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총리로 유력시되는 아베 신조.
북한은 일본의 총리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재무장도 도와주고 있다. 1998년 8월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하자 일본은 즉각 미사일방어체제(MD)와 첩보위성 4기 체제를 선언했다. 마치 기다렸던 일인 것처럼 그렇게 했다. 문제는 첩보위성 4기 체제다.
‘북한 위협’ 활용해 총리 자리 거의 확보
일본은 60년대 말 중의원 및 참의원 결의로 우주를 군사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첩보위성 4기 체제는 이 국회 선언을 파기한 것으로, 일본의 미래를 전망해볼 수 있는 명백한 잣대가 된다. 이후 일본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안보문제, 특히 군사문제를 해결하는 계기로 삼아왔다. 가깝게는 북한의 위협, 멀게는 중국 위협론이 일본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차기 총리로 거의 확정된 아베는 일본의 모습을 전면적으로 바꿔나갈 인물로 분석된다. 그가 내세운 공약과 활동 내용을 보면 이 점은 분명해진다. 외상을 지낸 아버지 아베 신타로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먼저 평화헌법 개정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 더 이상 패전 콤플렉스 혹은 죄의식에 빠진 일본이 아닌, 강대국 일본의 면모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7월22일 ‘자민당 재도전 지원의원연맹’ 회합에서의 강연을 통해 “차기 정권에서 평화헌법을 전면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베가 총리가 돼 평화헌법 개정에 박차를 가할 경우, 그가 공약으로 내세우는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검토기관 설립도 성사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일본 군대는 더욱 자유롭게 해외활동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아베는 종군위안부의 존재 자체도 부정하며, 그릇된 역사의식을 지적하는 한국과 중국에 대해서도 내정간섭이라고 맞서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그의 보수우익 경향이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아베가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를 얼렁뚱땅 덮어둔다고 해도, A급 전범 용의자로 지목된 외할아버지 기시 전 총리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반성하는 모습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고이즈미와 아베의 공통점은 전쟁의 아픔과 반성을 체험하지 않은 전후 세대에 자신의 지지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딜 가나 과거사 문제로 주눅 들어야 했던 전후 세대에게 자신감과 떳떳함을 심어주겠다는 그들의 지도력은 호응을 얻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또한 새로운 일본 건설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고이즈미나 아베 같은 지도자들이 나오게 된 일본 보수우익의 흐름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단단하게 다져진 것이다.
평화헌법 개정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집회. 그러나 현재 일본은 보수우익 현상이 대세로 자리잡았다.
일본의 보수우익화 경향은 1990년대 초 발발한 걸프전 이후부터다. 일본 경제산업성의 한 관리는 “130억 달러라는 거금을 쾌척하고도 국제사회로부터 ‘인적 공헌’이 없다는 이유로 비난받은 것은 일본인들에게 감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일본은 그 비난에 정면 대응하기 위해 국가전략을 달리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제 더 이상 패전 콤플렉스 안에 조용하게 머물러 있지 않겠다는 것이 일본 보수우익의 본심인 것이다.
이러한 보수우익의 여망이 선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고이즈미의 총리 선출이었다. 당시 고이즈미는 총리가 될 가능성이 대단히 낮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모리 총리에 대한 국민 지지도가 9%에 머물 정도로 와해 위기를 맞은 자민련에서 고이즈미는 ‘표현의 부끄러움’에 젖은 일본 국민들의 불만과 본심을 속시원하게 씻어줄 만큼 할 말을 마음대로 해댔고, 그 말은 국내적으로는 개혁, 국제적으로는 국가자존심 회복으로 발현되었다. 일본의 보수우익화는 이미 대세로 굳어진 일본의 분위기이며, 되돌리기에는 때가 늦은 큰 흐름이다. 일본의 경제계와 지식인들은 고이즈미 총리가 주변국, 즉 한국 및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너무 오랫동안 경색시켰기 때문에 차기 총리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하지 않는 인물’이 되기를 희망하며 여론몰이를 해보았지만 반전은 쉽지 않을 듯하다.
인도니세아 반다아체에 파견된 일본 자위대.
8월15일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고이즈미 총리(왼쪽).
지난해 봄 중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일시위 이후 일본 여당 간부들의 중국 방문을 허용하지 않던 중국은 고이즈미 총리 이후의 일본 동향도 탐색할 겸, 중국 의지도 표명할 겸 일본 고위 정치인들의 중국 방문을 허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체적인 관측은 아베가 새 총리로 선출돼도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하지 않는다는 분위기를 만들어 상생의 외교를 펼치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베도 예전과는 달리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 얼버무린다. 새 총리를 선출해야 하는 마당에 더 이상 주변국들과의 갈등은 좋을 일이 없다는 생각인 것이다.
“희생 있더라도 과거사 소홀히 하면 안 돼’
일본 보수세력들은 고이즈미의 역할이 그만하면 됐다고 판단하고 숨 고르기에 들어가 중국 및 한국과의 외교를 복원하여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에 진출하고, 군사적으로도 국제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절차를 밟겠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일본의 보수적 경향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변화라는 점을 냉엄한 현실로 수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로 한-일 관계가 경색되자 일각에서는 적당히 덮어두고 외교 관계를 복원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과거사 문제는 침착하고 비중 있게 다루어야 할 한-일 간의 문제이자 동북아의 주요 쟁점 사항이다. 다른 사안은 몰라도 과거사 문제를 소홀하게 다루면 가뜩이나 군사 대국화를 지향하는 일본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거침없이 내달릴 것이기 때문에 설령 상당한 희생이 뒤따른다 해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아베가 총리로 선출되면 고이즈미 총리처럼 장수 총리가 될지 여부는 지금으로서는 예측하기 힘들다. 그러나 만일 그가 3년 이상 총리직을 유지할 경우 일본은 그야말로 ‘새로운 일본’으로 태어나게 될 전망이다. 과거사에 주눅 들지 않는 당당한 일본, 경제력이 바탕이 된 정치대국 및 군사대국 일본, 그리고 중국과 힘을 겨루는 강대국으로서의 일본을 추구하게 될 것이고 자위대를 세계 만방에 ‘평화공헌’이라는 명분으로 내보내 일본의 국력을 신장시켜 나갈 것이다.
아베 신조는 일본이 강대국이 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여러 사안들, 즉 평화헌법 개정, 역사교과서 수정작업, 집단적 자위권 문제 등을 그의 임기 내에 마무리짓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심지어는 핵무기 제조에 관한 금기사항마저도 북한 변수에 따라 손을 댈 가능성도 있다. 그가 2002년 5월 와세다대학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원자폭탄이라도 소형이라면 헌법상 문제가 없다”라고 발언한 점은 간과할 일이 아니다. 원자폭탄 문제도 북한이 핵실험이라도 한다면 즉시 일본 내 여론에 불을 당겨 공론화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또 한번 북한이 아베를 도와주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은 외부의 충격이 있을 때마다 패전으로 묶여 있는 실타래를 풀어간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