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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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지의 등장 … 그것은 내 삶의 충격이었다”

서태지 세대 5명의 추억담 … “온몸으로 느꼈던 신선감, 그때의 신화는 아직도 진행중”

  •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입력2004-10-20 16: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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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지의 등장 … 그것은 내 삶의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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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에 함께 도전한 내 친구

    공숙영(33.변호사)

    “태지의 등장 … 그것은 내 삶의 충격이었다”
    인문학을 전공한 공숙영 변호사는 대학을 졸업한 지 1년 반이 지난 후에야 사법고시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힘든 결심을 하고 ‘삶의 전선’에 막 나서던 시점인 93년 여름, 서태지가 2집 ‘하여가’를 발표했다. 그때까지 대중음악이나 가수에 아무 관심이 없었던 그는 TV에서 들려오는 서태지의 노래에 ‘설명할 수 없는 낯선 충격’을 받으며 순식간에 빨려들어 갔다. “그의 노래가 담은 메시지는 당시 젊은 세대가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던 것들이었어요. 그것을 음악을 통해 내세운 것이 정말 신선했습니다. 세상과 ‘맞장’ 뜨려는 젊은이들의 욕망과 불안이 그의 노래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죠.”



    그 후 2차 시험에 패스하기까지 3년 반 동안, 공변호사에게 서태지의 노래는 큰 힘이 되었다. 다른 고시생들이 술 담배로 잠시 시름을 잊거나 오락실, 당구장에 갈 때 그는 서태지의 노래를 들었다. “물론 성장하면서 다른 예술가나 위인에게서도 분명 영향을 받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이거나 먼 나라 사람들이었지요. 저는 서태지를 통해 내부와 외부의 엇갈린 대결 속에서 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과 목표를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자세를 배웠습니다.”

    그는 지난해 서태지가 다시 돌아왔을 때 무척 반가웠지만 과거와 같은 열정은 많이 희석되었음을 실감했다. “대중음악을 통해 위안받던 감수성은 과거의 것이 되었음을 느꼈어요. 하지만 서태지의 문화적 역할은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공변호사는 90년대 젊은이들을 ‘서태지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정도로 변함없는 애정을 표시했지만 “외국것, 첨단 경향을 따라가는 우리 젊은이 특유의 강박관념이 보이는 것 같다”는 평가도 했다.

    이원재(30.문화평론가)

    “태지의 등장 … 그것은 내 삶의 충격이었다”
    “서태지는 주류 문화 안에서 다른 문화적 실험에 성공한 최초의 인물이지요. 그것 하나만으로도 서태지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문화연대의 이원재 정책실장은 서태지가 데뷔하던 92년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다. 그는 탈춤 동아리 등에서 문화활동을 펼치며 당시의 진보적 대학문화가 서태지로 대표되는 주류 문화와 섞여들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서태지가 처음 등장할 때는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교실 이데아’가 나온 3집에서는 주류에 있으면서도 주류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더군요. 당시 대중문화는 사랑 노래가 아닌 다른 것을 가요로 부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억압적인 분위기였습니다. 이걸 서태지가 처음으로 박차고 나온 것이죠. 90년대 대학이 정치보다 여성·환경 등 문화적 쟁점을 받아들이게 되는 데에 서태지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죠.”

    이원재 실장은 개인적으로는 서태지의 열렬한 팬은 아니었다. 문화운동가들 사이에서 서태지에 대한 평가는 아직까지도 상반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실장은 서태지를 뛰어난 창작자인 동시에 탁월한 선구안을 가진 문화기획자라고 평가한다.

    “90년대 이후 대학사회에 주류 문화가 침투해 올 때 가장 선봉에 섰던 인물이 서태지였습니다. 그래서 90년대 학번들에게 서태지라는 이름은 여전히 특별한 의미이며 대중문화의 신화로 남아있는 것이지요.”

    여인동(27.회사원)

    “태지의 등장 … 그것은 내 삶의 충격이었다”
    “TV에서 서태지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정말 충격적이고 혁신적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록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국내 가요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주로 공부할 때 잠을 쫓으려고 음악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서태지의 음악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듣기만’ 했죠.”

    벤처기업 직원인 여인동씨는 서태지가 데뷔할 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여씨는 서태지 은퇴와 서태지 팬클럽의 반응을 자신의 연구 주제로 삼아보기도 했다.

    “서태지는 2집 ‘하여가’에서 자기 색깔을 찾았고 3, 4집에서는 사회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대중문화에 대해 인색했던 대학사회에서도 서태지에 대해서만은 예외였습니다.” 록 마니아였던 그는 서태지가 4집에서 댄스 그룹으로서의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은퇴 선언을 했을 때는 슬프면서도 잘됐다는 이중의 감정을 느꼈다고.

    “저는 좋아하는 음악은 혼자서 크게 틀어놓고 듣습니다. 그 속에 흠뻑 빠져 들을 수 있는 음악은 국내 가요로는 서태지가 유일해요. 아쉬움이 있다면 작곡 능력이나 프로듀싱에 비해 뛰어난 보컬은 아니라는 점이죠. 솔로보다는 자신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밴드 활동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과거의 신화로 남아 있기보다는 실패를 겪더라도 계속 음악을 했으면 합니다. 서태지의 신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그 친구는 정말 천재니까요.”

    신동주(29.회사원)

    “태지의 등장 … 그것은 내 삶의 충격이었다”
    “그의 노래에는 그 어떤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특이해서 좋아했어요.”

    신동주씨는 학교를 졸업하고 한창 사회생활을 하던 중 서태지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신씨는 ‘콘서트 한번 못 가보고 음반을 산 것이 전부인’ 지극히 평범한 팬이었다. 그러나 서태지의 음악에 열광하던 때를 생각해 보면 지금도 즐겁다.

    “아마 서태지가 없었다면 인생이 참 무료했을 겁니다. 자극도 없었을 거고요. ‘사람들은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고 그대는 방 안 구석에 앉아 쉽게 인생을 얘기하려 한다’는 ‘환상 속의 그대’ 가사를 들었을 때는 이게 바로 내 이야기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신동주씨는 10대에게는 누구나 발산하고픈 열정과 감수성이 있는데, 자신에게는 그 대상이 서태지였다고 한다. 그는 10년 세월이 지나 다시 돌아온 서태지에게 친구 같고 부모 같은 애정마저 느낀다. “지금껏 해온 대로 앞으로도 서태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라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하면서 살지 못하지만 그의 모습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기 때문에 즐거워요. 그는 제게 제대로 노는 법, 그리고 인생의 길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었어요.”

    이진숙(29.대학 직원)

    “태지의 등장 … 그것은 내 삶의 충격이었다”
    경기도의 한 대학 직원인 이진숙씨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서태지의 열렬한 팬이다. 서태지가 전국 투어 콘서트를 했던 지난해에는 직장에 휴가를 내고 콘서트장을 찾아갔을 정도다. ‘왜 그렇게 서태지를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게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서태지가 등장할 때는 한창 소방차 같은 그룹이 인기를 얻을 때였어요. 서태지는 기존 가수들에 비해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경직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느껴졌어요. 춤은 다른 가수들의 ‘율동’과 확실히 달랐고 가사도 신파조의 사랑타령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씨는 고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을 얻는 등 인생의 작은 고비들을 넘을 때마다 전력을 다해 음악에 매진하는 서태지의 모습을 보고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 이씨에게 서태지는 마치 데미안처럼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오게 해준 존재다.

    “서태지를 알기 전까지 저는 보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틀 안에 갇혀 있었어요. 어른들의 말이라면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 전에 무조건 들어야 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이답지 않게 의젓하다’는 칭찬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요. 서태지를 알게 되면서부터 저는 그 틀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 저는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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