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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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가 한 달? 와, 부럽네!

재충전 차원서 회사마다 ‘장기휴가’ 증가 추세 … 직원들 사기 충천에 업무 능률도 쑥쑥

  • < 황일도 기자 > shamora@donga.com

    입력2004-10-20 16: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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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가 한 달? 와, 부럽네!
    해마다 여름이면 모두 바캉스를 떠나 도시가 텅 빈다는 프랑스. 노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이탈리아. 서유럽인들이 한 달씩 휴가를 떠난다는 외신 뉴스를 접할 때마다 평범한 한국의 직장인들은 배가 아프고 쓰리다. 고작 4박5일 여름휴가를 다녀오는 데도 상사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펴야 하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생각. ‘우리나라는 언제 저렇게 되나. 딱 한 달만 아무 생각 없이 쉬었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서울 논현동 한 주택가. 25명 규모의 작은 회사지만 파격적인 이동통신 광고 ‘TTL’로 광고계의 작은 강자로 자리매김한 화이트가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 “빌딩은 창의성을 제한하기 때문에 뜰이 딸린 단독주택을 사무실로 사용한다”는 이 회사 직원들은 낮과 밤, 휴일 평일이 따로 없다. 한번 경쟁 프레젠테이션(수주를 위해 광고주 앞에서 벌이는 시안 공개)이 걸리면 피 말리는 아이디어 싸움으로 3박4일 밤샘은 기본이다.

    휴가가 한 달? 와, 부럽네!
    “어떻게 버티냐고요? 대신 한 달을 놀거든요.” 전날도 늦게까지 야근을 했다는 이종미 프로듀서(32). 지난해에는 5월 한 달 동안 휴가를 보내며 하와이를 다녀왔다. 야자수 나무가 드리운 푸른 해변가 벤치에서 ‘마음껏 게으름을 피우며’ 보낸 꿈같은 2주일. “그걸 기다리며 1년을 버틴 거나 다름없죠.”

    화이트의 전 직원은 1년에 한 달간 ‘슬립’(sleep)이라 불리는 유급휴가를 즐긴다. 여기에 1개월치 월급이 휴가비로 추가 지급된다. 일은 열한 달만 하고 월급은 13개월치를 받는 셈. 그렇다고 기본 임금이 적은 편도 아니다. 신입 공채보다는 경력 직원 중심으로 인재를 보강하는 ‘화이트’의 연봉은 동종업계 최고 수준이다.

    세 사람이 모여 공동대표로 ‘화이트’를 세운 것은 지난 94년. 대형 광고기획사에서 10년 이상 일한 이들은 “우리가 젊었을 때 필요했던 것을 직원들에게 주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월급쟁이로 일하면서도 ‘언젠가 우리가 회사를 만들면 꼭 시행하자’고 의기투합했던 게 한 달 휴가였죠. 그러면 훨씬 차별화된 크리에이티브가 나올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죠.” 광고기획을 맡고 있는 박인춘 대표의 말이다. 회사가 자리잡은 재작년 이것을 실행하기로 결심했다는 것. 오히려 회사를 책임져야 하는 대표가 된 지금은 정작 휴가 일정을 잡기가 쉽지 않은 게 유감이라면 유감이다.



    처음에는 ‘그만큼 인력을 추가로 확보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다는 것이 박대표의 토로. “노는 만큼 더 열심히 일하는 게 눈에 보입니다. 좀 과중하게 일을 시켜도 잘 견뎌내는 것 역시 휴가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고요.” 한 달 휴가제도가 시작된 지난해 이후 광고의 질이나 회사 사정은 오히려 나아지고 있다는 판단이다. 최근 들어 TTL 광고가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는 것. 혹시 경기가 어려워지면 유야무야되는 것 아닐까. “글쎄요, 아무리 어려워도 이것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은데요. ‘우리는 다르다’는 자부심을 직원들에게 주니까요.”

    v 이 회사의 박영춘 관리실장은 연속적인 업무보다는 프로젝트 단위로 일을 진행하는 광고업계의 특징이 파격적인 휴가제도를 가능케 하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프로젝트에 따라 꼭 필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뉜다는 것. 일한 만큼 매출이 늘어나는 생산업체에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의견이다.

    과연 그럴까. 경기도 광주에 있는 주성엔지니어링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흰색으로 깔끔하게 칠해진 사옥이 인상적인 이 반도체 조립장비 생산업체도 사장부터 말단 직원까지 전 직원이 꼬박꼬박 한달씩 ‘리프레시(refresh)휴가’를 보낸다. 애초에는 과장급 이상 직원에게만 적용하던 것을 지난해부터 전 직원으로 확대했다. 토요일 격주 휴무, 경조사 휴가는 별도다. 휴가를 못 가면 연말에 주어지는 인센티브의 일부를 반납해야 한다고 규정에 못박았다.

    “사람 하나 빠졌다고 일이 안 돌아가면 문제 있는 조직이죠.” 황희주 인사총무팀장의 말이 단호하다. 충분한 조정을 거치면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회사의 경우 매년 초 각 팀장들이 부서원 전체의 휴가 계획을 받아 업무 스케줄에 맞춰 휴가 일정을 잡는다. 휴가자의 업무를 대신 처리할 사람을 지정해 미리 철저한 인수인계를 거치는 것은 필수. 휴가자가 맡았던 업무를 쪼개 팀원 전체가 골고루 나누는 방식을 사용한다.

    황팀장은 한 달간의 휴가를 ‘가족에 대한 봉사’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열한 달 죽어라고 일했으면 한 달쯤은 가족을 위해 사용하라는 의미죠. 사원 가족도 회사가 고려해야 할 대상이니까요.” 그렇지만 장기휴가의 또 다른 속내는 인력 스카우트를 위한 포석이다. “삼성전자나 하이닉스 같은 대기업 직원들이 주요 스카우트 대상입니다. 생산업체라곤 해도 석·박사급 전문인력이 상당수니까요. 이들을 끌어들이려면 단순한 임금 외의 메리트가 필요합니다.”

    휴가가 한 달? 와, 부럽네!
    휴가 때 집에 오래 있다 보니 이웃들로부터 실직했느냐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는 생산기술팀의 김규환 과장(34). 팀을 이끌고 있는 그의 입장에선 장기휴가가 무조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문제점이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휴가를 다녀와서도 보통 2~3일은 업무 적응하는 데 보내야 하니까요.” 그동안 메일박스에 쌓인 이메일을 확인하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는 게 김과장의 경험담이다. 다른 문제점은 회사가 늘 휴가 기분에 젖어 있다는 것. 30여명에 달하는 팀원 중 서너 명은 늘 자리를 비우고 있는 데다 직원들이 모이면 휴가 얘기로 시간을 보내는 일도 잦다.

    휴가가 한 달? 와, 부럽네!
    자재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황철홍 주임(32)도 비슷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게 황주임의 반론. “동료의 대리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업무를 큰 틀에서 볼 수 있게 되죠. 자칫 자기 업무에만 매몰돼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을 막아주거든요. 업무상의 큰 실수는 대개 독불장군처럼 혼자만 쥐고 있다가 뒤늦게 터지는 경우들이죠. 장기휴가를 통해 일을 공유하다 보면 그런 일도 막을 수 있다고 봅니다.”

    휴가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장기휴가를 보내는 것이 아직 쉬운 일은 아니라고 이들은 말한다. 미혼인 경우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 다음날 오후까지 늦잠자는 악순환도 심심찮게 발생한다는 것. 맞벌이 직원의 경우 배우자와 휴가 일정이 맞지 않아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장기휴가를 보내는 이들이 말하는 또 하나의 단점은 ‘휴가 중간에 회사에서 연락이 오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다. 지난해에만 20여일씩 두 차례에 걸쳐 휴가를 보낸 씨티은행의 홍재선 지배인(39)은 이를 피하기 위해 아예 휴가 때면 주로 해외에서 시간을 보낸다. 씨티은행은 자신의 상사에게 미리 휴가 계획을 상의해 승인받으면 휴가가 허가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동안의 업무는 주로 상급자가 대신 처리한다.

    씨티은행의 경우 미국에 본사를 둔 씨티그룹 전체가 같은 방식으로 휴가정책을 실시하고 있다고 이 은행의 김찬석 이사는 말한다. 단기적으로는 가족까지 잊어버릴 만큼 일에 매몰되는 사람이 나아 보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정반대가 되기 십상이라는 게 회사의 철학이라고 덧붙인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비추어 보면 특이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씨티은행의 휴가가 다른 회사보다 월등히 많은 편은 아니라고 홍지배인은 말한다. 월차와 연차, 여름 휴가 등 관계 법령에 규정된 휴가일수를 모두 더하면 큰 차이는 없다는 설명. “대신 휴가 자체를 권리로 인정해 주느냐, 혹은 장기간 가는 것을 인정해 주느냐의 차이겠죠.” 주어진 휴가일 안에서는 업무에 문제가 없는 한 재량껏 일정을 조정하도록 하고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홍지배인의 경우 부하 직원들에게도 휴가를 가급적 한꺼번에 몰아 쓰도록 권한다. 이틀 사흘씩 끊임없이 자리를 비우면 오히려 업무에 문제가 더 많다는 것이다.

    휴가가 한 달? 와, 부럽네!
    다른 외국계 은행인 HSBC의 주종규 지배인(39) 역시 비슷한 의견이다. “외국계 회사라도 쉽게 장기휴가를 떠나지는 못하죠. 외국인 직원들은 한 달 동안 본국에 다녀오거나 여행을 떠나는 반면 한국인 직원들은 찔끔찔끔 나눠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다 4년 전 HSBC로 옮긴 주지배인의 경험담이다. 전 직장의 경우 장기휴가를 가는 한국인 직원은 한 명도 없었다는 것.

    HSBC은행의 휴가제도 핵심은 코어리브(core leave)라고 불리는 강제휴가 제도. 매년 8월이 되기 전 전체 휴가의 절반 이상을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상급자가 불이익을 받는다. 눈치 보느라 휴가를 못 가는 게 아니라 눈치 때문에 휴가를 가야 할 판이다.

    이 은행의 경우 각 직원별로 휴가 등에 대비한 업무대행자를 지정해 두는 백업시스템(back-up system)을 사용한다. 때로는 자신이 휴가를 보내는 중에도 새로 휴가를 떠나는 사람의 업무를 인수받기 위해 잠시 출근하는 일도 생긴다.

    아무래도 대행자가 처리하는 업무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HSBC측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겠지만 ‘황당할 정도로’ 잘못되는 경우는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업무가 체계화될수록 휴가로 인해 문제가 발생할 확률은 줄어든다는 것. 장기휴가 제도가 우리나라에 정착하려면 우선 주먹구구식 업무관행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분석이다.

    휴가로 인한 업무 공백은 장기휴가 제도 도입을 검토하는 회사들이 가장 고민하는 부분. 지난해부터 이 제도의 도입을 추진해 온 동국제강의 경우 대상 범위에서부터 업무 공백을 막기 위한 일처리 방식 설계까지 다양한 문제 때문에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HSBC의 주지배인은 “오랜 휴가로 생산성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간략하게 반박한다. “뉴욕이나 런던에서 우리와 경쟁하고 협력하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휴가패턴을 사용합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일을 못할까요?” 피곤에 찌든 눈으로 사무실에 앉아서 흘려버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생산성은 오히려 마이너스일 것이라는 얘기. 경쟁력이 없다면 회사가 장기휴가 제도를 유지할 리 없다는 것이다. 아직 한국에서는 이른 이야기일까. 마냥 부럽기만 한 ‘행복한 직장인의 휴가 생산성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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