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는 2006년 WBC에서 쟁쟁한 메이저리거들이 포진한 도미니카·베네수엘라 등을 물리치고 준우승을 차지했다. 3월18일 도미니카와의 준결승전에서 승리한 뒤 기뻐하고 있는 쿠바 선수들.
오래된 이야기지만 쿠바엔 미국 마이너리그 야구팀도 있었다. MLB 신시내티는 1950년대까지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슈거 킹스(Sugar Kings)란 마이너리그 팀을 운영하며 재능 있는 선수들을 발굴, 공급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처럼 미국과 쿠바는 역사적으로 야구 교류가 무척 활발했다. 100년 가까이 야구를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쿠바에 야구가 처음 도입된 것은 1864년으로 스페인의 통치를 받을 때였다. 쿠바는 미국이 프로야구를 출범시킨 뒤 2년 후인 1866년에 프로리그를 창설한다. 이처럼 거의 동시에 프로야구를 만들다 보니 미국과 쿠바, 양국 야구선수들의 교류는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쿠바가 겨울 리그를 진행하자 여름엔 미국에서, 겨울엔 쿠바에서 뛰는 미국 선수들도 많았다.
특히 MLB가 1947년 첫 흑인 출신 메이저리거인 재키 로빈슨(다저스)과 계약을 승인하기까지 백인리그-흑인리그로 나뉘어 운영됐던 것과 달리, 쿠바는 1900년부터 야구에서 인종차별을 없앴기 때문에 재능 있는 많은 미국 흑인 선수들이 쿠바로 날아가 경기를 했다. 이사이 쿠바의 많은 선수들도 미국에서 뛰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백인’ 쿠바인들은 MLB에서 뛴 반면 ‘흑인’ 쿠바인들은 흑인리그(니그로 리그-흑인들로만 구성된 야구 프로리그)에서 뛰었다는 점이다.
1947년 재키 로빈슨의 계약과 함께 미국 야구에서 인종차별 논란이 끝을 맺자 많은 MLB 스카우터들은 재능 있는 쿠바 선수 영입에 더 열을 올려 많은 쿠바 선수들이 미국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카스트로 집권 전에는 선수 간 교류 활발
상황이 급변한 계기는 1959년 사회주의 계열의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카스트로는 1961년 프로리그를 없앴고 쿠바 야구선수들은 ‘조국에 남느냐, 미국으로 가느냐(망명)’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이때 망명한 선수들은 아직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또 신시내티도 1960년 쿠바에서 운영하던 마이너리그 팀을 철수했다.
카스트로는 프로야구를 접은 대신 아마추어 스포츠에 대대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1961년 국가 스포츠 프로그램을 만들어 야구뿐만 아니라 배구, 복싱 등 아마추어 종목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했다. 당연히 프로급 아마추어 선수가 포진한 쿠바 야구는 각종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싹쓸이해 갔고, 무적 쿠바의 신화를 쌓아갈 수 있었다.
상황이 다시 바뀐 것은 1990년 구소련의 붕괴로 경제교역이 끊기자 쿠바 경제가 더욱 피폐해지면서부터다. 더욱이 선수들에게 주어지던 혜택도 대폭 줄자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선수들은 동요했고, 1991년 첫 망명자가 나온 이후 망명자가 줄을 이었다. 2000년엔 쿠바의 간판 투수인 올랜드 에르난데스가 제3국을 통해 미국으로 망명, 양키스에 입단해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90년대 후반 이후에만 20명이 넘는 쿠바 선수들이 MLB에 합류했다.
100여 년간 함께 활발한 야구 교류를 해오다 사회주의 정권 출범과 함께 단절돼야 했던 미국과 쿠바 야구. 이것은 스포츠가 정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