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시절 HID 부대 공작원으로 참전해 최전방을 누비며 공작 활동을 벌였던 유도화(왼쪽), 정애옥씨가 당시를 회고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51년 3월30일, 아침 햇살에 눈을 뜬 유도화씨는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이제 겨우 열아홉 살 소녀지만 그가 내일도 이 기도를 이어갈 수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이날 정보수집 임무를 띠고 황해도 남천리로 들어갈 참이었다. 나철호, 허지신, 홍순녀…. 함께 사지로 떠나는 동지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그들은 지난밤 손톱, 발톱을 깎고 머리카락도 몇 개 뽑아 작은 봉지에 담아뒀다. 만약 다시 부대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살아남은 동료들이 이 유품을 묻고 묘를 만들어줄 것이다. 북한 땅 어딘가에 버려져 있을 시체는 영원히 찾지 못하리라. 하지만 자신이 살았던 흔적만은 남기고 싶었다. 이미 여러 차례 다녀온 길이었지만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긴장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로부터 52년이 지난 2003년 5월,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는 유도화 할머니(72)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다. 유 할머니는 한국전쟁 당시 육군 첩보부대인 HID(Headquarters Intelligence Detachment) 부대 제1지대 5파견대에 속해 있던 공작원. 1·4 후퇴 이후 남북이 대치하고 있던 임진강변, 국지전이 끊이지 않는 최전방 전선에 그가 있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남북이 정보 수집을 위해 저마다 공작원을 이용한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공작원에 열여섯 살부터 스물두 살 사이 어린 여성들이 끼여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흰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고 권총을 허리춤에 감춘 채 적진을 누볐던 당시의 여전사들이 어떻게 활동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처절하게 잊혀져갔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산천이 다섯 번이나 바뀌는 동안 그들은 그렇게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처럼 사라져버렸다.
당시의 공작원들이 다시 만난 건 부대가 해산된 후 50년도 더 흐른 2003년 5월28일이었다. 서울 양재동 대한민국 육해공군 대북참전국가유공자연대(회장 박부서) 사무실에서 만난 정애옥 할머니(72) 등 당시의 HID 공작원들은 곧 서로를 알아보았다.
“네가 애옥이지? 그때 그대로네.” “허지신, 아직도 살아 있었구나!” 그토록 오랜 세월 잊고 싶었던 기억들을 끄집어내며, 그들은 어느새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던 그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여자 공작원이 굉장히 많았어. 다른 부대끼리는 서로 잘 몰랐는데도 내가 아는 것만 열 명이 넘었거든. 제일 나이 많은 언니가 스물두 살이었으니까 정말 다 꽃 같은 처녀들이었지.”
그런데 그 긴 시간 동안 이들은 왜 나타나지 않았을까. 다른 참전 ‘용사’들이 국가유공자가 되고, 훈장을 받는 동안 왜 그대로 묻혀 있었을까. 할머니들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려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식에게조차 자랑스럽게 “내가 공작원이었다”고 말할 수 없었던 세월을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어느새 70대 노인이 된 유도화씨의 주름진 손에 공작원 시절의 사진이 올려져 있다. 험한 군 생활과 50여년의 세월은 건강한 처녀를 병든 노인으로 바꿔놓았다.
“식구들이 다 피난 떠난 집을 혼자 지키고 있는데 HID 대원들이 들어왔어요. 나한테 함께 공작을 하자고 하더군. 그때는 공작이 뭔지도 몰랐는데 그냥 권총을 들이대고 강제로 나를 범했죠. 난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 후 다시는 부모님을 못 뵈었지. 공작하러 북에 갔다가 멀리서 우리 집을 바라보며 한없이 울었던 적도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 돌아가겠어요. 부모님도 계시고 형제들도 있었지만 그게 마지막이었지.”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할머니는 “당시 여자 공작원들은 조국을 위해 몸까지 바쳐야 했다”며 울먹였다.
이 가슴 아픈 증언은 남자 공작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는 한 번 성관계만 맺으면 여자들이 그냥 따라왔어. 가라고 해도 제발 데려가 달라고 사정하던 때였지. 여자 공작원이 필요한데 어떻게 해. 지금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때는 그게 다 조국을 위해서였어….”
인민군 후방서 생사 넘나드는 나날
여자 공작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부대를 이탈하지 않기 위해, ‘조국을 위해’ 그들의 자존심과 명예까지 빼앗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들의 남은 인생은 이 ‘전력’에 고스란히 저당 잡혀야 했다.
이들이 다시 만난 건 “돌아가시고 나면 그 이야기들이 모두 사라져버린다”는 기자의 간곡한 설득 때문이었다. 이들은 정확한 날짜와 장소, 그리고 사살한 적의 숫자까지 ‘너무 많은’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여성 공작원들의 임무는 이북 사람으로 가장해 적의 작전 지역에 들어가 정보를 캐내는 것이었다. HID 부대에서 임진강 북단 사천리 냇가만 넘으면 바로 인민군이 주둔해 있던 시절이었던 만큼 적의 위치와 규모, 전력 등은 모두 중요한 정보였던 것이다. 빨치산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아예 마을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기도 했다. 의심을 사거나 흔적을 남기면 곧 인민군에게 잡혀 죽음을 맞았다.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본 모든 것을 외우는 것뿐이었다. 이들이 다행히 살아 돌아오면 후방의 우리 군은 이 기억을 무기로 토벌에 들어갔다. 공작원들에게 암기는 살아 돌아오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임무였던 것이다.
“남쪽으로 넘어오다가 북한 공작원으로 오해받아 죽은 사람도 많았어요. 워낙 보안이 심해서 함께 작전하지 않는 사람들은 철저히 서로를 몰랐으니까. 나중에는 손바닥 반만한 종이에 영어와 한국어로 공작원이라고 써준 ‘인식표’를 들고 다녔지. 북쪽 사람들한테 들킬까봐 그걸 똘똘 말아서 팬티 고무줄 틈에 넣어 다녔어요.”
부대 해체 후 52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당시의 공작원들.
작전중에는 보급도 전혀 없었다. 뱀을 잡아먹든 민가의 음식을 훔쳐 먹든 어떻게든 알아서 살아남아야 했다. 대부분 피난민들이 빈집 마당에 묻어두고 떠난 곡식을 훔쳐서 끼니를 해결했다. 목숨을 잃을 뻔한 고비는 작전 때마다 찾아왔다.
유 할머니는 51년 5월16일, 황해도에서 정보를 모으며 지내던 시절 쌀을 사러 나갔다가 내무서원(경찰)에게 적발됐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부대에서 공작자금으로 준 ‘이북 돈’이 위조화폐였던 것이다. 당시 우리 군의 정보력은 공작원에게 가짜 돈을 쥐어줄 만큼 형편없었다. 배후를 캐기 위한 내무서원들의 갖은 고문에 시달리던 유 할머니는 폭격이 경찰서를 덮쳐 그들이 달아난 틈을 타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그날 그는 하룻밤에 남천에서 조산까지 수십리 산길을 뛰어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함께 갔던 다른 공작원 4명은 이미 폭격을 당해 숨을 거둔 뒤였다.
정애옥 할머니는 송악산에서 몰살한 1사단 11연대의 최후를 목격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가족을 잃어버린 피난민 행세를 하며 황해도 금천까지 홀로 걸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인민군에 잡힌 부대원들이 8명씩 포승줄에 묶여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함께 그 길을 걸어야 했다.
“한번은 열여섯 살 먹은 여자애들까지 일곱명이 함께 피난민 가족으로 위장해서 공작하러 황해도에 들어갔어. 너무 배가 고파 혼자 사는 할머니 댁에 가 밥 좀 달라고 했는데 소금도 안 주더라고.”
유 할머니는 마치 재미있는 기억을 떠올리듯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너무 배가 고팠고, 뭔가 먹어야 했던 여공작원들은 이 할머니가 밭일을 하러 나간 사이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부엌을 뒤졌다. 이들의 눈에 띈 것이 찬장에 가득 쌓인 쇠고기였다. 갓 폭격에 맞아 죽은 소의 고기를 할머니가 그곳에 보관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큼직한 걸로 세 덩어리를 훔쳐 산 위로 기어 올라갔어. HID에 들어온 후 처음 하는 포식이었지. 고기가 목구멍까지 차 올라올 만큼 먹고 나니까 슬슬 걱정이 되는 거야. 도둑질을 했으니 빨리 도망쳐야 하잖아. 며칠 굶은 속에 갑자기 고기가 들어가니 모두 설사병에 걸려서 정말 ‘줄줄 싸면서’ 무작정 산을 넘어 도망을 쳤어. 힘들면서도 배가 부르다는 게 너무 행복한 거야.”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들 중 네 명은 바로 그 산 위에서 폭격에 맞아 죽었다. 열여섯 살 여공작원도 함께였다.
“매 순간 죽음이 함께 있었어. 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목이 갑자기 잘려 나간다 해도 놀라울 것이 없을 때였으니까.”
그러나 이들의 이 처절한 삶은 지금 그대로 어둠 속에 묻혀 있다. 비정규 부대로 군번도, 군복도 없이 활동했던 이들의 공훈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함께 활동했던 나철호씨(작고)와 허지신씨(72) 등 남자 대원들은 당시의 공훈을 인정받아 훈장까지 받았지만, 여자 대원들은 아직 참전 경력도 인정받지 못한 상태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것을 바친 공작원 부대는 어이없이 해산돼버렸다. 1952년 4월10일 1사단이 연천으로 이동하면서 여공작원들을 차에 실어 파주 금촌에 ‘내다 버린’ 것이다. 연천에서는 ‘몸을 바쳐’ 정보를 캐낼 여성 공작원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2년 넘게 사지에서 활동한 여성들은 그렇게 버림받고 말았다. 왜 자신들이 이런 운명에 빠져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던 순진한 시골처녀들은 그렇게 서로의 사연을 감춘 채 50년 이상 뿔뿔이 흩어져 살았던 것이다.
평안북도 출신이던 유 할머니는 금촌에서 서울까지 걸어와 노숙을 했다. 간신히 구한 식모 자리가 그의 첫 직장이었고, 그 후에는 방직공장, 미8군 부대, 남대문시장 등을 전전하며 장사와 암달러상 등 온갖 일을 했다.
한때 하루 밤새 100리 길을 걸었던 강골은 몇 걸음에도 숨을 몰아쉬어야 하는 허약한 몸이 돼버렸다. 인민군의 수색을 피하기 위해 차디찬 강물 속에 숨어 있다 걸린 기관지염은 천식이 돼 평생 그를 따라다닌다. 현재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2000만원짜리 지하 전세방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 유 할머니의 수입은 매달 30만원씩 나오는 생활보호대상 연금이 전부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겠지. 그때 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산 것이 어떤 삶인지. 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열아홉, 스무 살 시절 이후 내 젊음은 사라져버렸어. 난 분명히 젊었을 텐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다른 할머니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 할머니는 함께 공작했던 동료가 공작원 전력을 안 남편의 타박 때문에 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 할머니는 부대 해산 후 결혼해 자식을 낳았지만, 지금껏 한 번도 자식에게 자신의 가슴속에 쌓인 이야기를 말하지 못했다. HID가 언론을 타며 화제를 모은 후 가끔 손자들에게 “할미가 HID 1지대 5파견대 출신이야. 할머니가 한번 화내면 너희 다 죽어!”라고 으름장을 놓을 때도 있지만, 그곳에서 할머니가 뭘 했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이들에게 얘기해준 적이 없다.
“내가 사위가 셋이야.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 죽을 때까지 이 모든 상처를 가슴에 담고 갈 수밖에…. 대신 죽기 전에 꼭 유서를 쓸 거야. 내가 죽고 난 후 모든 이야기가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지 않게 우리가 어떻게 싸웠는지, 그리고 어떻게 버려졌는지 다 얘기할 거야.”
시간은 상처를 치유한다고 하지만 이들의 가슴 깊은 곳, 더 깊은 곳에 난 상처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52년이 지나도 남아 있는 이 깊은 상처는 과연 누구의 책임일까. 누가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