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데이비드 블렁킷 내무부 장관은 테러, 마약매매 등을 일삼는 조직범죄단을 색출하기 위해 신분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국 땅 영국에서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다. 몇 년을 살아도 어쩐지 낯설게 느껴진다. 산수도 다르고 음식도 입맛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겨울인 11월부터 3월까지는 거의 매일 비가 내린다. 한국에서 춥긴 해도 해가 잘 나는 겨울을 보내다 온 사람에게 영국의 겨울 날씨는 우울증에 걸리기 딱 좋다. 그러나 편리한 점도 있다. 영국에는 우리나라의 주민등록증처럼 의무적으로 휴대해야 하는 신분증이 없다. 독일이나 스페인 등 대다수의 유럽 대륙국가는 의무적으로 신분증을 휴대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은 미국,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와 마찬가지로 이런 신분증이 없다. 대륙국가와 다른 영국 생활의 한 단면이다. 필자도 영국에서 3년 넘게 살아오면서 경찰의 검문 한 번 당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런 영국 생활의 한 특징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영국 정부가 2013년까지 단계적으로 신분증을 도입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관련 법안도 이번 회기 내에 의회를 통과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의무적 휴대 여부는 차후에 논의
지난달 초 데이비드 블렁킷 내무장관이 의회에서 발표한 신분증 도입과 관련된 법안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2005년부터 여권에 미니칩을 부착, 지문을 수록한다. 시행 성과를 보면서 2007년부터 미니칩을 부착한 새로운 전자여권을 발행한다. 기존의 운전면허증에 지문과 홍채 정보를 기록한 미니칩을 부착해 점차적으로 전자운전면허증으로 바꿔나간다. 영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인적사항을 새로 등록해야 한다. 이런 단계를 거쳐 2013년부터 추가정보를 담은 전자여권과 전자운전면허증을 영국 전역에서 신분증으로 사용하게 되며, 직업을 구하거나 의료적인 치료를 받을 때도 이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신분증 휴대를 법에 규정, 의무적으로 휴대하게 할지 혹은 의무가 아닌 선택사항으로 할지는 차후에 결정될 전망이다. 총선은 빠르면 2005년 봄, 아무리 늦어도 2006년 봄에 치러질 예정이다.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부는 신분증 도입을 이번 회기 내에 우선 처리해야 할 과제로 정했다. 매해 11월 말 여왕이 정부가 상정할 주요 법안을 발표하는 여왕연설(Queen’s Speech)에서도 신분증 도입안이 주요 안건으로 다뤄졌다. 블렁킷 내무장관은 테러, 마약매매, 인신매매 등의 범죄를 저지르는 조직범죄단을 색출하기 위해서, 그리고 불법난민들이 사회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신분증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신분증 도입 법안에 대한 논의가 처음 이뤄진 것은 존 메이저가 보수당 총리로 재직하던 1996년이다. 이어 2001년 9·11 테러 이후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정부가 다시 신분증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소수야당과 인권단체뿐만 아니라 여당인 노동당 내에서조차 반대가 심해 백지화됐다. 그러다가 다시 신분증 도입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제1야당인 보수당이 신분증 도입을 찬성하고 있고 제2야당인 자유민주당과 인권단체 등 일부에서만 이에 반대하고 있어 별다른 일이 없는 한 법안 통과는 무난할 전망이다. 그러나 신분증 도입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우선 인권단체가 반대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들은 테러범이나 조직범죄단을 색출하는 데 신분증이 필요하다는 정부의 논리를 일축한다. 독일이나 스페인처럼 의무적으로 휴대하는 신분증이 있는 나라가 테러범을 제대로 체포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1970년대 중반 당시 서독의 적군파나 스페인에서 분리독립운동을 하던 에타(ETA)의 계속되는 테러를 일례로 들며 신분증을 도입해도 테러범을 색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신분증이 없어도 정부가 시민의 신원을 파악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운전면허증이 있고 신용카드나 여권 등이 신분증 구실을 하고 있는데 왜 굳이 지문을 찍고 홍채정보를 기록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지나친 인권침해라는 것이다. 인권단체인 ‘리버티’의 마크 리틀우드는 “테러범과 조직범죄단을 색출하는 데에는 정부의 현명한 정책이 필요하다”며 “신분증 도입은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을 심각하게 위협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또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300만∼400만명의 성인이 신분증 휴대를 반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제2야당인 자유민주당도 비슷한 이유로 신분증 도입에 반대하고 있다. 자유민주당 내무담당 대변인 마크 오텐은 “신분증을 도입해도 테러범을 색출하지도, 불법적으로 복지혜택을 누리는 이들을 줄이지도 못할 것”이라 전망했다. 그는 “신분증을 만드는 데 소요되는 예상비용이 30억 파운드(6조원)라며, 더 많은 경찰을 충원해 범죄를 예방하는 데 이 비용을 쓰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제1야당인 보수당의 의견은 인권단체나 제2야당의 그것과는 아주 다르다. 보수당은 신분증 도입을 적극 찬성하고 있으며, 이를 의무적으로 휴대케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보수당은 영국에 불법난민이 많이 몰려온다며 정부가 강력한 불법난민 단속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보수당은 한 술 더 떠 난민 신청자들을 대상으로 의무적으로 신체검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6개월 이상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 수가 20만명을 넘는 영국에서는 의료보험제도 개선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의료보험제도 개선을 위해 세금을 인상할 것인지를 놓고 논란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왜 국민 부담이 가중될 수 있는 난민 환자를 받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영국의 ‘자랑스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애국심에 호소하는 보수당다운 발상이다.
집권 노동당 내각에서조차 신분증 도입 문제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차기 노동당 당수를 노리는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은 신분증 도입을 반대한다. 의료보험제도 개선과 공교육제도 개선 등 시급한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왜 논란이 분분한 정책을 또 도입하려 하는가 하는 점과 만만치 않은 추가비용이 반대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블레어 총리는 브라운 장관이나 다른 장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분증 도입을 적극 지지했다. 이라크전쟁이 수렁에 빠지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의료보험이나 공교육 제도 개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국면전환용으로 신분증 도입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고 영국 언론은 분석하고 있다. 경찰의 지지도 블레어 총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신분증 도입안이 논의될 때 경찰은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신분증 도입으로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의 이미지가 실추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내에서 테러 혐의자가 연이어 체포돼 수사할 필요성을 느끼다 보니 경찰도 신분증 도입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설사 이번 회기 내에 신분증 도입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아직까지 적지 않은 수의 시민이 이에 반대하고 있어 실행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시행착오가 발생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블레어 총리가 이라크전쟁으로 떨어진 인기를 만회하기 위한 국면전환용으로 신분증 도입을 추진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신분증 도입안은 보수당 시절의 정책제안까지 포함해 ‘삼수’ 끝에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르렀다. 신분증 도입 추진 과정에서 보듯이 영국은 정책 추진 과정에서 여론을 듣고 여론이 반대하면 정책 추진을 연기한다. 여론을 경청하며 점진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점은 `‘밀어붙이기식’ 정책이 자주 문제가 되는 한국 정가가 배워야 할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