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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대한제국을 許하라?

황실의 부활이냐 그들만의 이벤트냐

대한제국 황위 승계식 의구심 증폭 … 황실 문화 관심 큰 젊은 층서 논란 뜨거워

황실의 부활이냐 그들만의 이벤트냐

황실의 부활이냐 그들만의 이벤트냐

고종 황제 가족사진.

‘가문의 부활’인가, ‘그들만의 잔치’인가. 추석 연휴가 임박한 9월29일,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손을 자처하는 인사들의 모임인 ‘대한제국황족회’(이하 ‘황족회’)가 전격적으로 벌인 대한제국 황위 승계식을 둘러싸고 세간의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다. 황족회는 이날 의친왕의 둘째 딸 이해원(88) 옹주를 제30대 황위 계승자인 여황(女皇)으로 추대해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와 관련해 황족회 측은 “대한제국 황실이 일제에 의해 강제 침탈된 지 100년, 조국이 광복된 지 61년이 지났지만 영친왕(28대)의 아들인 이구 저하가 후사 없이 지난해 7월 일본 도쿄에서 의문사해 영친왕가의 맥이 끊김에 따라 해원 옹주를 30대 황위 계승자로 추대했다”고 공언한 바 있다.

이해원 옹주 여황으로 추대 대관식 거행

그러나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황실의 상징적 복원을 지지하는 이들의 모임인 ‘우리황실사랑회’ ‘대한황실재건회’ 등이 일제히 이에 반대하고 나서면서, 이들 단체의 인터넷 카페 회원들은 물론 누리꾼(네티즌)들 사이에서도 때아닌 대한제국 황실 복원 찬반논쟁이 불붙고 있다. 현재로선 비판 여론이 압도적이다.

“민주공화제를 택하고 있는 이상 황실 복원은 어불성설이다. 대관식? 헌법에 대한 이해 없는 몰상식한 일을 한 것이다. 공화제가 뭔가? 왕이 없는 나라라는 뜻이다.”(9월30일, ID 봉)

“그들에게 ‘하늘’의 힘을 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일인(日人)들로 인해 망가진 황실이므로 스스로 복원하는 걸 뭐라 하고 싶지는 않다.”(9월30일, ID 반 고착)

“황실 복원에 대한 시도는 매우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복원은 국민 다수의 자발적 제안이 아니라 특정 집단에 의한 그들만의 잔치이므로 국가적으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황실 복원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며, 그 이유는 현재 황실 복원이 명분과 정당성 없는 이익집단의 제한적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0월10일, ID 바람할매)

황실의 부활이냐 그들만의 이벤트냐

9월29일 대한제국황족회가 여황으로 추대한 이해원 씨.

반면 황실 복원에 우호적이거나 동정적인 입장도 없지 않다.

“왕권 회복이라고 보지 말고, 우리나라의 문화와 찬란했던 왕실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문화의 한 코드로 바라봤으면 한다. 정치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철저히 견제한다면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10월1일, ID superqoo)

“황실 복원을 찬성한다. 강한 황실의 복원을….”(10월5일, ID 지영뿌)

느닷없이 터져나온 이러한 황실 복원 논란에 대해 일제강점기 상황에 정통한 연구자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인다.

근대 조선의 여러 사건들을 다룬 ‘경성기담’의 저자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문사회과학부 전봉관(35) 교수는 “고종 황제의 경우 청나라(중국)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업적을 평가받고 있지만, 그 이후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직(李王職·일제강점기에 궁내부 소속으로 조선 왕실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사례에서 보듯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 수단으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한민족 전체를 아우를 만한 정통성과 상징성을 지녔다고 보기 힘들다. 따라서 황실 복원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5월, 대한제국 황실 후손들의 이야기를 다룬 ‘제국의 후예들’을 펴낸 서울대 국문학과 출신의 저술가 정범준(36·관훈클럽 근무) 씨는 “이번 승계식 소식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한편으론 가슴도 아팠다”고 했다. 그는 저술을 위해 황실에 관한 수백 권의 문헌과 신문·잡지를 검토한 것은 물론이고, 생존한 황실 후손들과도 여러 번 만났다고 한다. 정 씨는 “집필 준비과정에서 2005년 말과 올해 초 두 차례 이해원 여사를 만났는데, 당시만 해도 이 여사는 ‘여황’이 되고 싶다는 의중을 단 한 번도 내비친 적이 없다”면서 사견임을 전제로 “이번 승계식은 이 여사를 옹립한 인사들 중 일부가 이 여사가 여황으로서 갖게 될 차기 황위 계승자 지명권에 대해 일종의 허영심을 품고 시도한 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 ‘난센스’쯤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적 합의 없이 집터에 문패 다는 격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황실 복원 논란이 거의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번 논란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의 상당수가 10, 20대 젊은 층에 쏠려 있음을 시사한다.

황실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만한 집단 중 하나가 유림(儒林)일 터. 그럼에도 성균관 유도회 총본부 측은 이번 논란에 대해 일언반구도 내놓지 않았다. 유도회 관계자는 “그 일(승계식)을 뉴스를 통해 접하긴 했지만 자세한 내막은 모르며, 그에 대한 유도회의 입장 혹은 관련 내용을 말할 만한 마땅한 사람도 없다”며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하필 현시점에서 난데없이 황실 복원 논란이 불거진 걸까. 문화평론가 서정신(50·스프링 컨설팅 대표) 씨는 이번 논란을 이렇게 진단한다.

황실의 부활이냐 그들만의 이벤트냐

드라마 ‘궁’의 포스터.

“황족회의 승계식 거행 의도가 뭔지 나로선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재 인터넷을 기반으로 벌어지고 있는 황실 복원 논란은 재벌가의 혼사나 스캔들, 노현정 아나운서의 결혼 등에 대한 젊은 층의 과도한 관심에서도 익히 보았듯, 끊임없이 럭셔리한 ‘뉴스 메이커’를 갈구하는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안성맞춤의 소재다. 사라진 제국과 황족의 부활, 이 얼마나 지속적이면서도 몽환적이며 부럽기 짝이 없는 관심의 대상인가? 이는 한편으로 ‘침몰하는 배’나 다름없던 대한제국에 대한 역사의식의 부족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황실, 혹은 황실 문화가 대중의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8월, SBS 라디오 뉴스엔조이가 여론조사 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4.4%가 황실 복원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반대’한다는 의견은 30.5%에 그쳤다. 연령별로는 50대 이상에서 찬성 의견이 62.8%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20대 56.8%, 40대 54.1%, 30대 42.7%가 찬성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조사 당시 리얼미터 측은 그보다 몇 달 전 종영된 MBC 드라마 ‘궁’이 보여준 황실 이미지가 젊은 층에게 팬터지를 갖게 한 것으로 풀이된다고 분석한 바 있다.

실제로 ‘궁’의 인기는 대한제국 황실과 황족 후손들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올 1월, 고종의 증손녀이자 모델로 활동 중인 이홍 씨가 대한제국의 실제 공주인지 여부를 놓고 인터넷 논쟁이 벌어지면서 대한제국의 황실 족보가 나돈 것이 그 한 예다. 분단되지 않은 한반도에 입헌군주제가 시행되고 있는 상황을 가정해 화제를 뿌린 ‘궁’은 여세를 몰아 2007년 초 방영 예정으로 후속편이 준비되고 있어서 ‘황실의 부활’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키는 기저(基底)로 작용할 전망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왕실을 가진 국가는 30여 개국. 하지만 1897년 탄생한 뒤 1910년 한일병합(韓日倂合)조약의 강제 체결로 사라졌던 대한제국의 황실이 그 치욕의 역사에 대한 되새김질 없이 신성성과 화려함, 낭만으로 윤색(潤色)된 드라마 ‘궁’ 속의 황실처럼 부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굳이 헌법을 비롯한 현행 법체계와 상치되는가 하는 복원의 현실성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황실의 부활은 그 성격이 제아무리 ‘상징적 복원’이라 할지라도 한 누리꾼의 비유처럼 ‘집터만 남은 곳에 문패를 다는 격’일 수밖에 없다.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많은 국민들은 옛 황실의 ‘고귀한’ 혈통보다는 그들이 과거 황족의 일원으로서 나라를 위해 어떤 책무를 이행했는지를 여전히 묻고 싶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회적 합의도 생략된 채 ‘돌출’된 대한제국 황실 복원 논란, 이제 그 내막을 찬찬히 뜯어보도록 하자.

주간동아 2006.10.24 557호 (p18~20)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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