ‘두통이’로 웃음 선물
    1960~70년대 인기를 끌었던 만화 주인공 ‘두통이’는 건강하고 밝은 어린이상(像)으로, 암울했던 시절 코흘리개들의 친근한 벗이었다. 그 ‘두통이’를 만든 이가 바로 박기준(65) 선생이다. 박 선생은 평남 강서가 고향으로, 광복과 더불어 남으로 내려와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만화계에 입문했다.

    선생의 큰형 박기반 씨는 영문학 박사로 경희대 대학원장을 지냈으며, 둘째 형 박기정 화백은 중앙일보에서 오랫동안 시사만평과 캐리커처를 담당한 원로 만화가다. 그래서 박 선생은 어릴 때부터 형들의 영향을 받아 문학과 만화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만화가였던 둘째 형 어깨 너머로 다양한 만화를 접하고, 이에 대해 토론과 비평 과정을 거친 것은 그가 훌륭한 만화가로 성장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됐다.

    박기준 선생의 데뷔는 1958년 만화 잡지 ‘만화세계’를 통해 이루어졌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기에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실의에 빠져 있던 시절, 명랑물을 통해 그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기 위한 첫출발이었던 셈이다. 그의 데뷔작 ‘두통이’는 선생이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창작한 캐릭터였는데 초기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두통이가 인기를 끈 이유는 당시의 시대상을 적절한 해학과 풍자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바로 박 선생의 어릴 적 체험이 소재가 됐음은 물론이다.

    박 선생은 만화 창작 외에 출판사업에도 뛰어들었다. 형들과 함께 만화전문 출판사 ‘크로바 문고’를 만들었고, 이를 60년대 최고의 출판사로 성장시켰다. 당시 ‘크로바 문고’의 소속 작가로는 박부성, 방영진, 권영섭, 박기정 등이 있었는데 유명한 박기정의 ‘도전자’도 이 출판사에서 발행됐다. ‘크로바 문고’를 통해 발표된 여러 작가들의 공통점은 당시 유행했던 극화를 벗어나 이른바 만화체 그림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는 극화는 지속적인 연재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유머가 넘치고 그림을 간소화한 만화체를 탄생시킨 것이다. ‘크로바 문고’ 전속 작가들의 만화는 간략한 명랑 만화체와 반 삽화체, 순정체가 주류를 이루었고 이런 경향은 한국 만화계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이상무, 고행석, 배금택 등 무수히 많은 유명 만화가 배출



    그 후 박 선생의 작품은 짤막한 이야기의 유머 만화에서 장편 만화로 변하게 되는데, 그에 맞춰 ‘풍운이’ ‘오준호’ ‘고팽이’ 등의 새 주인공이 등장했다. 이들 새 주인공의 탄생에는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 ‘오준호’는 원래 이름이 ‘오징어’였고 ‘고팽이’도 원래는 ‘곰팡이’였지만, ‘만화심의윤리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주인공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이다. 당시는 4·19의거 이후의 긴장된 사회 분위기 탓에 ‘만화심의윤리위원회’의 지시에 절대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박 선생은 심적 충격을 받았고, 한편으론 새로운 일에 손을 대는 계기가 됐다. 1964년 선생은 형들의 도움을 받아 주니어 종합잡지 ‘여학생’을 창간, 10년 동안 직접 발행했다. 당시 학생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여학생’ 편집부에는 ‘사랑은 뭐길래’의 김수현, ‘타타타’의 양인자, ‘벽 속의 여자’ 최인선 등 실력파 작가들이 기자로 거쳐가 잡지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했다.

    그 이후, 만화의 매력을 잊을 수 없었던 박 선생은 1975년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에 취임해 회보를 발행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침으로써 협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박 선생이 회장으로 있던 시기는 한국만화가협회의 최고 전성기라 해도 무방하다.

    주인공 '두통이'는인간미 넘치고 의지가 강한 외유내강형 캐릭터. 지금도 어린이처럼 순수한 박기준 선생의 모습과 흡사해 주위 사람들은 작가의 자화상 같다고 말한다.

    ‘두통이’는 ‘두통거리’에서 따온 말로 ‘머리가 두 배나 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암울했던 시대 ‘두통이’로 웃음 선물
    박 선생이 만화 창작 외에 크게 관심을 쏟은 일 중의 하나가 후학 양성이었다. 신인 작가에게는 스토리를 주어 데뷔시키기도 했는데 이상무, 고행석, 배금택, 지성훈, 윤필, 김희섭 등이 박기준 화실을 통해 배출된 작가들이다. 1965년에는 외국 교재를 참고로 국내 최초의 만화 교재 ‘만화작법’을 만들었다. 현재 유명 작가인 김수정, 김동화, 박재동 등 많은 이들이 이 책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박 선생은 ‘만화작법’ 저술을 계기로 후학 양성에 본격적으로 나서 1989년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학원인 제일만화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 학원을 통해 김진태, 박구원, 정훈이, 최경아, 김미영, 강동헌, 신시하 등의 작가가 배출됐다.

    또한 박 선생은 대학에 만화학과가 태동될 때부터 교단에 섰다. 경민대 출강, 청강문화산업대 겸임교수와 만화박물관 기획단장, 남서울대 출강, 춘천정보대 학과장 등에 이어 목원대에 출강했고 지금은 호원대 디자인학부에서 초빙교수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렇듯 박 선생은 만화 작가에서 출발해 만화출판사 운영, 잡지 발행, 만화가협회 회장, 만화학원 원장, 만화학과 교수, 만화 큐레이터, 만화 행정가 등을 거치면서 100여 명의 제자를 배출시켜 명실공히 한국 만화계의 ‘박기준 사단’을 형성하게 됐다. 이러한 박 선생에겐 ‘만화계 최초’라는 몇 가지 수식어가 붙는데 ‘최초의 만화작법 책 저술’ ‘최초의 만화학원 원장’ ‘최초의 만화박물관 건립기획자’ 등이 그것이다.

    출판, 교수, 학원 등 다양한 만화 관련 일 거친 ‘만화계 산증인’

    한편 박 선생은 1998년 카툰 작가들의 모임인 국제만화가연맹 페코코리아(FECO KOREA) 회장을 역임했고, 99년에는 일본 만화신문 편집고문에 위촉돼 한국의 만화계 소식을 일본에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했다. 그리고 여러 제자를 일본의 만화 관련 대학에 추천, 만화 유학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만화계에 얽힌 박 선생의 에피소드 몇 가지를 살펴보자.

    선생이 만화를 그릴 당시, 극장에서는 ‘황야의 7인’과 ‘독립군 마적’ 등의 활극이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이 같은 장르를 만화화하기 위해 학생 입장 불가의 영화관을 찾았는데, 문하생이었던 까까머리 학생 이상무, 김희섭 등에게 교복이 아닌 어른 옷을 입혀 동행하기도 했다. 이때 그 어두운 영화관에서 화면에 나오는 ‘미국 서부’와 ‘중국’의 의상 및 풍경 등을 수첩에 스케치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만화를 그렸는데, 배경이 아주 실감나고 인기 있었다고 한다. ‘독고탁’으로 유명한 만화가 이상무의 필명도 박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박기준 화실과 박기정 화실은 이웃하고 있었는데 빨랫줄을 경계로 배구 경기를 하거나 땅에 구멍을 파놓고 막대기로 공을 쳐서 넣는 ‘미니 골프 경기’를 하곤 했다. 한번은 박기준 선생이 새벽에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 보니 낮에 골프에서 진 문하생들이 달빛 아래에서 밤새 골프 연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박기정 화실 팀과는 선의의 경쟁을 했고, 그런 의욕이 만화 창작으로 이어져 많은 작가를 배출하는 토양이 되기도 했다.

    고행석 씨가 처음 화실을 찾아왔을 때의 일이다. 곱살한 만화가 지망생이 그림을 갖고 왔는데 소질이 있어 보여 스토리를 주고 데생을 하라고 했더니 집에 가서 해오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허락했더니 아주 특출난 그림을 그려왔다. 고 씨에게 당장 출근하라고 하자 고 씨는 우물쭈물했고 그 뒤로 우락부락하게 생긴 키 큰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앞세운 사람은 동생이고, 자신이 고행석”이라고 실토하더란다. 동생의 얼굴을 이용(?)해 첫인상을 좋게 한 뒤 그림이 통과되면 이실직고하려 했다는 것이다. 당시 ‘크로바 문고’에 입성하는 것이 만화가 지망생들의 꿈이었고, 박기준 화실은 다른 곳에서 문하생 경험이 있는 사람은 받지 않는 등 심사과정이 까다로웠기에 고행석은 미리 알고 작전을 펼친 것이다.

    어느 평론가는 박기준 선생을 “밝고 건강한 꼴찌를 사랑했던 작가”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인간성 상실의 ‘일등주의’에 몰입하는 요즘 세태에, 그 건강한 꼴찌들이 우리 사회를 이끌 오피니언 리더, 중산층을 이루기를 선생은 기대할 것이다. 어려웠던 시절 어린 독자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대표 만화와 저서‘두통이’(1958, 월간 ‘만화세계’에 2쪽짜리 연재)/ ‘올림픽 소년’(1963, 전 50권, 크로바 문고)/ ‘푸른 하늘 저 멀리’(1965, ‘소년한국일보’에 연재)/ ‘노미호와 주리혜’(1965, ‘여학생’에 연재, 이후 이상무가 배턴을 이어받음)/ ‘두통이 훈련병’(1970, 전 20권, 한국일보 출판국)/ ‘왈가닥 대소동’(1971, 청자각)/ ‘두통 씨 가족’(1989~ 격월간 ‘자연보호’에 연재)/ ‘만화작법’(1965, 크로바 문고)/ ‘만화가가 되려면’(1987, 태광문화사)/ ‘만화스토리 작법’(1991, ‘보물섬’에 연재한 것을 우람출판사에서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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