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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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에이즈 정책 국민 다 죽는다”

남아共 2000년 한 해 20만명 사망 … 음베키 대통령 “전염성 없고 약으로 치유 불가” 주장

  • < 고현주/ 요하네스버그 통신원 > hyunju_sa@hotmail.com

    입력2004-10-20 16: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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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심한 에이즈 정책 국민 다 죽는다”
    지난 몇 주 동안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에이즈 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최고조에 달해 온 나라가 이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지난해부터 음베키 대통령 정부는 에이즈 치료약 네브라핀을 9개 도의 공공병원 두 곳에서만 시험적으로 공급하도록 제한해 왔다. 네브라핀은 인체면역결핍 바이러스(HIV) 양성 산모가 출산 때 한 알을 복용하고, 아기에게 출생 72시간 내 0.6ml를 투여하면 HIV 모자감염을 50% 이상 줄일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이 약의 무상보급을 제한해 왔다. 남아공에서는 매일 150명 이상의 신생아가 HIV에 모자감염되지만 산모의 무지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치료약을 구입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시험운영 병원을 제외한 공공병원 의사들은 자의로 HIV 산모와 아기에게 네브라핀을 투여하거나, 강간당해 HIV 감염 위험이 높은 환자들에게 약을 투여해 병원 당국으로부터 징계를 받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남아공의 에이즈 단체는 급기야 정부를 프리토리아 고등법원에 제소했고, 네브라핀 공급을 전면 확대하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정부는 이에 불복해 상고했다. 국민 건강에 관한 정책 결정을 법원이 해야 하는지 정부가 해야 하는지 규명하기 위한 취지라 변명했지만, 실상은 약 공급 확대 판결의 실행을 늦추겠다는 심사다.

    “한심한 에이즈 정책 국민 다 죽는다”
    사정이 이렇자 임신부 3명 중 1명이 HIV 보균자인 크와줄루-나탈 지역의 도지사가 최근 해당 지역의 모든 공공병원에서 네브라핀을 무상 공급하겠다며 정부 정책을 무시하고 나섰다. 또 여당인 ANC(African National Congress)의 우세 지역인 하우텡의 도지사가 네브라핀 공급과 관련해 보건부 장관과 일전을 벌였다. 만토 보건부 장관은 실로와 하우텡 도지사의 네브라핀 확대 공급 결정을 취소할 것을 종용했지만, ANC의 지지에 힘입은 실로와는 이를 일축하고 자신의 계획을 밀고 나갔다. 더욱이 9개 도 중 6개 도가 네브라핀 확대 공급을 발표하자 음베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이런 와중에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와 음베키 대통령 사이의 불화설이 표면화됐다. 에이즈 정책에 대해 꾹 참아온 만델라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지난 2월 초 ‘만델라 보건·인권상’시상식에서였다. 만델라는 HIV 모자감염 방지에 공로가 큰 의사 2명에게 상을 수여하면서 “네브라핀을 이용한 효과적 치료를 통해 매년 50%의 모자감염을 줄일 수 있다. 정부는 에이즈 퇴치를 큰 전쟁으로 생각해야 한다. 과거의 어떤 전쟁보다 사람들을 더 많이 죽일 수 있기 때문”이라며 정부가 에이즈를 심각한 문제로 취급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만델라는 더반에서 열린 ANC 제90회 총회에서 연설문을 통해 이를 다시 피력함으로써 정부의 에이즈 정책을 비난했다.

    언론과 에이즈 단체, 야당, 국민들이 연일 쏟아내는 비난으로 사면초가에 몰린 음베키는 최근 국회 연설에서 에이즈에 관해 유연한 정책 방향을 모색할 것이라고 밝혔다. 네브라핀의 효과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함께 네브라핀 시험운영 병원을 점차 늘리기로 약속한 것. 만족할 수준은 아니지만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다.

    국제연합(UN) 조사에 따르면 남아공의 HIV 보균자는 전체 인구의 10%인 470만명. 또 남아공 MRC(Medical Research Council)는 2000년 한 해 에이즈 사망자가 20만명, 매일 새로 HIV에 감염되는 환자가 1700명이며, 15∼49세 성인남성 중 절반 이상이 에이즈로 사망한다고 보고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 처할 때까지 남아공 정부의 에이즈 정책은 왜 빗나가기만 한 것일까.

    근본 이유는 음베키의 에이즈관(觀)에 있다. 백인 정권의 ‘흑백 차별 정책’내내 망명생활을 한 음베키는 영국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경제 부흥의 막중한 임무를 띠고 1999년 만델라 전 대통령을 승계해 제2대 흑인 대통령에 취임했다. 에이즈 문제를 연구하던 그는 웹사이트에서 에이즈 관련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의학계의 소수파 ‘dissident’(불찬성자)를 접하게 됐다. 이들의 주장은 에이즈 원인균이 HIV가 아니고 전염성도 없으며 성 접촉으로 감염되지 않고, 에이즈 치료약은 되레 환자 수명을 단축시키는 등 득보다 해가 더 크다는 것. 또한 에이즈는 세계적으로 조금씩 다른 사회적 현상이며, 서구의 치료약을 아프리카에 접목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넉넉지 못한 국가재정을 운영해야 하는 음베키에겐 호소력이 컸다.

    “한심한 에이즈 정책 국민 다 죽는다”
    2000년 음베키는 세계 몇몇 지도자와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에이즈관을 피력했다. 당시 백악관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세계 각국의 에이즈 ‘불찬성자’ 44명은 음베키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그해 음베키는 대통령 직속 에이즈 패널기구를 설치했다. 패널 33명 중 절반은 해외에서 온 에이즈 ‘불찬성자’들이고 나머지는 에이즈 ‘전통론자’들이었다. 1년에 걸친 에이즈 연구와 해결방안 모색에서 양쪽은 의견 대립만 보인 채 보고서를 매듭지었다. 그동안 ‘불찬성자’측 조언을 받아온 음베키는 HIV와 에이즈의 상관관계를 의심하고, 수세기 동안 아프리카를 휩쓴 각종 질병이 에이즈란 새 이름을 얻게 됐을 뿐 늘 같은 병들이 존재해 왔다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따라서 에이즈를 예방·치유하는 것은 약이 아니라 가난을 없애고 영양상태를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수의 국민이 에이즈로 죽어 나가는 동안 이렇게 남아공의 에이즈 정책은 HIV와 에이즈의 상관관계에 대한 원론적 토론으로 공전을 거듭했다. 결국 음베키는 국내외에서 국가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의심받고, 국내에서의 정치적 도전과 함께 모당인 ANC로부터도 압력을 받아 자신의 에이즈관을 재고해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2010년까지 남아공에서 에이즈로 700만명이 사망할 것이라는 MRC의 발표는 ‘에이즈 홀로코스트’를 예견케 한다. 이는 정부가 에이즈 창궐에 대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예상되는 수치. 에이즈로 인한 경제적 타격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남아공은 2015년에 경제성장률이 23%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내외국인의 남아공 투자 감소, 에이즈로 인한 반숙련공 및 숙련공 사망, 에이즈에 감염된 노동자들에 대한 의료비 보조 증가에 따른 것이다.

    EC(European Commission)는 에이즈 치료를 위해 향후 6년간 남아공에 500만 유로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모자감염 방지를 위해 네브라핀을 한 번 투여하는 데 드는 돈은 한화로 3500원 가량. 그러나 1년간 에이즈 환자 1명당 드는 비용은 1만5000달러로 가난한 이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때문에 다국적 제약회사들은 무엇보다 치료약 가격을 낮춰야 한다.

    남아공을 포함, 아프리카에선 치료약 공급만이 문제 해결의 전부가 아니다. 약을 복용하기 위한 깨끗한 물, 충분한 상담과 복용법 교육, 약을 받으러 가기 위한 교통시설, 좋은 영양상태 등 환자에게 필수적인 환경은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 치료약 공급에 우선해 이런 난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게 남아공이 지닌 또 다른 ‘에이즈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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