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과 역술원을 결합한 형태의 압구정동 스튜디오 C(왼쪽). ‘포춘클리닉’을 표방하며 최근 코엑스몰에 문을 연 한 역술원.
새벽 5시 두 중년 여성이 서울 중구의 한 역술원 대문에 나붙은 ‘예약표’를 작성했다. 그 중 한 명은 최근 이 역술원 선생의 ‘말씀’대로 우여곡절 끝에 초등학생인 아들을 중국으로 유학 보냈다고 했다. 이날 그는 사업 문제로 고민하는 친구에게 ‘신통한’ 선생님을 소개해주기 위해 동행한 참이었다. 요즘 강남, 강북에서 온 손님들로 붐빈다는 이 역술원은 새벽 5시에 하루의 예약을 받아 오전 7시30분에 ‘출석 확인’을 한 후 9시경부터 상담한다.
사주카페 주역들 잘나가는 역술인
서울 세운상가에서 방송장비업체를 운영하는 송모씨는 “얼마 전부터 점집을 찾기 시작했다”며 “요즘 사업 하는 사람 치고 점 보러 다니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불경기와 극심한 사회적 변화로 인한 불안감 때문에 역학, 흔히 말하는 점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부자들의 재운을 분석한 ‘부자탈무드’의 저자 노해정씨는 “전체적으론 역술계도 불경기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사회가 불안해지면 평소 역학에 관심 없던 사람들이 역술원을 찾아 새로운 고객층이 생겨나고, 재미 삼아서가 아니라 절실한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역술원을 찾는 사람이 많아 상담료는 올라가는 추세를 보인다”고 말한다. 역학을 ‘미신’ 정도로 생각하던 사람들도 사회가 불안정해지면 이를 ‘총체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해주는 역학에 쉽게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역술(혹은 역학)업계도 전통적으로 무속에 관심 있는 층보다는 역술을 생활철학으로 생각하는 새로운 고객들을 흡수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변신에 나서고 있다.
5월1일 서울 코엑스몰에 문을 연 ‘B 포춘클리닉’은 가장 최근의 트렌드를 보여준다. 인테리어와 상담 방식을 병원의 그것과 흡사하게 만든 이곳의 ‘PD’ 오정택씨는 “역술원의 분위기가 주는 막연한 거부감이 없어서 아셈 타워 등에서 근무하는 전문직 종사자들이나 외국인들이 많이 온다. 이들은 외국에서 심리치료사를 찾듯 이곳을 찾는데 이런 경향은 대세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돈에 관련된 것보다 불륜이나 애완동물에 대한 상담이 많다는 점이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르다면서 불륜을 ‘소비적 애정문제’로 분류한다고 귀띔한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역삼동에는 하루 20만명이 접속해 월 매출이 3억원에 육박한다는 인터넷 사이트 ‘S’와 사주 강의와 상담으로 교수, 변호사, 기업인 등 사이에서 소리 없이 인기를 모으고 있는 ‘S 아카데미’가 있다.
이곳의 대표들은 1990년대 압구정동에서 사주카페 열풍을 불러일으킨 주역들로 이들의 행로는 현대 역학의 변천사를 잘 보여준다. 대개 고등학생과 대학생 신분으로 종로에서 역학에 입문했던 이 신세대 역술인들은 압구정동에서 사주카페를 선보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지금 압구정동에 있는 사주카페는 약 50개. 타로 등 외국 점성술을 병행하는 유학파형 점집이 H상가 주변에만 10개가 영업중인데 이곳에서 활동하는 역술인 중 상당수가 사주카페 1세대의 후배 혹은 제자들이다. 그 사이 사주카페 1세대 멤버들은 압구정동을 떠나 삼성동과 역삼동을 ‘점술 밸리’로 바꾸면서 2조~4조원으로 추정되는 역술 시장을 키워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해외 진출이다.
“롯땡(‘길에 좌판을 벌인 점집’이라는 은어)에서 전망 좋은 퓨처 산업이 된 거죠.”
원래 인사동에서 사주를 보았다는 오정택 PD는 지금 역술 프로그램과 솔루션 전문가다.
역술업이 퓨처 산업으로서의 가능을 갖게 된 것은 역술이 닷컴과 모바일 통신 사업의 콘텐츠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5월 말 KTF가 이동통신을 통해 ‘사주닥터’라는 역술서비스를 시작한 데 이어 SK텔레콤(6월)과 LG텔레콤도 ‘역술인이 직접 방문하는 수준’의 역술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IT솔루션업체인 미디어플래닛측은 “역술은 ARS서비스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80%에 이르며 성장 잠재력도 아주 크다”고 설명한다.
대언론사와 전략적 제휴를 맺은 A역술사이트도 ‘미래예측 전문플랫폼’이란 이름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사업다각화에 나서고 있다. 덕분에 역술은 인기 이벤트 아이템이 되어 호텔 행사나 신제품 런칭쇼 등에서까지 ‘점’을 쳐주는 부스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트렌드를 응용해 아예 미용실과 결합한 점집도 생겨났다. 압구정동의 ‘J선녀’가 운영하는 C스튜디오 안은 머리를 손질하는 공간 외에 상담실과 바(bar), 그리고 법당으로 이뤄져 있다. 온통 금색인 인테리어와 문 앞을 장식한 커다란 부적들이 여느 미용실과 다른 느낌을 준다.
“무속에 대한 이미지를 바꿔보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압구정동에서 이곳으로 나왔어요. 편안한 분위기에서 운명에 맞는 헤어스타일과 패션스타일까지 카운슬링해주지요.”
압구정동의 한 점집. 강남은 이제 ‘점술 밸리’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역술가들의 적극적인 마케팅과 기업으로의 변신에 대해 부정적인 역술가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역술가와 문제 당사자가 얼굴을 대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도 예측 확률이 100%가 되기 어려운데 인터넷이나 전화를 통해 기가 통하는 상담이 되겠느냐”고 반문한다. 역술이 인기 있는 사업 아이템이 되다 보니 역학을 깊이 있게 공부한 사람보다는 언론을 잘 이용하는 사람들이 역학을 팬시상품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화한 점집에서 나와 4년 전부터 혼자 압구정동에서 ‘S점술’을 운영하는 주은모씨는 “역학이 돈이 된다 하니 대충 책 읽고 나와 각종 ‘예측’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예민한 문제에 대해 ‘아님 말고’식 예측을 내놓는다. 그중 하나가 맞으면 침소봉대하여 스타가 되고 기업의 투자를 끌어온다. 역학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학문이다. 조금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그런 예측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금세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역학연구가 노해정씨도 “역학은 다른 사람의 운명을 봐주고 돈을 버는 학문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묻는 데서 시작한 철학”이라고 설명한다. 이들은 역학이 급속히 대중화하고 인기를 얻게 된 이유가 혼란한 사회 시스템과 불안한 경제 때문이라는 사실은 유감스럽다면서도, 역학이 현재의 과도기를 거쳐 현대인의 정신철학으로 인정받아 해외에서 부가가치 높은 문화상품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앞으로 한국의 정치와 경제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예측하고 있을까. 지난 총선과 대선, 월드컵에 대해 각기 다른 예측을 내놓았던 역학자들 대부분이 우리나라가 “가을까지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여러 곳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사주를 들고 왔었다고도 한다. ‘운을 바꿀 수는 없어도 미래를 알면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조언이 뒤따르긴 했으나 씁쓸한 전망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