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택 씨는 80년대에 ‘똥바다’란 제목의 ‘시원한’ 마당극을 통해 일찍이 한국적인 예술 장르의 잠재력을 증명해 보인 ‘마당극의 1인자’다. 당시 정보기관이 반체제 인사로 분류한 그의 인적 사항에 ‘마당극의 1인자’라고 적어놓았다고 하니 그야말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줄곧 극장 밖 거리와 마당에서 문화‘운동’을 펼쳐온 그를 지금은 시장님과 군수님들이 서로 모셔가려고 한다. 그가 다른 운동권 출신 인사들처럼 관계(官界)에 들어가 한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 아니다. 80~90년대에 마당극의 1인자였던 임진택 씨가 지금은 ‘축제의 1인자’가 되어 새로운 문화운동을 시험해보고 있기 때문이다.
1997년에 처음 열린 과천세계마당극 큰잔치를 시작으로 남양주 세계야외공연축제, 서울 통과의례 페스티벌, 전주 세계소리축제, 경기 실학축전, 그리고 올해 9월22일 김해시에서 열리는 ‘가야세계문화축전’ 등이 그가 기획하거나 연출하는 축제다. 현재 그의 공식 직함은 가야세계문화축전 집행위원장이다(또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부회장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함께 노는 공간 제공”
매일 쇼핑센터나 동네 공터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음에 귀가 따가울 만큼 축제와 페스티벌이 흔해진 데는 과천세계마당극 큰잔치의 대성공이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이 성공에 자극받은 지방자치단체들이 너도나도 축제 개최에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임진택 씨는 행정가들과의 갈등 때문에 자식 같은 ‘과천세계마당극 큰잔치’가 ‘세계공연예술제’로 이름이 바뀌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지난해에는 또 다른 지자체와 재판 끝에 처음으로 축제에도 ‘저작권’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았다.
임진택 씨의 축제들이 없었다면 축제나 페스티벌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선 서양식 문화나 놀이공원의 이벤트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일제 식민지와 근대화 시기를 지나는 100년 동안 우리는 뭘 하고 놀아야 할지, 어디서 놀아야 할지, 논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1981년 억지로 놀아야 했던 관제(官制) 축제 ‘국풍81’은 더욱 나쁜 추억을 남겼다.
임진택 씨도 “축제에 대한 최초의 접근은 ‘국풍81’이었다”고 했다. 서울대 외교학과와 ‘연극반’ 활동을 졸업(!)하고 당시 동양방송 PD로 근무하던 그는 ‘국풍81’에 반대하다가 강제 사직됐다.
“축제란 그곳 사람들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담아야 합니다. 연예인 보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건 축제가 아닙니다. 축제가 사람들에게 전망을 보여주는가, 거창하게는 시대정신을 구현하는가가 축제의 성공과 실패를 가릅니다. 아니, 축제의 성립 요건입니다.”
그 후 임 씨는 연희광대패와 민족극운동협의회를 만들어 극장 무대나 조명, 의상, 기타 효과 등이 없이 ‘현장성을 바탕으로 하는’ 마당극을 발전시켜왔다.
“야외 연극이 우리나라의 마당극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나 있는 보편적 문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우리 식의 마당극 축제를 꿈꾸게 됐습니다. 열린 마당의 축제가 자본주의와 만나면서 극장 안에 갇히게 된 것을 다시 밖으로 끌어낸 것입니다. 열린 판에서 벌어지는 축제의 폭발력은 실로 엄청납니다. 축제는 창조자와 향유자의 관계를 확장하는 장이기 때문에 예술이 뭔지 모르는 사람도 함께 놀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그래서 ‘3일 밤낮 음주 가무 제전을 벌였다’는 옛 기록에 무릎을 쳤던 겁니다.”
올해 열리는 ‘가야세계문화축전’에는 문화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과격파’ 3인이 뭉쳤다. ‘일본 천황과 일본 씨름 스모의 시조는 가야인’이라는 과격한 내용의 소설 ‘제4의 제국’을 펴낸 소설가 최인호 씨와, 이를 비트박스와 인도의 카타깔리, 일본의 부토 등을 망라한 연극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하겠다는 연출가 이윤택 씨가 합세했다.
축제가 열리는 9월23일부터 10월2일까지 매일 저녁 공연될 ‘제4의 제국’을 통해 가야인이 북방 기마유목인과 인도에서 출발한 해양문화, 토착 농경문화를 결합한 코스모폴리탄으로서 가야가 망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이 되었다는 사실을 야외 마당극 형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해양성의 추억 찾자’
그의 말처럼 지역적 정체성이 축제의 성립 요건이라고 해도, 김해 국제공항이라는 장점을 살리고 일본어 안내서까지 펴낼 만큼 ‘범아시아’ 세계축제를 지향한다면서 ‘일본 천황의 기원은 가야인’이라는 주장을 담은 마당극을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고구려 역사를 소재로 한 TV 드라마의 인기를 의식한 건 아닐까.
“오늘날의 국가 패권주의적 시각으로 가야를 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공연물로는 처음으로 일본이 주장해온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표현하고 있지만, 가야의 독특한 국제성, 해양성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즉, 가야연맹체라는 자치정부제, 북방과 남방 문화가 공존한 가야의 문화적 다양성에서 현대 문명이 지향해야 할 단서들을 찾아보자는 의도입니다.”
이윤택 씨 등의 말에 따르면 ‘사료가 없어도 신화는 신화로서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며 타자를 배척하지 않은 ‘거의 무정부주의적인 가야 문화’를 보여줄 계획이라고 했다. 오히려 경직된 한국 사람이 본다면 ‘왜색’으로 보일 만한 연출이 많아 놀랄지도 모를 것이라고 한다.
임진택 씨는 가야의 ‘고금’, 즉 가야금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기 위해 ‘현의 길’이라는 현악기 축제도 기획했다. 즉 고대부터 현악기가 이어진 스페인, 우즈베키스탄, 이란, 러시아, 중국, 태국, 그리고 가야와 일본 등의 현악기 연주단을 초청해 가야금과 비교하고 함께 연주하는 공연을 갖는 것이다.
“내가 가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김해평야와 ‘가야금’ 식당, 김해공항 정도였습니다. 모두 현대사였지, ‘고도’로서의 가야는 전혀 몰랐던 겁니다. 가야 축제를 기획하면서 사라진 ‘제4의 제국’ 500년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아쉬운 점이 많다. 이제 겨우 5년에 걸친 유적지 정비사업 1단계가 끝난 상태라 가야 유적이 극히 빈약하다는 점도 그렇고, 지금까지 가야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일한 국보인 ‘기마인물형토기’가 김해국립박물관이 아니라 경주박물관에 가 있는 점도 그렇다. 지난해 처음 가야 축제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벌였던 일이 ‘국보 환수’인데 아직 이렇다 할 대답을 얻지 못했다. 지역 문화제로 출발한 가야 축제를 국가적, 아시아적 축제로 키우겠다고 결심한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지난해 재미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행사 때 쓰던 대형 풍선이 끈이 풀려 날아갔는데, 이틀 뒤 일본 규슈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풍선 찾아가라고. 한국의 남해안과 일본, 중국의 바다가 이렇게 가깝게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해양성의 추억을 찾자’를 이번 축제의 목표로 정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일들은 역사가들의 몫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료와 유적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역사가들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임 씨는 이것이 바로 상상력을 가진 ‘광대’가 축제를 통해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그는 여전히 바깥에, ‘마당’에 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줄곧 극장 밖 거리와 마당에서 문화‘운동’을 펼쳐온 그를 지금은 시장님과 군수님들이 서로 모셔가려고 한다. 그가 다른 운동권 출신 인사들처럼 관계(官界)에 들어가 한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 아니다. 80~90년대에 마당극의 1인자였던 임진택 씨가 지금은 ‘축제의 1인자’가 되어 새로운 문화운동을 시험해보고 있기 때문이다.
1997년에 처음 열린 과천세계마당극 큰잔치를 시작으로 남양주 세계야외공연축제, 서울 통과의례 페스티벌, 전주 세계소리축제, 경기 실학축전, 그리고 올해 9월22일 김해시에서 열리는 ‘가야세계문화축전’ 등이 그가 기획하거나 연출하는 축제다. 현재 그의 공식 직함은 가야세계문화축전 집행위원장이다(또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부회장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함께 노는 공간 제공”
매일 쇼핑센터나 동네 공터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음에 귀가 따가울 만큼 축제와 페스티벌이 흔해진 데는 과천세계마당극 큰잔치의 대성공이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이 성공에 자극받은 지방자치단체들이 너도나도 축제 개최에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임진택 씨는 행정가들과의 갈등 때문에 자식 같은 ‘과천세계마당극 큰잔치’가 ‘세계공연예술제’로 이름이 바뀌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지난해에는 또 다른 지자체와 재판 끝에 처음으로 축제에도 ‘저작권’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았다.
임진택 씨의 축제들이 없었다면 축제나 페스티벌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선 서양식 문화나 놀이공원의 이벤트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일제 식민지와 근대화 시기를 지나는 100년 동안 우리는 뭘 하고 놀아야 할지, 어디서 놀아야 할지, 논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1981년 억지로 놀아야 했던 관제(官制) 축제 ‘국풍81’은 더욱 나쁜 추억을 남겼다.
임진택 씨도 “축제에 대한 최초의 접근은 ‘국풍81’이었다”고 했다. 서울대 외교학과와 ‘연극반’ 활동을 졸업(!)하고 당시 동양방송 PD로 근무하던 그는 ‘국풍81’에 반대하다가 강제 사직됐다.
“축제란 그곳 사람들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담아야 합니다. 연예인 보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건 축제가 아닙니다. 축제가 사람들에게 전망을 보여주는가, 거창하게는 시대정신을 구현하는가가 축제의 성공과 실패를 가릅니다. 아니, 축제의 성립 요건입니다.”
그 후 임 씨는 연희광대패와 민족극운동협의회를 만들어 극장 무대나 조명, 의상, 기타 효과 등이 없이 ‘현장성을 바탕으로 하는’ 마당극을 발전시켜왔다.
“야외 연극이 우리나라의 마당극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나 있는 보편적 문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우리 식의 마당극 축제를 꿈꾸게 됐습니다. 열린 마당의 축제가 자본주의와 만나면서 극장 안에 갇히게 된 것을 다시 밖으로 끌어낸 것입니다. 열린 판에서 벌어지는 축제의 폭발력은 실로 엄청납니다. 축제는 창조자와 향유자의 관계를 확장하는 장이기 때문에 예술이 뭔지 모르는 사람도 함께 놀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그래서 ‘3일 밤낮 음주 가무 제전을 벌였다’는 옛 기록에 무릎을 쳤던 겁니다.”
올해 열리는 ‘가야세계문화축전’에는 문화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과격파’ 3인이 뭉쳤다. ‘일본 천황과 일본 씨름 스모의 시조는 가야인’이라는 과격한 내용의 소설 ‘제4의 제국’을 펴낸 소설가 최인호 씨와, 이를 비트박스와 인도의 카타깔리, 일본의 부토 등을 망라한 연극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하겠다는 연출가 이윤택 씨가 합세했다.
축제가 열리는 9월23일부터 10월2일까지 매일 저녁 공연될 ‘제4의 제국’을 통해 가야인이 북방 기마유목인과 인도에서 출발한 해양문화, 토착 농경문화를 결합한 코스모폴리탄으로서 가야가 망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이 되었다는 사실을 야외 마당극 형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해양성의 추억 찾자’
그의 말처럼 지역적 정체성이 축제의 성립 요건이라고 해도, 김해 국제공항이라는 장점을 살리고 일본어 안내서까지 펴낼 만큼 ‘범아시아’ 세계축제를 지향한다면서 ‘일본 천황의 기원은 가야인’이라는 주장을 담은 마당극을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고구려 역사를 소재로 한 TV 드라마의 인기를 의식한 건 아닐까.
“오늘날의 국가 패권주의적 시각으로 가야를 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공연물로는 처음으로 일본이 주장해온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표현하고 있지만, 가야의 독특한 국제성, 해양성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즉, 가야연맹체라는 자치정부제, 북방과 남방 문화가 공존한 가야의 문화적 다양성에서 현대 문명이 지향해야 할 단서들을 찾아보자는 의도입니다.”
‘2006 가야세계문화축전’ 기자 간담회.
임진택 씨는 가야의 ‘고금’, 즉 가야금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기 위해 ‘현의 길’이라는 현악기 축제도 기획했다. 즉 고대부터 현악기가 이어진 스페인, 우즈베키스탄, 이란, 러시아, 중국, 태국, 그리고 가야와 일본 등의 현악기 연주단을 초청해 가야금과 비교하고 함께 연주하는 공연을 갖는 것이다.
“내가 가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김해평야와 ‘가야금’ 식당, 김해공항 정도였습니다. 모두 현대사였지, ‘고도’로서의 가야는 전혀 몰랐던 겁니다. 가야 축제를 기획하면서 사라진 ‘제4의 제국’ 500년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아쉬운 점이 많다. 이제 겨우 5년에 걸친 유적지 정비사업 1단계가 끝난 상태라 가야 유적이 극히 빈약하다는 점도 그렇고, 지금까지 가야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일한 국보인 ‘기마인물형토기’가 김해국립박물관이 아니라 경주박물관에 가 있는 점도 그렇다. 지난해 처음 가야 축제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벌였던 일이 ‘국보 환수’인데 아직 이렇다 할 대답을 얻지 못했다. 지역 문화제로 출발한 가야 축제를 국가적, 아시아적 축제로 키우겠다고 결심한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지난해 재미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행사 때 쓰던 대형 풍선이 끈이 풀려 날아갔는데, 이틀 뒤 일본 규슈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풍선 찾아가라고. 한국의 남해안과 일본, 중국의 바다가 이렇게 가깝게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해양성의 추억을 찾자’를 이번 축제의 목표로 정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일들은 역사가들의 몫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료와 유적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역사가들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임 씨는 이것이 바로 상상력을 가진 ‘광대’가 축제를 통해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그는 여전히 바깥에, ‘마당’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