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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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 내리는 ‘맞춤양복 1번지’

소공동 롯데1번가 19곳에 “나가라” 통보 … 빼어난 솜씨 명맥 끊길까 ‘걱정’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3-06-04 1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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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셔터 내리는 ‘맞춤양복 1번지’

    한국 맞춤양복의 산 역사이자 상징인 서울 소공동 양복점 거리가 사라진다.

    # 맞춤양복=부와 기득권의 상징?

    “한인옥 여사가 이회창 후보는 양복이 두 벌 있는데 세일할 때 산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는 양복이 몇 벌이고 얼마짜리를 입느냐?”(패널)

    “잘 모른다.”(이후보)

    “그럼 지금 입은 양복은 어느 회사 제품이냐?”(패널)

    “20세기라고 되어 있는데….”(이후보)



    지난해 한 대통령후보 초청토론회에서 패널과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사이에 오간 대화다. ‘가족 빌라’ 의혹으로 ‘귀족 논란’이 일고 있던 터라 애꿎은 양복 메이커까지 검증대에 오른 것. 당시 이후보가 입고 나온 양복은 서울 강남구 역삼동 ‘20세기’ 양복점에서 만든 맞춤양복이었다. 평소 허리가 약간 들어간 잉글랜드 스타일의 소공동 맞춤양복을 즐겨 입는 이후보는 토론회 이후 싸구려 점퍼를 입고 각종 행사에 나타나는 등 ‘서민’임을 강조했지만 결국 30만~40만원대 기성복을 입고 유세 현장을 누빈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 패하고 말았다.

    # 맞춤양복=촌스러움의 상징?

    특검 조사를 앞두고 있는 박지원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막강했던 권력만큼이나 옷을 잘 입기로 유명하다. 패션업계에서 선정하는 베스트 드레서 명단에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렸던 박 전 실장은 기본적으로 ‘옷걸이’가 좋지만, 기성복을 즐겨 입었다는 점에서 다른 정치인들과 달랐다. 물론 박 전 실장이 애용한 기성복은 보통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박 전 실장에게 베스트 드레서라는 칭호를 안겨준 정장은 200만원 안팎에 판매되는 베르사체, 조르지오알마니 같은 ‘수입 기성복’.

    기성복 선호 젊은이들 “촌스럽다”

    사실 정치인들이 가장 흔하게 입는 ‘소공동 양복’은 젊은이들의 감각으로는 다소 촌스럽게 느껴진다. 윗도리 기장이 수입 ‘명품’들에 비해 짧은 데다 허리부터 아래로 떨어지는 라인이 날렵하지 못하다. 유난히 좁은 바지통도 ‘수입 기성복’과 비교하면 시대에 뒤떨어져 보인다. 소공동 양복 재단사들에 따르면 소공동 양복을 촌스럽다고 여기는 젊은 의원들이 늘어나서인지 기성복(비싼 이탈리아제 양복)을 입는 정치인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꼭 정치인이나 부자가 아니더라도 ‘××라사’란 간판을 내건 양복점을 찾아 복지(양복감) 샘플을 모아놓은 책자를 뒤적거려 가며 감을 고르고, 기장·소매·마다·앞품을 꼼꼼히 잰 뒤 가봉(시침)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입학 선물이나 결혼예물로 양복 원단이 ‘넘버 원’이었던 바로 그 시절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동네 양복점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서울 시내의 이름난 양복점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다. 이제 돈 많은 사람들은 백화점에서 이탈리아 프랑스 디자이너가 만들었다는 ‘명품’을 사 입고, 장삼이사(張三李四)는 할인매장을 기웃거리며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 양복’에 몸을 맞춘다.

    셔터 내리는 ‘맞춤양복 1번지’

    ‘특수 체형’은 맞춤양복이 마지막으로 비빌 언덕이다.

    한국맞춤양복기술협회에 따르면 1980년대 초반 3000여개에 이르던 서울의 양복점은 현재 900여개로 줄어들었고 매출은 업소별로 많게는 10분의 1까지 줄어 양복점들은 전성기 하루 일감으로 한 달을 호구한다. 종로에서 양복점 ‘잉글랜드’를 운영하는 김규화씨는 “90년대 초반부터 맞춤양복을 찾는 사람들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해 IMF 사태 이후로는 재봉가위로는 밥 벌어 먹기조차 힘들어졌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김노호 한국맞춤양복기술협회 사무총장은 “맞춤양복이 정치인 기업총수 국회의원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전유물로 인식되고 있는 데다 요즘엔 ‘촌스럽다, 구닥다리다’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어, 이러다 명맥이 끊기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영국 런던에는 고급 맞춤양복 거리 ‘셰비로’가 있다. 재단사들 사이엔 영국에 셰비로가 있다면 한국엔 ‘롯데1번가’가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지하의 롯데1번가는 한국의 ‘신사복 1번지’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애용했다는 ‘세기’,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과 현대 창업주인 고 정주영 회장이 단골이었던 ‘해창’,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옷을 즐겨 맞춘 ‘잉글랜드’ 등 고급 양복점 19개가 롯데1번가에 똬리를 틀고 있다. 노동부가 93년부터 도입한 기능명장(양복 부문)들도 소공동에서 양복점을 운영중이다. 전직 대통령들의 옷을 만들어준 것으로 유명한 홍균(명장 이홍균), 라이프(명장 박종오), 프라자(명장 하석근) 등 기능명장들이 운영하는 양복점들도 이곳에서 솜씨를 뽐내고 있다.

    ‘세기’ 윤인중 사장은 롯데1번가에서만 20여년째 양복점을 운영하고 있다. 재단사 경력 40년의 윤사장은 60년대 대한복장학원에서 재단을 배웠다. 대한복장학원은 앙드레 김이 공부한 국제복장학원과 쌍벽을 이뤘던 명문 학원. 윤사장은 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전속 재단사 노릇을 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6공 때까지 대통령들의 예복과 양복을 도맡아 디자인했다. 그는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에도 재단사 선배들은 ‘갈비 먹기가 지겹다’고 할 만큼 돈을 잘 벌었다”면서 “그 시절이 양복 기술자들에겐 전성기였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양복점 거리 하나 없는 나라라니…

    수입 기성복의 패턴을 분석하고 CAD를 이용해 컴퓨터에 20여만건의 디자인을 치수별로 입력하는 등 맞춤양복의 르네상스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윤사장에게도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한국의 셰비로’ 소공동 신사복 거리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윤사장은 3월 롯데호텔로부터 “임대차계약을 해지한다. 4월30일까지 점포를 비워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런 통보를 받은 것은 윤사장뿐만이 아니었다. 롯데1번가에 있는 19개 양복점들이 모두 같은 통보를 받은 것. 양복점 업주들은 점포 양도 요구를 무시한 채 장사를 계속하고 있지만 조만간 점포를 비워줘야 한다.

    롯데측은 롯데1번가를 확장, 최근 인수한 한일은행 본점 건물과 메트로 미도파의 지하공간을 연결해 공간활용도를 높일 계획이다. 양복점 업주들 사이에선 “고급 음식점들이 들어선다” “명품관이 만들어진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지만 구체적인 리모델링 계획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롯데 관계자는 “상인들과 계약 해지 협의가 마무리되는 대로 리모델링의 청사진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윤사장은 “한국 양복의 산 역사이자 상징인 소공동 양복점 거리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한국의 천박한 문화 탓에 맞춤양복의 대가 끊길지도 모르게 됐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게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는 초로의 신사(50대 초반)를 가리키며 “저 친구가 재단사 막내”라고 소개한 윤사장의 목소리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쫓아낼 때까지는 소공동을 지키고 있어야지요. 고급 제품은 유럽에 빼앗기고 중저가 제품은 중국 베트남에 빼앗기는 게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 아닙니까. 패션도 마찬가지예요. 제대로 된 양복점 거리 하나 없는 국가의 미적 수준과 그런 미적 수준에서 나오는 상품의 부가가치는 뻔한 거 아닙니까? 얼마나 돈을 벌겠다고 그렇게 빡빡하게 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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