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박물관
‘박물관’이라는 역어가 어디서 유래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은 예술보다 외려 박물학을 연상시킨다. ‘박물학(natural history)’은 ‘자연사’라는 말뜻 그대로, 동물학·식물학·광물학·지질학을 통칭하여 모든 자연현상에 대한 백과사전식 기술을 가리킨다. 그 전통을 따지자면 멀리 ‘피지카(physica)’를 지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더 직접적으로는 ‘박물지(historia naturalis)’를 지은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근대과학이 태동하던 17세기는 ‘박물학’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시대의 지식인들은 자연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을, 그에 못지않게 왕성한 수집벽으로 뒷받침했다. 그들은 자신의 연구실이나 실험실을 자연에서 그러모은 온갖 진기한 표본들로 가득 채우는 것을 좋아했다. 어떤 의미에서 ‘박물관’은 바로크 시대에 각 개인이 개별적으로 실천하던 수집벽을 공적 차원으로 확장한 기관이라 할 수 있다.
자연 속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물이 있기에 박물관의 종류도 수천, 수만 가지가 있다. 박물관은 ‘museion’이라는 원어가 암시하는 대로 예술의 신인 뮤즈들의 전당이라는 뜻. 원래 뮤즈는 넓은 의미의 학예를 가리켜 최초의 ‘무제이온’은 학문의 전당을 가리켰지만, 예술이란 말의 의미가 좁아지면서 ‘박물관’이라고 하면 예술작품을 수집해 전시해놓은 미술관이 떠오르게 되었다. 오늘날 미술관은 박물관의 대명사처럼 통한다.
박물관의 시대
과거에도 예술작품을 수집, 전시하는 문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술관’이라 번역되는 갤러리(gallery)라는 말은 원래 알렉산더대왕의 궁정 회랑에 예술작품들을 전시한 데서 비롯됐다. 중세 성당의 구조는 가운데에 미사를 보는 공간 둘레로 회랑이 있고, 순례자나 관람자들이 그 길을 돌며 성화나 성유물을 구경할 수 있게 되어 있다. 17세기에는 궁정이나 시청 건물 안에 당대 유명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전시공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물론 대중이 아니라 지식인, 외교관, 귀족 등 사회적 신분이 높은 엘리트들을 위한 것이었다.
우피치박물관 내부(좌).보티첼리의 ‘비너스 탄생’이 있는 우피치박물관(우).
이 맥락에서 주목할 것이 바로 1793년에 설립된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이다. 당시 루브르에 소장된 대부분의 예술작품은 부르봉 왕가의 소유물이었다. 하지만 1789년 대혁명이 일어나고 왕정이 폐지되면서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예술작품은 전 인민의 소유로 선포됐다. 박물관 문호 개방이 프랑스에서는 강한 정치적 상징성을 띤 채로 진행됐던 것이다. 계몽주의 사조가 휩쓸었던 19세기는 ‘박물관의 시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도처에 수많은 공공 박물관이 설립됐다.
세계의 붕괴
1753년에 설립된 대영박물관.
사실 백제의 장인은 미륵반가사유상을 ‘창작’한 게 아니며, 미륵반가사유상을 보던 백제인들도 그것을 ‘감상’한 것이 아니다. 장인은 경건한 마음으로 불상을 ‘봉헌’했으며, 그것을 보는 이들은 엄숙한 마음으로 불상이 던져주는 깨달음에 ‘참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불상이 원래 있던 맥락에서 떨어져나와 박물관에서 다른 불상들과 나란히 놓일 때, 그것은 한갓 미적 감상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백제의 유려한 선’ 운운하며 그것의 미적 특질을 논하게 된다. 이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견해가 갈리는 듯하다. 가령 발터 벤야민 같은 이는 ‘숭배가치’를 갖던 성물이 박물관에서 ‘전시가치’를 갖는 작품으로 변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대중이 종교적 태도에서 벗어나 사물을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는 역사적 진보라는 것이다. 반면 하이데거는 작품이 열어주는 세계가 붕괴했다고 한탄하며 작품을 대하는 현대인의 태도를 바꾸자고 한다. 작품을 성물 취급하던 과거의 태도로 회귀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보수적이라 할 수 있다.
바티칸박물관 내부
그럼에도 ‘뮤즈의 전당’에는 여전히 아우라가, 말하자면 성스러운 분위기가 존재한다. 전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원작 앞에 설 때 사람들은 교회나 사찰에서 성상이나 불상 앞에 선 느낌을 받는다. ‘모나리자’를 보려고 루브르에 가고, ‘최후의 심판’을 보려고 바티칸에 가고, ‘비너스의 탄생’을 보러 우피치에 가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성지순례라 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은 복제기술의 등장으로 이 미적 아우라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고 진단한다.
실제로 박물관 자체를 보수적이라 느낀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전통을 거부하고 혁신을 추구하는 모더니스트들일수록 박물관에 대한 거부감은 심하다. 박물관이란 곳은 과거에 창조된 미적 가치들을 보존해놓는 장소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박물관 안의 박제들을 당대 예술이 따라야 할 전범으로 내세우곤 한다. 이것은 한마디로 과거로 하여금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의 미래파들은 목청 높여 “박물관을 폭파하라”고 외쳤다.
이와는 맥락이 좀 다르지만 다다이스트들 역시 박물관에 대항했다. 그들은 미술관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반(反)미학을 실천하려 했다. 마르셀 뒤샹이 전시회에 변기를 출품한 것은 그 때문이다. 변기가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다면, 변기보다는 고상한 다른 모든 사물들도 박물관 안에 들어갈 자격이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박물관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제도가 아니다. 뒤샹의 변기는 오늘날 유수의 박물관 안에서 다른 고상한 원작 못지않게 찬란한 아우라를 마구 뿜어대고 있다.
박물관은 건재하다
최근 미디어아트가 등장하면서 박물관이 위기에 처한 듯 보인다. 오늘날 미술관에 가는 관객들은 어떤 어색함을 느낀다. 미술관에서는 관객이 움직이고, 영화관에서는 영상이 움직인다. 하지만 비디오아트가 등장하면서 미술관에서도 영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기는 여기에서 오는 게 아니다. 이는 박물관이 이 새로운 유형의 예술작품들을 전시하는 데 그다지 적합하지 못한 공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이것이 백남준 혁명 이후에 미술관이 직면한 가장 현실적인 위협일 것이다.
그럼에도 거기에 입장할 작품의 기준을 정한다는 점에서 미술관은 막강한 권력이다. 이 권력에 대항하는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미술관을 예술의 감옥이라 부르며 직접 대중을 만나기 위해 거리로, 현실의 공간으로 뛰쳐나간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시공의 한계가 없는 디지털 세계에는 ‘지금, 여기’라는 박물관의 체험이란 필요 없다면서 직접 대중을 만나러 웹으로, 사이버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미술관이 워낙 막강해 이 싸움들은 가망이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장영혜 중공업’이라는 웹 아티스트가 있다. 그가 만든 작품 중에는 삼성그룹에 신랄하게 야유를 퍼붓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삼성그룹이 소유한 ‘로댕 갤러리’에서 작품전을 열어준다는 제안에는 별 주저 없이 응했다. 이는 내용과 형식의 이중적 측면에서 배신이라 할 수 있다. 삼성을 야유하던 작품이 삼성 가문의 품에 안기는 것도 어색하지만, 사이버공간에 있어야 할 웹아트가 미술관 안에 들어가는 것도 영 어색하다. 이것은 미술관이 가진 권력의 힘을 보여준다.
삼성에서 지은 ‘리움’이라는 미술관이 있다. 그 명칭을 우리말로 풀면 ‘이(李)씨 가문의 전당’이라는 뜻이 된다. 국가에서 지은 미술관보다 10배의 비용을 들였다는 이 사설 미술관은 듣자 하니 사전예약제로 운영된다고 한다. 나라 전체 미술 역량의 10배의 힘을 가진 이 미술관은 그 성격이 19세기 이후의 공공 박물관이 아니라 16세기 이전의 사설 박물관에 가깝다. 나라 전체를 합한 것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삼성. ‘리움’은 나라 속의 나라, ‘삼성공화국’의 문화적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