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샤산 모래언덕.
호텔 식당에서 풍성하게 차려낸 아침을 먹고 모가오굴(莫高窟)로 향했다. 모가오굴은 둔황에서 동남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밍샤산의 동쪽 절벽에 검은 점처럼 보이는 무수한 동굴들이다. 석굴들은 실크로드의 여로에 사연이 얽힌 사람들이 기도를 하거나 승려들이 안거로 사용하던 작은 사원이었다.
처음으로 이곳에 굴을 만든 사람은 전진(前秦) 때 승려로 활동했던 낙준이다. 서기 366년 수행처를 찾다가 이 부근에 이른 낙준은 석양에 반짝이는 절벽에서 수천의 황금색 부처를 목격하고 계시를 받았다. 낙준은 부유하고 신심이 깊은 한 순례자에게 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귀향하려면 석굴사원을 지어 봉양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원나라 때까지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하나 둘씩 굴이 더해졌고, 지금은 550여 개의 석굴이 남아 있다.
유럽·일본 탐험가들 방대한 유물 자국으로 가져가
굴 내부에는 벽화와 조각들의 향연이 찬란하게 이어졌다. 둔황의 지리적 위치도 영향을 미쳤는데, 서역 북도와 남도가 만나는 만큼 오아시스로를 이용하는 여행자들은 모두 이곳을 지났다.
둔황의 모가오굴은 유럽 탐험가들의 마지막 각축장이었다. 영국의 오렐 스타인은 헝가리 지리학자 로치 라요시에게서 둔황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오랫동안 동경했다. 1907년 3월 실크로드를 두 번째 방문하면서 드디어 둔황에 도착한 그는 석굴사원의 수호자로 자청하는 왕원록(王圓錄)이란 도사가 몇 해 전 방대한 고문서를 발견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스타인은 주요 석굴을 측량하고 벽화를 촬영하고 싶다며 왕 도사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스타인 일행이 고사본 몇 권을 구입하고 싶어하는 뜻을 내비친 순간 왕 도사가 경계했다. 스타인은 두 가지 전략을 세웠다. 우선 도사의 사원 복원사업에 정중하면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런 뒤 도사와 어느 정도 친밀해지자, 많은 중국인들에게서 사랑받고 있는 현장이 자신의 수호성자라고 말하며 환심을 샀다. 마침내 문제의 석굴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스타인은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무질서하게 빼곡이 쌓여 있는 두루마리 필사본들의 높이가 왕 도사의 어둑한 램프 불빛 아래서 거의 3m에 달해 보였으며, 방 안 가득 차 있는 그것들의 부피는 나중에 측정해본 결과 약 150m3에 육박했다.”
그 밀실에서 중국어, 산스크리트어, 소그드어, 티베트어, 룬툰르크어, 위구르어를 비롯해 미지의 문자들이 수도 없이 쏟아졌다. 불교 회화들도 풍부하게 나왔다. 스타인은 약간의 돈을 지불하고 필사본 24상자, 회화와 자수품 등 미술품 5상자를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다. 낙타 40마리가 동원됐다. 스타인이 가져온 고문서는 완전한 것이 7000여 권, 일부만 남은 것이 6000여 권에 달했다. 완전한 작품의 목록을 만드는 데 반세기가 걸렸다.
스타인의 뒤를 이어 프랑스인 폴 펠리오도 둔황으로 가서 왕 도사를 찾았다. 12개 언어를 구사한 펠리오는 유창한 중국어 실력으로 왕 도사를 설득해 쉽게 비밀의 동굴에 들어갈 수 있었다. 뒤늦게 유물 경쟁에 뛰어들긴 했지만 동굴에 남은 보물은 많았다. 그도 동굴에 가득 쌓인 필사본들에 넋을 잃었다. 그는 스타인이 필사본들을 가져간 덕분에 생긴 비좁은 공간에서 3주일을 보냈다. 쪼그리고 앉아 촛불에 의지해 중요한 문서들을 쉴 새 없이 골라냈다. 그리고 왕 도사를 설득해 약 90파운드를 내고 문서를 가져가는 데 성공했다. 그 문서들은 현재 파리의 루브르박물관과 기메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910년 청나라 정부가 뒤늦게 둔황에 남아 있던 고서 5000~6000권을 베이징으로 옮겼으나, 1912년 2월에는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왕 도사가 숨겨뒀던 남은 서적 중 500여 권의 사본을 가져갔다. 오타니 컬렉션 중 일부는 지금 우리 국립중앙박물관 창고에도 있다.
관광객이라곤 전혀 없는 겨울의 모가오굴에 도착했다. 우리를 맞은 사람은 왕 도사 대신 리신(李新)이라는 이름을 가진 연구원이었다. 한족인 그는 둔황 민속학회와 한국둔황학연구회 회원으로 우리말을 할 줄 알았다. 정수일 선생과 안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권위 있는 실크로드 학자로 정 선생을 존경하고 있는 눈치였다. 리 연구원은 정수일에 대한 예우의 표시라는 듯 아예 석굴의 열쇠뭉치를 들고 나섰다. 조만간 폐쇄될 예정인 동굴은 물론, 보통 관광객들이 볼 수 없는 석굴들까지 일일이 챙겨 열어주었다.
처음 들어간 굴은 17호 굴이었다. 16호 굴로 들어서면서 오른쪽 벽으로 다시 파서 만든 굴이다. 스타인과 펠리오가 엄청난 고문서를 가져간 바로 그 굴이다. 일명 장경동(藏經洞)이라고도 부른다. 막상 굴에 들어가려니 오랫동안 말로만 들어오던 모가오굴, 그중에서도 장경동을 직접 본다는 생각에 긴장이 됐다. 하지만 굴이 비어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니 허탈하기도 했다.
① 밍샤산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② 둔황석굴 중 모가오굴의 입구. ③ 둔황석굴을 떠나며 포즈를 취한 필자. ④ 해맑은 표정의 엘라메 소녀들. 엘라메는 호탄 지역 인근에 있는 소읍이다. ⑤ 멀리서 바라본 둔황석굴.
밍샤산으로 가다 본 드넓고 황량한 소금바다와 사차바자르 시장에서 만난 행상들(오른쪽).
석굴을 순례하면서 여러 형태의 비천상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비천상이란 신라의 에밀레종에나 새겨져 있는 것인 줄 알고 있었다. 세종문화회관 정면에 커다랗게 부조된 비천상도 전통적인 아름다움의 상징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 비천상이 그리스에서 시작돼 고구려까지 건너왔다는 사실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428호 굴에는 전라의 비천상도 있었다. 허리를 뒤로 한껏 젖힌 모양을 하고 있던 비천상은 수말 당초에 와서 일자로 펴졌다. 우리 땅에 남아 있는 것도 서쪽과 동쪽의 문화가 섞이면서 다양하게 변천한 비천상의 한 형태다.
서위 시대에 조성된 249호 굴에서 수렵도를 발견했을 때는 더 놀랐다.
“고구려인의 기상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그림이 왜 여기 있지? 학교에 다닐 때도 저 수렵도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배운 기억이 없는데?”
말을 타고 달리면서 뒤를 향해 활을 쏘는 동작, 산의 기세, 도망치는 동물의 광경이 내가 알던 고구려의 수렵도와 너무 비슷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모두 뒤져보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 둔황 미술이 고구려로 전해졌던 것이다.
문화의 전파와 교류의 흔적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말로만 듣던 것과는 전혀 다른 충격을 주었다. 우리가 서역으로부터 받은 영향뿐 아니라 그리스, 인도, 중국의 양식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둔황석굴 안에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문화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다. 외부 문화를 우리에게 맞게 수용하면 그것 또한 보존하고 존중해야 하는 우리 것임을 그제야 가슴으로 느꼈다. 위구르 지역을 오래전부터 다녀온 가이드 강상훈 씨도 처음 이 지역을 왔을 때 중국인들이 자기네 문화라고 자랑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이민족이나 다른 국가의 것을 받아들여 변용한 것임을 알고 놀랐다고 했다. 물론 이곳 둔황석굴 역시 교류의 흔적만이 아닌 둔황 고유의 문화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둔황석굴에는 신라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펠리오가 찾아낸 문서 중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들어 있지 않았던가. 61호 굴 안에는 산시성에 있는 오대산의 축소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림에 표시된 깃발 하나에 ‘신라○탑’이라는 글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정 선생의 40년 전 기억에 의하면, 퇴색되기 전에는 ‘신라승탑(新羅僧塔)’으로 또렷이 읽혔다고 했다. 이런 흔적들은 혜초가 오대산의 건원보리사에서 입적한 사실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332호 굴, 237호 굴에서는 조우관이나 화랑모를 쓴 왕자를 발견할 수 있는데, 역시 신라인의 모습이었다.
실크로드의 동쪽 종점은 시안이 아니라 신라의 경주라는 정수일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이밖에도 많다. 역시 둔황석굴에서 발견된 ‘오대산찬(五臺山讚)’을 읽어보자. 18수의 사(詞) 중 제5수는 이렇다.
출렁이는 바닷물 끝이 없는데 신라의 왕자가 배 타고 왔다.백골 됨 겁내지 않고 고향 멀리 떠나서 만 리 길 신심 지니고 오대산에 예불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