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이오시프 스탈린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 [The New European]
우크라이나 침공 반대 국민 대거 체포
러시아 국민 중 상당수는 이런 악행에도 스탈린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승리하고 소련을 초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은 위대한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스탈린을 옹호하며 국민의 반(反)서방 정서를 부추기는 데 자주 동원해왔다. 푸틴 대통령은 “서방이 스탈린을 지나치게 악마화하는 것은 러시아를 공격하려는 음모”라고 주장하기도 했다.푸틴 대통령이 자신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고 반전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스탈린을 소환하고 있다. 그는 3월 16일 모스크바 인근 노보오가료보 관저에서 가진 화상 각료회의에 참석해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하는 자국 국민을 ‘제5열’이라고 부르면서 “이들은 서방 이익에 비굴하게 부응하고, 자신의 어머니를 팔 준비가 돼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또 “서방이 일부 반역자를 동원해 러시아를 파괴하려는 음모를 펼치고 있다”며 “진정한 국민이라면 민족 쓰레기들을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국민은 언제나 진정한 애국자가 누구인지 분간할 것”이라며 “쓰레기이자 배신자들은 우연히 입에 들어간 각다귀를 뱉어내는 것처럼 쉽게 축출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이 이처럼 스탈린이 사용했던 용어까지 동원해 과격한 표현으로 자국민을 비판한 의도는 앞으로 더 강력한 내부 단속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의 이 발언 이후 러시아 연방수사위원회는 국가 반역자를 색출하는 첫 번째 사례로 인터넷 블로그에 러시아군과 관련된 허위 사실을 기재했다는 혐의로 요리책 저자이자 인기 블로거인 니카 벨로체르코브스카야 등 3명을 기소했다. 러시아 의회는 3월 4일 러시아군과 관련된 허위 정보를 유포하거나 해당 허위 정보로 러시아에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했을 경우 이를 처벌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푸틴 대통령은 즉시 서명했다. 이른바 ‘가짜뉴스 금지법’으로 불리는 이 법을 어기면 최대 150만 루블(약 1860만 원) 벌금이나 최소 징역 3년, 최대 15년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이 법에 따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침공’이나 ‘전쟁’이 아닌 ‘특별 군사작전’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전쟁 반대’ 등 시위를 벌이는 것도 처벌받는다. 러시아군의 작전 차질과 전사자 및 민간인 죽음 등을 보도하는 언론인은 최소 3년형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따라 러시아 연방수사위원회는 이 법을 위반한 언론인과 블로거는 물론, 일반 국민을 대거 체포해 기소하거나 벌금형을 내리고 있다. 실제로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시에서 한 여성이 블라디미르 레닌 동상 앞에 쌓인 눈에 ‘전쟁 반대’라고 글씨를 쓰고 하트 모양을 그려넣은 것 때문에 벌금형에 처해졌다. 블라디미르주 카라바노보시 정교회에서 한 신부는 반전 내용의 설교를 했다 구속기소됐다. 3월 14일 ‘전쟁 안 돼(NO WAR)’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저녁 뉴스 생방송 현장에 뛰어든 국영TV 채널1 제작자 마리나 오브샤니코바도 3만 루블(약 37만 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계엄령 선포, 남성 강제징집 소문
러시아 경찰들이 모스크바에서 반전 시위를 벌이는 여성을 연행하고 있다. [TASS]
이 때문에 러시아에 주재해온 서방 언론도 대거 보도 활동을 중단하고 있다. 미국 CNN과 블룸버그통신, 영국 BBC, 독일 ARD와 ZDF, 이탈리아 RAI, 캐나다 CBC 등 서방 언론이 잇따라 러시아에서 보도 활동을 일시 중단하고 특파원들과 기자들을 철수시키고 있다. 스페인 뉴스통신사 EFE는 1970년 모스크바에 상설 사무소를 개소한 이래 처음 러시아에서 언론 보도 활동을 중단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도 1921년 이후 처음으로 상주 기자들을 러시아에서 전원 철수시켰다. 닐 맥파퀴아 전 NYT 모스크바 지국장은 “스탈린도, 냉전도 우리를 몰아내지 못했었다”면서 푸틴 대통령의 가혹한 언론 통제를 비판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모스크바 특파원들이 작성한 일부 기사에서 기자 이름과 날짜를 없애고 있다.
러시아 국민도 푸틴 대통령의 ‘공포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를 탈출하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최근 러시아를 떠난 사람이 최대 20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지아 2만5000명, 핀란드 4만4000명, 이스라엘 1400명 등 러시아를 떠난 수를 바탕으로 간접 추산한 수치다. 이들이 엑소더스를 선택한 이유는 사실상 스탈린 체제 부활에 따라 러시아에서 더는 살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전문직 종사자, 부유층, 언론인, 시민활동가, 문화계 인사 등이다. 러시아 최고 발레리나로 평가받는 볼쇼이 발레단의 올가 스미노바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판한 후 러시아를 탈출해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러시아 국영 언론사의 일부 기자도 푸틴 정권의 ‘나팔수’가 되지 않겠다며 외국으로 탈출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푸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남성들을 강제징집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러시아 국민의 엑소더스 속도가 빨라졌다”며 “크렘린궁의 부인에도 소문이 계속 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NBC는 “푸틴 정권 아래 ‘신(新)철의 장막’을 우려하는 러시아 국민이 앞으로 더 강화될 탄압을 피해 외국으로 떠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푸틴, 자국민에 학살 행위 자행 가능성 있다”
러시아 모스크바 루비안카 광장에 위치한 연방보안국(FSB) 본부. [위키피디아]
WSJ는 “푸틴 대통령이 잠재적 반역자를 처리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반대 의견을 가진 인물들을 더욱 철저히 감시하라는 암묵적인 지시를 내렸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CNN도 “우크라이나에서 좌절을 겪고 있는 푸틴 대통령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국민을 탄압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가 스탈린화하고 있다”면서 “푸틴 대통령이 이번 전쟁에서 보여주는 폭력성을 볼 때 추후 자국민에게도 전쟁 범죄에 준하는 학살 행위를 자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스탈린은 31년간 통치하면서 제정 러시아의 차르(황제) 시대를 제외하고 최장기 집권 기록을 세웠다. 2000년 첫 당선 이후 지금까지 네 번째 대통령직을 맡고 있는 푸틴 대통령은 내심 스탈린 기록을 깨기를 바라고 있다. 2020년 7월 개헌을 통해 2036년까지 집권 발판을 마련한 그가 ‘공포 통치’에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이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36년간 통치하면 명실공히 ‘21세기 스탈린’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