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충남 예산의 수덕사를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말끔하게 다듬어진 계단과 담벼락은 막 지은 새 건물 같고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잡은 석탑은 비바람을 견뎌낸 흔적 하나 없이 날카롭게 각이 져 있다. 절 입구 안내문에 쓰인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수덕사의 긴 역사와 달리, 여기저기서 시멘트 냄새가 폴폴 난다. 신발 바닥에서 제대로 된 흙 한줌 털어내는 맛도 느낄 수 없는 사찰이라니….
‘두레 생태기행’의 김재일 회장(56)은 “신앙을 중심에 놓기보다 건축에만 초점을 맞춰 손을 대다 보니 탑 하나에도 시대성이나 정체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하긴 온통 시멘트로 도배한 절이라면 1000년이 지난들 무슨 의미를 지닐까.
김재일 회장은 3월 말부터 무려 10년 계획으로 전국 108개 사찰의 생태기행에 나선다. 전국 사찰 주변의 생태계가 온통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김회장은 국토의 70%가 산이고, 산마다 사찰이 자리잡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산중 사찰이야말로 우리 자연환경의 살아 있는 지표가 된다고 주장한다. 불교에서 모든 번뇌를 상징하는 ‘108’이라는 숫자를 택한 것도 환경문제야말로 인류의 가장 큰 번뇌라는 생각에서다.
“사찰이 상처를 입는 것은 외부의 파괴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자해가 원인이 되기도 하죠. 사찰이 있는 산을 관통해 도로를 내는 것이 사찰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무리하게 대불(大佛)을 건립하거나 사찰 규모를 확대하는 것은 자해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그가 해인사 대불 건립에 반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21세기 우리 불교에 대한 정체성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불 건립은 어불성설”이라는 게 김회장의 일관된 주장이다.
김회장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사찰 환경에 대한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한 점을 아쉬워한다. 이번 사찰 생태기행도 사찰 주변의 환경문제를 고발하는 것보다 자연에 대한 기록을 남기려는 데 더 큰 목적을 두고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를 비롯한 여러 역사 기록이 있지만 우리는 1000년 전 불국사 주변의 자연환경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연에 대한 기록이 없으면 얼마나 파괴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지요.” 그래서 그는 생태기행이 마무리되는 대로 사찰을 둘러싼 나무와 풀, 산새에 대한 기록부터 이와 관련한 전설까지 담아 10권의 책을 펴낼 예정이다.
김회장은 5년 동안 불교에 귀의했던 독특한 경력도 갖고 있다. 72년부터 경기도 한 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했던 그는 73년 5월경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에서 40리 떨어진 경기도 안성의 칠장사로 소풍을 갔다. 그곳에서 객스님을 만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반야심경의 한 구절을 전해 듣고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세상 모든 것, 특히 그토록 연연해 온 돈, 명예, 여자 등에 대한 온갖 욕망이 헛된 것이라면 더 이상 속세에 미련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결국 처자식을 등지고 그해 10월 불교에 귀의했다. 아들은 친가에 맡기고 아내는 딸을 데리고 떠나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이산가족이 됐다. 그러나 결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고, 하루아침에 도가 트이는 것도 아니고 처자식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5년 만에 환속했지만 ‘생명과 자비’를 중시하는 불교의 사상만은 아직까지 그에게 문신처럼 남아 있다. 절에서 지내며 고시생들 방에 군불 때주던 시절, 하루는 나무를 베어오는 게 힘들어 썩은 나무를 주워다 불을 땠다. 그것을 본 스님은 다시는 썩은 나무를 주워오지 말라며 호통쳤다. 그리고는 그가 보는 앞에서 썩은 나무를 부러뜨려 나뭇가지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작은 곤충의 알들을 보여주었다. 김회장은 그때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작은 생명까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라는 스님의 가르침이 30여년 지난 지금까지 생태와 생명에 대한 관심을 끌고 온 원동력이었다.
5년 만에 속세로 돌아온 김회장은 다시 가정을 이루고 학교로 돌아갔다. 하지만 학교로 돌아간 지 10년도 채 안 된 86년, 단순한 삶을 벗어나 치열한 현실에 부딪히며 살고 싶은 마음에 미련 없이 학교를 떠났다. 이후 드라마 작가로도 활동하고 언론·환경 운동에도 참여했지만 매번 변변한 월급봉투 한번 가져다 주지 못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덩달아 아내는 쉰 살이 다 되도록 칠장이 노릇을 하며 그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지금은 김재일 회장이 ‘생태운동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그가 처음부터 생태나 환경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91년에는 문화유산답사 단체인 ‘두레 문화기행’을 만들었다. 문화유적들을 돌아보면서 자연스레 환경문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
특히 80년대 활발했던 노동·인권·정치 운동이 90년대 들어와 와해되고 그 조직이 환경운동으로 흡수되면서 시민 없는 환경운동으로 변질되어 가는 모습에도 안타까움을 느꼈다. 정작 환경을 이루고 있는 동식물들의 생태계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인간만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방식이 못마땅하기도 했다. 서구식 환경운동 방식만 답습하는 것도 그의 눈에는 문제점으로 비쳤다. 이런 생각들을 담아 중·고등학교 생물교사들과 환경운동가들에게 손수 편지를 써 보냈다. 그의 뜻에 공감하는 답장을 보내온 56명의 교사들과 11명의 환경운동가들을 모아 94년, 생태운동 단체 ‘두레 생태기행’을 만들었다.
지난 주말 그는 환경운동 단체 회원들을 인솔해 겨울 한강변에서 머물다 떠나는 철새들을 배웅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전국 각지의 절을 찾아다니고 있다. 1000개 사찰 답사를 목표로 1988년부터 시작한 전국 사찰 방문을 계속하고 있는 것. 김회장은 지금까지 360여개의 사찰을 둘러보았다. 앞으로 108개 사찰 생태기행에 들어가면 1000불(佛)을 채우는 데 저절로 도움이 되는 셈.
그는 매년 10여개 사찰에 머물며 대웅전을 중심으로 반경 1km 이내의 사계절을 관찰할 예정이다. 첫번째 생태기행지는 자신이 출가했던 칠장사. 30여년 전 보았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고, 현재를 기록으로 남겨 앞으로 무수한 세월이 지난 뒤 그 변화를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통도사, 해인사 등의 전통사찰을 비롯해 강화도 정수사처럼 작지만 앞논에 철새들이 찾아들 정도로 생태적으로 중요한 사찰로만 108개 사찰을 선정했다.
30여년 전 소풍길에 만난 객스님에게서 들었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지혜는 여전히 김회장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듯하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 하나 없지만 제대로 변해야 한다”는 그의 말 속에는 당장의 이익만 생각하고 파헤치는 환경이 자신들을 둘러싼 생태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알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깊게 배어 있었다.
‘두레 생태기행’의 김재일 회장(56)은 “신앙을 중심에 놓기보다 건축에만 초점을 맞춰 손을 대다 보니 탑 하나에도 시대성이나 정체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하긴 온통 시멘트로 도배한 절이라면 1000년이 지난들 무슨 의미를 지닐까.
김재일 회장은 3월 말부터 무려 10년 계획으로 전국 108개 사찰의 생태기행에 나선다. 전국 사찰 주변의 생태계가 온통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김회장은 국토의 70%가 산이고, 산마다 사찰이 자리잡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산중 사찰이야말로 우리 자연환경의 살아 있는 지표가 된다고 주장한다. 불교에서 모든 번뇌를 상징하는 ‘108’이라는 숫자를 택한 것도 환경문제야말로 인류의 가장 큰 번뇌라는 생각에서다.
“사찰이 상처를 입는 것은 외부의 파괴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자해가 원인이 되기도 하죠. 사찰이 있는 산을 관통해 도로를 내는 것이 사찰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무리하게 대불(大佛)을 건립하거나 사찰 규모를 확대하는 것은 자해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그가 해인사 대불 건립에 반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21세기 우리 불교에 대한 정체성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불 건립은 어불성설”이라는 게 김회장의 일관된 주장이다.
김회장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사찰 환경에 대한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한 점을 아쉬워한다. 이번 사찰 생태기행도 사찰 주변의 환경문제를 고발하는 것보다 자연에 대한 기록을 남기려는 데 더 큰 목적을 두고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를 비롯한 여러 역사 기록이 있지만 우리는 1000년 전 불국사 주변의 자연환경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연에 대한 기록이 없으면 얼마나 파괴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지요.” 그래서 그는 생태기행이 마무리되는 대로 사찰을 둘러싼 나무와 풀, 산새에 대한 기록부터 이와 관련한 전설까지 담아 10권의 책을 펴낼 예정이다.
김회장은 5년 동안 불교에 귀의했던 독특한 경력도 갖고 있다. 72년부터 경기도 한 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했던 그는 73년 5월경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에서 40리 떨어진 경기도 안성의 칠장사로 소풍을 갔다. 그곳에서 객스님을 만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반야심경의 한 구절을 전해 듣고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세상 모든 것, 특히 그토록 연연해 온 돈, 명예, 여자 등에 대한 온갖 욕망이 헛된 것이라면 더 이상 속세에 미련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결국 처자식을 등지고 그해 10월 불교에 귀의했다. 아들은 친가에 맡기고 아내는 딸을 데리고 떠나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이산가족이 됐다. 그러나 결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고, 하루아침에 도가 트이는 것도 아니고 처자식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5년 만에 환속했지만 ‘생명과 자비’를 중시하는 불교의 사상만은 아직까지 그에게 문신처럼 남아 있다. 절에서 지내며 고시생들 방에 군불 때주던 시절, 하루는 나무를 베어오는 게 힘들어 썩은 나무를 주워다 불을 땠다. 그것을 본 스님은 다시는 썩은 나무를 주워오지 말라며 호통쳤다. 그리고는 그가 보는 앞에서 썩은 나무를 부러뜨려 나뭇가지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작은 곤충의 알들을 보여주었다. 김회장은 그때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작은 생명까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라는 스님의 가르침이 30여년 지난 지금까지 생태와 생명에 대한 관심을 끌고 온 원동력이었다.
5년 만에 속세로 돌아온 김회장은 다시 가정을 이루고 학교로 돌아갔다. 하지만 학교로 돌아간 지 10년도 채 안 된 86년, 단순한 삶을 벗어나 치열한 현실에 부딪히며 살고 싶은 마음에 미련 없이 학교를 떠났다. 이후 드라마 작가로도 활동하고 언론·환경 운동에도 참여했지만 매번 변변한 월급봉투 한번 가져다 주지 못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덩달아 아내는 쉰 살이 다 되도록 칠장이 노릇을 하며 그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지금은 김재일 회장이 ‘생태운동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그가 처음부터 생태나 환경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91년에는 문화유산답사 단체인 ‘두레 문화기행’을 만들었다. 문화유적들을 돌아보면서 자연스레 환경문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
특히 80년대 활발했던 노동·인권·정치 운동이 90년대 들어와 와해되고 그 조직이 환경운동으로 흡수되면서 시민 없는 환경운동으로 변질되어 가는 모습에도 안타까움을 느꼈다. 정작 환경을 이루고 있는 동식물들의 생태계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인간만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방식이 못마땅하기도 했다. 서구식 환경운동 방식만 답습하는 것도 그의 눈에는 문제점으로 비쳤다. 이런 생각들을 담아 중·고등학교 생물교사들과 환경운동가들에게 손수 편지를 써 보냈다. 그의 뜻에 공감하는 답장을 보내온 56명의 교사들과 11명의 환경운동가들을 모아 94년, 생태운동 단체 ‘두레 생태기행’을 만들었다.
지난 주말 그는 환경운동 단체 회원들을 인솔해 겨울 한강변에서 머물다 떠나는 철새들을 배웅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전국 각지의 절을 찾아다니고 있다. 1000개 사찰 답사를 목표로 1988년부터 시작한 전국 사찰 방문을 계속하고 있는 것. 김회장은 지금까지 360여개의 사찰을 둘러보았다. 앞으로 108개 사찰 생태기행에 들어가면 1000불(佛)을 채우는 데 저절로 도움이 되는 셈.
그는 매년 10여개 사찰에 머물며 대웅전을 중심으로 반경 1km 이내의 사계절을 관찰할 예정이다. 첫번째 생태기행지는 자신이 출가했던 칠장사. 30여년 전 보았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고, 현재를 기록으로 남겨 앞으로 무수한 세월이 지난 뒤 그 변화를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통도사, 해인사 등의 전통사찰을 비롯해 강화도 정수사처럼 작지만 앞논에 철새들이 찾아들 정도로 생태적으로 중요한 사찰로만 108개 사찰을 선정했다.
30여년 전 소풍길에 만난 객스님에게서 들었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지혜는 여전히 김회장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듯하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 하나 없지만 제대로 변해야 한다”는 그의 말 속에는 당장의 이익만 생각하고 파헤치는 환경이 자신들을 둘러싼 생태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알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깊게 배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