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운영하는 인터넷 바둑 사이트인 마이바둑닷컴에서는 북한이 자랑하는 바둑 고수들과 온라인 상에서 바둑을 둘 수 있다.
분단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 국민에게 통일은 한반도 어디든 아무 제한 없이 마음대로 오가며 누구라도 만날 수 있는 자유가 아닐까. 분단 현실은 사이버 세상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현행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르면 남한 주민이 인터넷을 통해 북한 주민과 접촉하려면 통일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인터넷상의 접촉도 마찬가지. 현행법상 우리 국민이 북한의 인터넷 사이트를 방문해 북쪽 사람과 접촉하려면 통일부 장관의 사전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이버상의 접촉은 불법행위다.
하지만 인터넷 세상의 속성상 이 같은 규제는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인터넷 세상에는 애당초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보의 장벽을 허물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과 가치 체계를 공유하는 세계가 인터넷이 추구하는 이상향. 물리적 장벽이 없으니 누구나 원하는 곳을 돌아다닐 수 있다. 북한 사이트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미 많은 국내 네티즌들이 북한 사이트를 방문했고 그 게시판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또 일부는 북한 사이트에 정식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많은 네티즌 북한 사이트 방문 경험
하지만 북한 사이트를 방문해 콘텐츠를 열람하는 것까지는 허용돼도 북한에서 제작된 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하는 것은 불법이다. 현재 북한 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중인 국내 네티즌은 대략 70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법대로라면 이들 모두는 실정법을 위반한 채 사이버 월경(越境) 행위를 하고 있는 셈이다. 과연 이들의 ‘무단 월경’을 막을 수 있을까. 남한의 사이트를 찾아 사이버 국경을 넘어오는 북한 네티즌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남북한 간 인적·물적 교류가 시작될 당시만 해도 고민거리 축에도 들지 못하던 일들이 지금 정부 당국의 골칫거리로 떠오르자 이를 풀기 위해 여야 정치권이 나섰다.
한나라당 조웅규 의원을 비롯한 114명의 여야 의원은 5월6일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개정안의 골자는 북한 주민 접촉에 대해 통일부 장관의 사전 승인을 얻도록 한 남북교류협력법 제9조에 ‘다만 정치적 목적이 아닌 교류협력을 위한 인터넷 접촉의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는 단서 조항을 신설하자는 것. 즉 음성적으로 진행해오던 인터넷을 통한 대북접촉을 ‘비정치적 목적’에 한해 전면 허용하자는 것이다.
이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조웅규 의원은 “6월 임시국회에서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정식 안건으로 올린 뒤 빠르면 이번 임시국회 회기 중 본회의에 상정해 개정안을 통과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의원은 “인터넷 개방이야말로 북한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여야를 떠나 100명이 넘는 의원이 발의에 참여한 만큼 시간이 문제일 뿐 국회 통과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나라당 내 대표적 보수파인 김용갑(왼쪽) 조웅규 의원.두 사람은 인터넷 개방과 관련,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여기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의문 하나. 과연 북한의 인터넷 파워는 어느 정도일까. 김용갑 의원의 주장처럼 북한 당국의 온라인 이념공세는 남한의 국론을 분열시킬 만한 힘이 있을까.
이에 대해 최초의 남북한 합영 인터넷 기업 ‘조선복권합영회사’의 남한측 출자자인 훈넷의 김범훈 사장은 “그런 주장은 북한의 현실을 너무나 모르는 데서 비롯된 기우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북 인터넷 수준 낮고 대중화 안 돼”
김사장은 “조선복권합영회사의 인터넷 사이트인 주패닷컴(jupae.com)의 비회원 게시판을 한번 보라. 비실명제로 운영되지만 수천건의 의견 가운데 욕설이나 비방, 정치적 선전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지극히 평화롭게 운영되고 있다”며 “인터넷을 개방하면 온통 이념공방의 장이 될 것이라는 예측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주패닷컴 등 북한에 서버를 둔 사이트만을 놓고 보면 인터넷 개방의 부작용은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부작용이 적은 데는 북한 사이트 운영자나 남한 이용자들의 자발적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만큼 북한의 인터넷 기반이 취약하고 대중화돼 있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인터넷 이용자가 없으니 부작용도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북한은 우리 돈 500억원을 들여 평양과 신의주, 그리고 중국의 단둥을 잇는 광통신망을 개통했다. 이 망을 통해 북한은 전 세계 인터넷망과 연결할 수 있는 하드웨어는 구축했다. 하지만 외국인들이 접속해볼 수 있는 북한 사이트는 달랑 2개뿐이다. 앞서의 주패닷컴과 인터넷상에서 북한 최고 실력의 기사들과 바둑을 둘 수 있는 마이바둑닷컴(mybaduk.com)이 그곳. 그나마 이들 사이트도 남한측 파트너인 훈넷 기술진이 지난해부터 올 초까지 10개월간 북한에 머물며 현지 기술자들을 채용하고 기술 지도를 한 결과물로, 순수하게 북한 자체의 기술력으로 제대로 구축한 웹사이트는 아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 초 국방부는 2500개 가량의 친북 사이트가 운영되고 있으며 이들 사이트들의 북한 찬양과 우리 정부 비방이 위험수위에 이르고 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국방부가 친북 사이트로 규정한 사이트들 가운데 북한에 서버를 둔 사이트는 없다. 대부분 중국이나 유럽 국가, 일본 등의 친북 인사들이 운영하는 친북 성향의 사이트일 뿐이다. 이처럼 해외 친북 인사들이 만든 친북 사이트를 북한 당국이 운영하는 사이트로 오인하면서 한때 인터넷 개방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인터넷 개방론자들은 남북한 간의 인터넷 기술과 이용 수준의 격차가 크기 때문에 인터넷을 북한의 위험한 사상을 전파하는 이념공세의 매체로 봐서는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인터넷은 남북한 교류, 특히 경제교류의 확대에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훈넷의 김사장은 “인터넷은 궁극적으로 북한을 시장경제체제로 끌어내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김사장은 “국내 상거래의 47%가 인터넷으로 이뤄지고 있다. 만약 남북한의 인터넷이 개방되고 북한이 본격적으로 인터넷을 활용하게 되면 남북한 간의 전자상거래도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사장은 “인터넷 개방은 남북한 간의 경제고속도로를 까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북한을 개혁개방의 장으로 끌어내는 데 인터넷만한 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도 인터넷을 통해 세계 시장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경제 사정이 어려운 와중에도 500억원을 들여 광통신망을 깐 것에서도 북한이 인터넷 개방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를 알 수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조웅규 의원도 “인터넷을 전면 개방함으로써 과거 정권에서 문제가 됐던 뒷거래 관행도 사라지고 남북관계도 투명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인터넷 개방은 경제적 효과 외에 이산가족의 사이버 상봉과 이메일 서신교환과 같은 민족적 숙원사업을 푸는 데도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프라인상의 남북교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통일부는 법률 개정에 미온적
현재 인터넷 개방에 관한 정치권의 여론은 긍정 쪽이 강하다. 조웅규 의원을 비롯해 김종하 최병렬 유흥수 강창성 박세환 의원 등 한나라당의 대표적 보수성향 의원들이 대거 법률개정안 발의에 참여한 것도 이 법의 국회 통과 전망을 밝게 해주는 대목이다. 남북관계 진전에 긍정적인 민주당 의원들이 오히려 “한나라당 보수파 의원들이 발의에 참여한 것이 미심쩍다”며 발의 서명을 망설이는 촌극도 빚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인터넷 개방이 가져올 부작용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북한의 인터넷 환경이 열악해 당장은 문제가 없겠지만, 사용이 대중화될수록 예상 밖의 역작용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주무부서인 통일부가 법률안 개정에 미온적이다. 안보 논리로 이 문제를 대하는 국방부 등 정부 내 이견도 적지 않은 장애가 될 전망이다. 과연 이런 어려움을 뚫고 ‘사이버 통일’은 이뤄질 것인가.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개정 공방은 6월 임시국회의 핫이슈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