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사모시르 섬 풍경.
오랑우탄 재활센터가 있는 부킷라왕, 쓰나미 피해 이전에는 뛰어난 풍광을 자랑했던 니아스 섬, 살아 있는 화산을 트레킹할 수 있는 브라스타기, 동남아 최대의 토바 호수, 아름다운 마닌자우 호수…. 이처럼 수마트라의 ‘대표선수’들은 대부분 천혜 자연이 뛰어난 곳들이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건너가 항공편으로 수마트라의 관문 격인 메단으로 날아갔다. 저가 항공기가 쿠알라룸푸르-메단 간을 오가는 덕분에 왕복 요금으로 약 7만원밖에 들지 않는다. 다만 비행기 연결 시간 차이로 공항에서 노숙(?)해야 하는 것이 단점.
지붕에도 사람을 태우는 메단행 버스.
토바 호수에 가기 위해 메단에서 기차를 타고 시안타 역에서 내렸다. 시내버스 안에서 한 아주머니가 내게 묻는다. “스위스 사람?” 허걱. 배낭여행 생활 10년 동안 이런 황당한 질문은 처음이다. 그만큼 수마트라는 외국인이 적은 곳이다. 하지만 외국인을 ‘봉’으로 여기며 바가지 씌우려는 사람도 많다. 바가지요금을 거절하자 화를 내며 버스에서 내리라는 운전자도 있었으니까. 이런 경향은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보다 심한 편이었다.
시안타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을 달려 토바 호숫가에 위치한 파라팟에 닿는다. 다시 1시간 정도 배를 타고 사모시르 섬으로 들어간다. 토바 호수는 10만 년 전 화산 폭발로 생성된 칼데라호로 면적이 서울시의 3배에 달할 정도로 크다. 그 한가운데에 싱가포르만한 사모시르 섬이 버티고 있다.
대부분 원시 열대우림 … 화산·호수 등 뛰어난 볼거리
사모시르 섬은 그야말로 배낭여행자들의 천국이다.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운 풍광, 해발 800m라서 열대임에도 덥지 않은 기후, 평화로운 분위기, 거기에 싼 물가까지. 특히 툭툭 지역에 밀집해 있는 숙소들은 가격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커튼만 열면 창문 밖으로 야자수가 드리워진 푸른 호수가 바로 코앞에서 펼쳐지는 방갈로(온수 시설까지 있다!) 요금이 우리 돈으로 하루 단돈 2500원이다.
① 시바약산 정상 풍경. ② 바탁족 전통가옥(사모시르 섬). ③ 손님을 기다리는 짐꾼(브라스타기 시장).
산 중턱에 위치한 팡우루란 온천은 계곡에서 떨어지는 물을 직접 받아 쓴다. 100% 원탕이다. 온천수가 부족해 다른 물을 섞는 우리나라나 일본의 온천과는 차원이 다르다. 문제는 노천온천이라 내리쬐는 뙤약볕을 머리로 받으며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가야 한다는 것. 아래, 위로 달아오르니 오래 버티기가 쉽지 않다(주의! 나체주의자가 아니라면 수영복을 꼭 챙길 것).
온천욕을 마치고 섬 일주를 할 생각으로 섬의 남쪽 끝에서 산길로 접어들었다가 낭패를 보았다. 산길에서 길을 잃었는데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해는 떨어지고 허기진 데다 젖은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다행히 현지인을 만나 그의 집으로 갔기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부부와 두 남매가 함께 사는 목조가옥인데,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려워 보였다. 식사는 작은 라면 한 봉지에 물을 많이 붓고 배추, 고추를 썰어 넣어 소금으로 간을 해서 수프를 만든 뒤 그것을 밥에 부어 먹는 게 전부다. 그래도 손님이 왔다고 막걸리 같은 술을 내온다. 다음 날 그 가족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숙소로 돌아오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우리가 사고로 죽거나 크게 다쳤는 줄 알았다나.
사모시르 섬에서 다음 목적지인 브라스타기까지는 버스로 8시간 정도 걸렸다. 브라스타기는 중앙도로를 따라 15분 정도면 끝에서 끝까지 걸을 수 있는 작은 도시. 그래도 도시라고 사모시르 섬에 비해 시끄럽고 공기도 좋지 않다. 대신 브라스타기에는 먹는 즐거움이 있다. 망고스틴 같은 과일도 팔고, 미트볼이 든 미박소(인도네시아 국수), 바나나튀김 등 맛있는 군것질거리도 있다. 포장마차에 갔는데, 그곳에서 파는 꼬치구이와 야채수프 맛이 훌륭해 저녁식사 대용으로도 적당했다.
시내 한가운데에는 재래시장이 있는데 이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어 둘러볼 만하다. 상인들 중에는 ‘쫛쫛유치원’ ‘쫛쫛학원’ 등의 한글이 쓰인 가방 따위 물건을 파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우리가 쉽게 버리는 것들이 여기서는 쓸모 있는 물건으로 팔리는가 보다.
여행자들이 브라스타기에 들르는 이유는 시바약산을 오르기 위해서다. 시바약산은 높이 2094m에 달하는 활화산이지만 출발지인 브라스타기의 고도가 해발 1300m인 데다 길이 잘 나 있어 큰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다. 다만 종종 강도가 나타나 여행자들 물건을 빼앗는다고 하니 동행자를 구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우리는 운 좋게도 오르는 길에서 현지인을 만나 동행했다.
물감을 푼 것처럼 파란 하늘 아래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3시간쯤 걷자 정상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밀림이 황량한 풍광으로 바뀌고, 서 있기가 힘들 정도로 거센 바람과 유황 냄새, 제트기 엔진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서 분출되는 수증기 기둥이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마치 외계 행성에 와 있는 듯한 느낌. 재미있었던 것은 분화구 자리로 추정되는 곳의 평평한 바닥에 연인들이 돌을 모아 만든 사랑의 표식이 가득했다는 점이다. 뜨거운 용암은 식지만, 뜨거운 사랑의 맹세는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걸까.
브라스타기에서 이틀을 보내고 버스를 타고 메단으로 돌아왔다. 메단까지는 2시간 정도로 비교적 가까운 거리다. 고도가 낮아지면서 수마트라의 후텁지근한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내로 들어오니 더위와 매연, 가난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드리워져 있었다. 사람들도 그리 친절하지 않다. 가져온 정보를 뒤적여 보니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회교사원이 있다는데 더위를 뚫고 다녀올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부분 여행자들이 그러하듯 메단은 그냥 스쳐 지나가도 좋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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