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총재 측근은 “짧은 시간 동안 악재가 겹쳤기 때문에 위기가 과장되어 보인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악재가 겹친 것이 우연일까. 한나라당은 지금 ‘이총재 이후의 진로’에 대한 논의까지 시작한 마당이다.
이총재 측근이 말하는 최근 악재란 크게 여덟 가지다. △박근혜 의원의 탈당과 신당 창당 행보 △김덕룡 의원의 탈당과 신당 참여 시사 △강삼재 의원의 부총재직 사퇴 △서울시장 경선 파행 △이총재 가족의 호화빌라 거주 논란 △손녀 하와이 원정 출산 논란 △이부영 부총재의 총재단 사퇴 요구 △홍사덕 의원의 이총재 퇴진 요구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다 심상찮은 지방 분위기가 심각성을 더한다. 권오을 의원의 경북도지사 경선 반발 기자회견, 대구 중구청장 경선 금품살포의혹, 부산시장 경선 과정의 이상한 기류가 잇따라 나왔다.

풍경2 그로부터 얼마 뒤 최병렬 수석부총재, 김문수 사무부총장이 홍의원 편에 섰다. 총재의 외유(일본 방문)중 한나라당은 사실상 ‘내란 상태’에 빠진 셈이다. 최부총재는 지난 1월 ‘주간동아’ 인터뷰에서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합심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대선 이전 당권-대권 분리도 이총재가 대통령 되는 데 방해된다’고 했던 그였다. 그런 그가 이제 이전의 주장을 거둬들이려는 것이다.

풍경3 “강삼재 부총재, 김덕룡 의원이 들썩거리는데 TK는 왜 조용하냐”고 대구 출신 한 의원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TK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움직이면 한꺼번에 확 쏠린다”고 말했다. 대구지역 국회의원들은 이총재를 여전히 지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박근혜 의원이 탈당한 뒤 따로 모여 “앞으로 우리는 박의원을 공격하지 말자”고 결의했다. 이들은 과거 자민련에게 몰표를 준 대구 유권자들의 성향을 잊지 않고 있다. 이총재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여론과 지지율이 달라지면 상황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풍경4 이총재 주변엔 수많은 국회의원과 고급 인력이 포진해 대선전략을 짜고 있다. 그러나 고위 당직자 B씨는 “이총재가 위기에 몰린 것은 전략부재 때문이기도 하다”고 토로했다. 한나라당은 최근 민주당 권노갑 전 고문의 정치자금 제공의혹을 집중 공격했다. ‘권노갑 특검제’를 하자고까지 했다. 그러자 수세에 몰린 민주당이 이회창 총재의 빌라의혹을 터뜨렸다. 민주당은 내친김에 이총재 손녀의 하와이 원정 출산 의혹도 잇따라 터뜨렸다. “이총재는 이인제와의 양강 대선구도를 가장 원한다. 그런데 민주당 경선이 진행되는 현 시점에서 이의원 후원자로 통하는 권노갑씨를 파상 공격하면 이의원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이의원과의 양강 구도를 한나라당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실익도 없이 권노갑씨를 공격하다 화만 자초했다.”(B씨)
풍경5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최근 다음과 같은 의견을 밝혔다. 그는 자신의 발언이 청와대가 정치에 개입하려는 의도는 아니며 단순히 개인적 소감일 뿐이라고 전제했다. “호화빌라`-`원정 출산 의혹을 이회창 총재 본인이 직접 해명하는 것을 보면서 놀랐다. 위기의 순간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해명은 추가 의문이 없도록 상세하게 하되 대변인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사실관계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더라도 ‘내 말을 잘못 전달했나 보다’고 피해갈 수 있다. 그런데 이번 경우 해명이 불충분한 데다 총재 본인이 직접 했다. 이 일은 앞으로 TV 토론에서 두고두고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풍경6 제주, 울산에서 치러진 민주당 국민참여 경선이 일반의 관심을 끌자 한나라당에선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야당과 여당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오직 선거 승리를 위해 당 민주화를 유보한 결과 측근정치가 발호하고 있다는 경고다.
한 당직자에 따르면 한나라당은 지난해 말부터 박근혜 의원 탈당 이후 대처방안을 마련해 왔다. 그중엔 ‘박의원 진영이 한나라당 공천 낙천자들을 포섭, 광역단체장 선거에 출마시켜 한나라당 후보들과 일합을 겨루는 상황을 사전 차단한다’는 내용도 있다. 요즘 이 시나리오가 실제로 가동중이다. 박의원의 인기가 높은 영남지역 광역단체장의 경우 경선 없이 현역 단체장을 우선 공천해 ‘안전하게’ 간다는 얘기가 당내에서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당장 공정경선의 원칙을 위협한다. 이총재 측근들이 공천에 개입하면서 당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는 반발이 터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회창 대세론의 위기는 ‘이회창식 리더십’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했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그것은 크게 용병술에 대한 회의감, 결단력에 대한 회의감, 원칙과 정도에 대한 회의감, 정치적 포용력에 대한 회의감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이런 회의감이 이번에 한꺼번에 분출됐다는 것이다.
한 당직자는 다음과 같은 가정법을 언급하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총재가 박근혜 의원의 요구를 전폭 수용하는 결단을 내렸다면, 박의원 탈당 이후라도 확실한 당 개혁조치를 발표해 선수를 쳤다면, 광역단체장의 공정 자유경선을 철저히 보장해 주었다면, 제왕적 총재라는 비판에 좀더 겸허했다면, 측근정치 없다고 선언했다면, 사생활 문제에 더 엄격했다면 위기는커녕 대통령 당선은 따논 당상 아니었을까. ‘그렇게까지 안 해도 대통령 된다’고 자신한 것일까.”
이회창 대세론의 위기는 야권 분열과 정계개편 음모에서 발단되었다는 게 이총재의 시각이다. 박의원의 탈당까지 음모로 모는 ‘책임 회피’가 또 한번의 비판 사유가 됐지만, 설혹 음모라 하더라도 그런 ‘작업’으로부터 자신과 한나라당을 지켜내지 못한 것은 자업자득인 셈이다. 해법도 이런 반성에서부터 찾아야 한다는 것이 한나라당 내부의 대체적 기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