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 내부거래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최태원 SK㈜ 회장이 3월31일 서울지법 법정으로 걸어가고 있다.
“신사장, 내가 오늘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자격으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를 면담한 사실을 잘 알죠.”
“예, 뉴스를 통해 보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노당선자를 만나 무슨 말로 첫인사를 해야 분위기를 부드럽게 끌고 갈 수 있을까 무척 고심했는데, 노당선자가 그 고민을 풀어주었소. 노당선자가 먼저 ‘신헌철 사장은 잘 계시죠. 부산상고 2년 선배입니다’라고 해서 얘기가 잘 풀렸습니다. 다 신사장 덕분입니다. 신사장은 우리 그룹의 보배예요.”
손회장의 이 얘기는 금방 SK그룹으로 퍼져나갔다. 한 임원은 “SK그룹은 정보통신, 정유 등 정부 정책에 영향을 받는 업종이 주력이어서 권력의 변화에 나름대로 민감하다. 노당선자의 그런 발언이 알려지자 그룹 임원들 사이에서는 ‘적어도 노무현 정부에서 불이익 당하는 일은 없겠구나’ 하고 안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채권단이 그룹 해체를 압박하는 지금에 와서 보면 당시의 기대가 얼마나 순진했는지 절로 한숨이 나온다”면서 말을 흐렸다.
“경영권 박탈 땐 경제 충격 심할 것”
현재 SK그룹은 백척간두에 서 있는 상황이다. SK글로벌 주채권은행인 하나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SK그룹이 공중분해될 수도 있다. 채권단은 실제 5월28일 SK글로벌을 청산하겠다고 결의, 최태원 회장의 SK그룹 경영권을 위협하고 있다. 채권단 결의가 실제 시행된다면 재계 3위의 SK그룹이 해체되고 각 계열사들은 독립경영체제에 들어간다.
채권단은 이번 결의의 직접적인 배경이 SK그룹의 글로벌 정상화 의지에 회의를 품게 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SK㈜가 매출채권 출자전환 등 충분한 자구 방안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채권단 공동관리 개시 이후에도 은닉자산 유무 여부나 해외 부실 규모를 밝히지 않는 등 SK그룹측이 신뢰를 깨뜨리는 행동을 계속해 왔다는 것. 채권단은 SK그룹의 이런 부도덕성을 최태원 회장 담당 재판부에 진정하겠다는 뜻도 비쳤다.
그렇다면 과연 채권단은 SK글로벌 청산 결의를 행동에 옮길 수 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채권단과 SK그룹 안팎에서는 회의적인 관측이 더 많다. 채권단의 청산 결의는 그야말로 ‘SK그룹 압박용’일 따름이고 실제 실현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들은 채권단의 이런 압박 작전은 성공, SK그룹으로부터 상당한 양보를 얻어낼 것이라고 예측한다.
실제 SK㈜는 채권단의 SK글로벌 청산 결의 이후 SK글로벌에 대한 국내 매출채권 출자전환 규모를 당초 4500억원에서 7000억~8000억원 수준으로 높인 수정안을 비공식 제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채권단의 의도대로 ‘압박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것이다. 이에 대해 채권단 주변에서는 “SK㈜측이 그 정도 ‘성의’를 보인다면 뭔가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사실 SK글로벌 처리를 둘러싸고 채권단과 SK측이 ‘감정 싸움’을 할 때도 채권단 주변에서는 양측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겠느냐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이들이 이런 관측을 하는 근거는 간단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만약 SK글로벌 청산으로 최회장이 경영권을 박탈당한다면 재계뿐 아니라 경제에 미치는 충격파가 상당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 따른 비난을 채권단이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글로벌 청산하면 채권단 3조 날리는 셈
단순 계산상으로도 채권단과 SK그룹이 타협하는 게 유리해 보인다. SK글로벌을 청산하기보다는 채권단과 SK그룹이 조금씩 양보해 살리는 게 ‘윈윈’ 게임이라는 얘기다. SK글로벌이 청산되면 채권단은 총채권 5조2297억원의 40%인 2조919억원만 건지고 나머지 3조원 정도는 날리게 된다. 삼일회계법인 실사 결과 SK글로벌 청산시 채권 회수율이 약 40%로 예상되기 때문. 반면 SK글로벌이 청산되는 경우 SK㈜의 피해 규모는 대략 2조6000억원 정도로 예상된다. 매출채권 1조3500억원의 경우 금융권의 무담보채권 회수율(30%)과 같은 비율을 적용하면 1조원 이상의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물론 SK글로벌에 출자한 6500억원은 전액 ‘날리게’ 된다. 또 SK글로벌이 주유소망을 보유하고 있어 SK㈜이 새로 영업망을 갖추는 데 1조원 이상의 돈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채권단 입장에서 SK㈜를 압박할 수 있는 카드는 SK글로벌이 갖고 있는 주유소망(343개)을 다른 정유사에 팔겠다는 뜻을 보이는 것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이 경우 SK㈜는 존재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영업에 결정적 타격을 입게 된다”고 말했다. 더구나 SK㈜는 현재 SK글로벌이 갖고 있는 주유소 중 222개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지만 채권단이 SK㈜를 상대로 주유소 지분 반환 소송을 내놓은 상태다.
그러나 문제는 시장이 SK㈜가 SK글로벌과의 부실 고리를 끊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은 향후 기업 부문 구조조정의 기본원칙 정립 여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SK글로벌 처리 방향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 임영재 연구위원은 “SK글로벌 부실에 대한 손실 분담은 주주 채권자 경영진 등 법적 책임이 있는 경제 주체에게 최대한 귀속시켜야지 다른 계열사에 부실을 확산시키는 정책은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채권단의 SK㈜ 출자전환 확대 요구는 이런 기업지배구조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SK㈜가 버티는 것도 이런 지적 때문이다. 참여연대 등 재벌개혁을 강조해온 시민단체는 SK㈜의 이런 입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또 14.99%를 보유한 SK㈜ 최대 주주 크레스트증권과 소액주주들은 출자전환 규모 확대에 반대하고 있다.
임영재 연구위원은 “단순 계산상으로는 SK글로벌을 살리는 게 채권단과 SK그룹 모두의 윈-윈 게임일 수 있지만 SK글로벌의 수익 모델이 검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SK㈜가 SK글로벌의 부실의 늪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SK㈜ 이사회가 아직 확실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SK㈜ 사외이사인 박흥수 연세대 교수는 “5월29일 오전 열린 이사 간담회는 추후 이사회 차원의 공식 의사 결정을 내려야 할 때에 대비해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였다”면서 “현재로선 SK글로벌에 대한 지원을 더 지속해야 할지, 아니면 SK글로벌과의 부실 고리를 완전히 끊는 게 옳은지 확실히 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SK㈜의 영업망인 주유소는 대개 SK글로벌 소유다.
김사장은 최회장과 함께 구속됐다가 풀려난 이후 글로벌 지원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 임원들을 그룹별로 면담, “현 상황에서 글로벌 지원은 불가피한 것 아니냐”고 설득하고 있다는 것. 이에 대해 일부 임원들은 “지원할 때 지원하더라도 1980년대 초 SK그룹에 인수된 이후 계속 지원해 왔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부실이 발생하게 됐는지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져 김사장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는 후문.
이런 상황 때문에 SK㈜는 이미 그룹과 별개로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당연히 그룹측과 SK㈜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는 상태다. 이런 가운데 SK㈜ 노조는 글로벌 지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노조 관계자는 “최회장이 설사 1심 공판에서 집행유예 등으로 석방된다고 해도 그는 이미 실패한 경영인이기 때문에 SK㈜ 대표이사 회장으로 복귀하는 것은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뿐만 아니라 그룹 내에서는 그룹 경영진에 대한 인적 청산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특히 그룹의 부실에 책임 있는 ‘용산고 마피아’ ‘진주고 마피아’ 등은 확실히 정리해야 한다는 것. 손 그룹 회장을 비롯해 김승정 SK글로벌 부회장, 김수필 SKC㈜ 화학부문 사장 등이 진주고 출신. 또 최회장의 측근으로 통하는 김창근 SK㈜ 사장과 김우평 SK증권 사장, 이승권 SK해운 사장, 윤석경 SK C&C 사장 등이 용산고 출신이다.
채권단은 한때 최회장에게 기대를 걸기도 했다. 최회장이 석방돼 강력한 오너십을 발휘하면 SK㈜ 임원들과 주주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채권단은 손회장이 SK㈜측에 SK글로벌 지원 확대를 요구했지만 역부족이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채권단의 이런 입장은 또 다른 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경영에 실패한 최회장의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해 SK㈜ 주주들의 이익을 훼손하면서까지 SK글로벌 정상화를 추진하려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그것이다. 참여연대 쪽에서는 “최회장이 부실경영에 대해 ‘자기 돈’이 아닌 SK㈜ 주주들의 돈으로 책임지려는 것은 재벌개혁의 후퇴를 의미한다”는 입장이다.
최회장 담당 재판부는 1심 판결을 6월13일로 연기했다. SK글로벌 채권단의 채권 행사 유예기간도 이 무렵이면 끝난다. 채권단과 SK그룹측이 SK글로벌 처리를 둘러싸고 물밑싸움을 할 수 있는 시한인 셈이다. 그러나 그 싸움은 SK㈜의 수정안 제시로 의외로 싱겁게 끝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럴 경우 최회장은 ‘겨우’ SK그룹 경영권을 지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