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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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와 로베스피에르

  • 조용준 기자

    입력2004-10-21 13: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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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태와 로베스피에르
    3월9일 제주 경선 16표(득표율 2.4%), 3월10일 울산 경선 10표(1.0%). 7명의 경선 주자 중 7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선 김근태 의원의 ‘초라한’ 성적표다. 물론 아직 초반전이다. 경선 일정은 앞으로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초반의 부진한 성적이 획기적으로 나아질 가능성은 별로 없는 듯하다. 당사자에겐 몹시 미안한 얘기지만, 경선을 지켜보는 대다수 사람의 생각이 그럴 것이다.

    나머지 6명의 경쟁자 속에 섞인 채 단상에 앉아 개표 결과를 듣는 김의원의 얼굴 표정은 당혹감과 곤혹스러움, 실망과 절망감이 온통 뒤섞인 복잡한 모습 그 자체였다. 비록 말은 할 수 없어도 “이럴 수가!”라는 고함이 금방 터져나올 듯한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고뇌하는 햄릿, 아니 로베스피에르의 얼굴이 겹쳐졌다.

    “차기 리더십의 항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도덕적 일관성이지만, (프랑스 혁명 당시) 로베스피에르가 마라를 처형했던 것 같은 철두철미한 이념의 도덕성은 아니며, 그런 도덕성은 인간사에서 사실상 불가능하다.”

    김의원은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지난해 4월 초 ‘한반도 평화와 경제발전 전략 연구재단’(약칭 한반도재단)의 창립대회를 가진 직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재단 출범 격려사를 위해 김종필 자민련 총재를 ‘모신’ 것이나, ‘운동권 선배’로서 JP에게 깍듯한 예우를 한 사실을 염두에 둔 말인 듯했다. 당시 정치권의 좌파 진영에서는 ‘운동권의 기수가 대권을 위해 보수 원조에게 굴신(屈身)했다’는 비판론이 적지 않았다.



    인터뷰 도중 느닷없이 로베스피에르를 언급하는 당시 김의원의 말에서 기자는 명분과 현실 사이, 도덕성과 실리 사이의 갈등으로 번민하는 ‘인간 김근태’의 모습을 똑똑하게 볼 수 있었다. 또한 ‘미완의 혁명’에 안타까워하며 32세의 젊은 나이에 콩코드 광장의 기요틴(단두대)에서 이슬로 사라져간 로베스피에르처럼 ‘개혁의 포로’가 되어 현실 정치에서 좌초하지는 말아야겠다는 한 정치인으로서의 야심과 의지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끈질기게 붙잡은 것은 역시 ‘양심적 정치인’으로서의 개혁을 향한 열망이었던가. 그는 3월3일 기자회견을 갖고 “2000년 8·30 전당대회 최고위원 경선 당시 5억3872만원을 썼다”는 충격 고백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92년 정당에서 경선이 도입된 이래 경선 후보가 자금사용 명세를 공개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권력형 부정부패를 예방하는 제도적 정치개혁을 이뤄야 한다는 충정”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김근태는 나폴레옹보다 로베스피에르에 가까웠다.

    1794년, 혁명력(革命曆) ‘테르미도르의 달’에 로베스피에르를 의회에서 몰아내 단두대로 보냈던 사람들은 앙시앵 레짐(구체제)이 아니라 같은 자코뱅 당원들이었다. 역사는 로베스피에르 숙청 세력이 전쟁을 이용해 부정한 이득을 취했거나 부패행위를 한 사람들, 즉 로베스피에르가 평소 강조한 ‘덕(德)의 공화국’ 시민으로서 부적절한 자들로서, 로베스피에르가 자신들에 대해 격렬한 비판 연설을 하자 이에 불안을 느껴 다음날 쿠데타를 감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크레인 브린턴, ‘혁명의 해부’).

    김근태 의원이 고해성사를 하자 권노갑씨는 “재야라며 하도 징징대서 돈을 줬다”고 말했다. 당내 일부 세력은 “순진한 바보”라고 노골적으로 깎아내렸다.

    프랑스 혁명은 로베스피에르의 죽음 이후 유턴하기 시작한다. 자코뱅당은 공포정치의 주역이기도 했지만 민주주의 원칙을 추구, 부르주아가 아닌 소매상인과 농민·노동자가 처음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혁명의 이익을 시민계급뿐만이 아닌 전체 민중에까지 확대했다. 로베스피에르의 죽음 이후 가장 먼저 부활한 것은 향락과 타락, 정치인들의 부정부패였다. 그의 처형과 동시에 파리 시내 전역에서 댄스홀이 다시 문을 열었고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는 공공연해졌다.

    김근태 의원에게 이번 3월은 ‘테르미도르의 달’이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울산 경선 직후 “외롭지만, 끝까지 가겠다”고 말했다. 그의 역사는 아직 종결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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