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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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머리카락 보인다, 잠복 25시

사건 해결 전까지 끼니 거르고 밤샘 예사 … ‘범인 검거’ 남다른 보람 오늘도 현장 출동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3-06-05 13: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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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인 머리카락 보인다, 잠복 25시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영화 ‘살인의 추억’ 중)

    “우리에게 비장의 무기가 뭘까? 몸뚱어리, 몸뚱어리야. 지 죽을 줄도 모르고 덤벼드는 몸뚱어리.” (영화 ‘와일드 카드’ 중)

    최근 감상한 영화 두 편은 공교롭게도 강력계 형사들의 삶을 다룬 ‘살인의 추억’과 ‘와일드 카드’였다. ‘영화가 괜찮더라’는 입소문도 한몫했지만 ‘형사들의 삶’에 대한 왠지 모를 친근감이 기자를 영화관으로 달려가게 했던 것. 불과 두 달 전까지 기자는 ‘사쓰 마와리(신문사의 사회부 경찰 출입 기자를 일컫는 말)’ 생활을 하며 서울 각 경찰서의 형사들과 부대낀 전력이 있다. 기자에게 ‘숙명적 앙숙’이자 ‘전략적 동반자’인 형사들의 이야기는 피부에 와 닿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대형 강력 범죄를 가장 많이 처리하고 있는 서울 강남경찰서(이하 강남서)는 영화 ‘와일드 카드’의 배경이 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특히 강력7반은 강남서에서도 범인 검거 실적 1위를 자랑하는 모범반. 기자는 5월28일부터 2박3일간 범인을 추적하는 강력반 형사들과 생활을 같이 했다.

    “성폭력범이오. 빨리 잡아야 하니 이기자, 얼른 오시오.”



    유난히 햇살이 뜨겁던 5월28일 오전, 강남서 강력7반 형사들과의 첫 만남은 긴박하게 이뤄졌다.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형사들은 범인 검거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다. 추적 대상은 3년간 사귀던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한 것에 격분, 과거 캠코더로 촬영한 성관계 장면을 주위사람들에게 유포하겠다고 협박한 남모씨(35). 전과가 있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위험한 인물은 아니었으나 검거 방법에 대한 논의는 신중했다.

    범인 머리카락 보인다, 잠복 25시

    황반장의 권유로 권총과 수갑을 들어 본 기자.

    격무로 입술이 부르튼 강력7반장 황동길 경위는 출동 전 각 형사들에게 작전을 지시했다. 피해자 이모양(22)이 전화를 걸어 남씨를 집 밖으로 유인하면 근처에 잠복한 4명의 형사가 그를 덮친다는 계획이었다.

    강남서 검거 실적 1위 강력7반

    오후 1시 네 명의 형사와 함께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눠 타고 범인이 사는 서울 목동으로 출동했다. 남씨 집 근처에 숨어 그의 출현을 기다렸다. 하나같이 우람한 체격과 상당한 무술실력을 자랑하는 형사들이지만, 범인을 검거하기 직전 그들의 모습엔 고요한 긴장이 감돌았다. 강력7반의 막내인 주용석 형사는 “범인 체포 직전 1분간은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의 전율을 경험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범인을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자신을 피하던 여자친구가 먼저 전화를 건 사실을 수상하게 여긴 탓인지 남씨는 조심스럽게 집 밖으로 나오더니 이내 형사 일행을 목격하고 집 뒷길로 도주해버렸다. 형사들의 눈은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이글거렸다.

    하지만 포기하기엔 이르다. 황반장은 남씨가 별다른 준비 없이 승용차도 두고 도주한 것으로 미뤄보아 반드시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만일에 대비해 황반장은 남씨 집 옆에서, 주형사와 기자는 남씨의 승용차 근처에서 잠복에 들어갔다. 김형석, 박배순 형사는 남씨의 부모가 살고 있는 김포 집으로 급파됐다.

    ‘범인은 형사가 자리를 뜬 사이에 나타난다’는 금언을 믿어서일까. 형사들은 점심식사도 거른 채 현장을 지켰다.

    범인 머리카락 보인다, 잠복 25시

    현장에 출동하기 전 형사들은 범인 검거 계획을 치밀하게 논의한다(왼쪽).주용석 형사, 박기범 형사, 기자, 황동길 반장, 김형석 형사, 박배순 형사(왼쪽부터).피의자 조사를 위해 야근은 기본이다.

    출동한 지 3시간 반 만인 오후 4시 반경, 남씨를 긴급체포할 수 있었다. 피해자 이양의 언니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며 남씨를 전화로 유인, 남씨의 집 근처에 잠복중이던 황반장이 집으로 돌아오는 그를 덮쳤다. 남씨는 처음에는 도망치려는 기색을 보였으나 사태를 직감한 탓인지 이내 포기하고 순순히 붙잡혔다.

    형사들은 긴급체포한 피의자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고, 현장에서 압수한 물품들도 사진을 찍었다. 성관계 장면이 담긴 비디오테이프와 캠코더, 컴퓨터 본체를 챙기는 것은 기자의 몫이었다.

    범인 검거에 성공했다고 해서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 범인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조사가 이뤄진다. 작성해야 할 문서만 해도 ‘범죄 인지 보고서’ ‘피해자 진술조서’ ‘피의자 심문조서’ ‘압수수색 승인서’ 등 4가지. 작성할 서류는 많고 피의자 진술이 엇갈리면 형사들은 속이 타게 마련이다. 대답을 얼버무리는 피의자에게 “왜 비디오를 촬영했냐”며 윽박지르기도 하고 “떠난 여자는 남자답게 잊어야 한다”며 인생교육도 한다. 욕 잘하는 주형사의 위압적인 말투는 용의자를 일순 주눅들게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의 걸쭉한 욕에는 ‘인간에 대한 정’이 배어 있었다.

    남씨에 대한 조사를 끝내자 시계는 이미 다음날 오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미모’의 여경과 2년 전 결혼했다는 주형사는 “매일 야근으로 아이를 만들 시간이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형사들은 “6일에 한 번 돌아오는 철야 당직이 아니더라도 사건 수사가 끝나지 않으면 밤샘을 밥 먹듯이 하는 게 형사의 생활”이라며 입을 모았다. 그들의 피곤한 얼굴에는 그래도 범인을 검거했다는 뿌듯함이 역력했다.

    강력7반이 한 달에 잡아들이는 범인의 수는 평균 5~6명. 한 명을 잡고 나면 쉴 틈도 없이 다시 다른 범인을 추적해야 한다. 다음날 점식식사를 마친 5명의 형사들은 인질강도를 잡기 위한 수사회의를 시작했다. 박기범 형사는 용의자가 자주 이용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그의 활동 반경과 활동 시간에 관한 자료를 뽑았다. 형사들은 용의자가 주로 다니는 PC방과 직장, 집 앞에서 그의 출현을 기다리기로 했다.

    오후 4시 기자는 황반장, 박배순 형사와 한 팀이 되어 용의자가 근무하는 곳으로 추정되는 구로동의 한 공장을 방문했다. 아직 이 회사에 용의자가 다니고 있는지는 확인이 안 된 상태. 그래서 형사들을 대신해 기자가 용의자의 여자친구인 척하며 회사 직원들에게 말을 걸었다. “쭛쭛오빠 회사에 있나요?” 하지만 사람들에게서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같은 시각 나머지 세 형사는 용의자의 집 앞에서 잠복에 들어갔다. 용의자 차량으로 추정되는 승용차가 아파트 단지에 주차된 것을 보고 ‘용의자가 집에 있을지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 기자가 뒤늦게 이 팀에 합류해 용의자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용의자의 아버지는 자식이 어디에 있는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자식의 휴대폰 번호조차 몰랐다.

    범인 머리카락 보인다, 잠복 25시

    잠복 근무 때는 빵과 우유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는 일이 빈번하다. 잠복 근무를 위해 차창을 선팅하는 것은 필수.

    이날 수사는 여기에서 난항에 부닥치고 말았다. 박기범 형사는 “휴대폰 번호를 이용한 위치추적 등 통신자료 사용은 검찰의 승인과 이동통신업체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정작 도움이 필요한 긴박한 순간에는 무용지물”이라고 말했다.

    피의자의 집 길목에서 밤 9시까지 잠복하던 형사들은 다음날 통신자료 승인을 긴급 요청, 용의자의 소재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사흘 연속 야근으로 피곤에 지친 형사들을 위한 황반장의 배려였다.

    “경비 동원으로 오늘은 세 명이나 나가는구만.”

    30일, 전날 진행하던 인질강도 수사를 잠시 중단하게 됐다. 대통령 경호 문제로 갑작스럽게 세 형사에게 차출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다음날은 토요일이라 이동통신사의 협조를 받기도 어려웠다. 인질강도 수사는 다음주로 미룰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시위 진압을 위해 많은 경찰들이 차출되며 결국 살인범을 놓치고 말았던 장면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덕분에 기자는 오전 10시 김형석 형사와 함께 이틀 전 검거된 남씨의 영장실질심사 현장에 동행할 수 있었다. 강력7반에서 최고 경력을 자랑하는 김형사는 30년 동안의 성실한 경찰생활로 ‘30년 평생장’을 받을 예정이다. 풍부한 경력만큼 피의자를 다루는 솜씨도 좋은 김형사는 서울 지방법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앞으론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며 남씨를 다독거렸다. 판사에게 던지는 한 마디가 그의 삶을 좌우할 수 있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잔뜩 주눅들어 있던 남씨는 김형사의 진심 어린 충고에 긴장을 풀었다. 영장실질심사 후 남씨는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됐다.

    2박3일간의 강력반 체험을 마쳤지만 기자는 ‘형사는 누구인가’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이런 고민을 황반장이 시원스럽게 풀어주었다.

    “형사요? 범인들한테는 우리가 저승사자겠지. 끝까지 추적해 잡아가니까.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범인만 잡는 사람이 아니라구. 현장을 최초로 접하는 건 판사도 검사도 아닌 우리 형사야. 우리의 최초 판단이 용의자의 범죄 사실 여부를 가리는 만큼, 형사는 범인 잡는 사람 그 이상이 돼야 해.”

    자신의 일을 설명하는 황반장의 말투엔 단호함과 자부심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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