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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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 등장한 레저문화의 빛

이미지로 논술 읽기 ⑤

  • 이주헌 미술평론가

    입력2006-04-24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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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사에 등장한 레저문화의 빛

    드가, ‘경마장, 발코니에서’, 1866~68, 캔버스에 유채, 46×61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주 5일제 근무가 정착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레저 문화의 중요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일반 시민계층이 레저를 즐기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서양의 경우 19세기 중반 이후에야 중간계급의 여가생활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으로 절대 빈곤이 사라지고 시민혁명으로 신분제 질서가 무너지면서 비로소 여가생활이 보편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1863년 여행업자 토머스 쿡이 스위스에서 첫 번째 패키지여행을 조직하고 여행자수표를 고안한 것은, 그 시대적 변화를 알리는 초기의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미술 역시 이 무렵부터 레저와 스포츠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철도망이 형성되면서 일상화된 피크닉, 선상 파티, 야외 무도회 등 행락 풍경에서부터 사이클링, 테니스, 승마 등 스포츠 풍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여가문화의 표정이 화폭을 수놓았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일상적인 풍경화조차 이 무렵부터는 도시 행락객의 시선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고대의 향수가 어린 이상적인 고전 풍경도 아니요, 농촌 생활인들의 생활 정서가 담긴 사실주의 풍경도 아닌, 찰나와 스쳐 지나감, 그리고 즐김에서 오는 여유와 넉넉함이 배인 감각적인 풍경화가 양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레저 생활을 그린 그림들은 무엇보다 이런 찰나와 여유의 미학을 또렷이 반영하고 있다.

    신분제 무너진 19세기 중반 이후 여가 보편화

    인상파의 대부 드가는 ‘경마장, 발코니에서’(1866~68)라는 레저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렸다. 경주가 열리기에 앞서 기수들이 여유 있게 트랙 주위를 서성이는 모습을 포착한 그림이다. 맑은 날에는 눈이 시려 야외 풍경을 잘 그리지 않았던 드가가 드물게 그린 현장 스케치로, 부유층 출신 화가답게 말에 대한 애착을 섬세한 필치로 표현했다.

    땅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로 보아 시간은 꽤 늦은 오후인 것 같다. 가만히 걷거나 뛰는 말의 모습이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그가 단순히 뛰어난 관찰자였을 뿐 아니라, 말을 촬영한 사진을 그림 그리는 데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다. 경기가 열리기 전이어서 아직 느긋해 보이는 기수들에게서 정중동(靜中動)의 미묘한 기운이 전해져온다. 멀리 갤러리 사람들도 삼삼오오 무리를 이뤄 한가롭게 여가를 즐기고 있다.



    레저 문화는 기본적으로 일과 놀이가 분리됨으로써 나타난 현상이다. 일과 놀이가 한데 어우러져 있던 근대 이전에는 아무 근심 없이 오로지 노는 데에만 전력투구하는, 그것도 매우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놀며 돈과 시간을 소비하는 현상은 흔하지 않았다. 지금 드가의 경마장을 뒤덮은 한낮의 황금빛은 바로 레저가 생활문화로 확고하게 뿌리내린 시대와 그 시대를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하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화가 토머스 에이킨스가 그린 ‘경주하는 비글린 형제’(1872)에서도 우리는 레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근대의 인간을 본다. 이 미국인 형제는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물론 노를 젓는 것이 그들의 직업은 아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해왔고 그로 인해 생긴 시간적, 물질적 여유를 보트 경주에 쏟아 붓고 있다. 그림 하단에 보이는 다른 배의 뱃머리는 지금 이 경기가 매우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기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그림 속의 형제에게서 우리는 힘과 열정, 용기 그리고 삶을 향한 긍정적인 의지를 본다. 바로 그렇게 여유를 즐길 줄 아는 데서 그들과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떠나 같은 종족이 되는 것이다.

    미술사에 등장한 레저문화의 빛

    에이킨스, ‘경주하는 비글린 형제’, 1872, 캔버스에 유채, 61×91cm, 워싱턴 내셔널갤러리.

    근대의 레저는 이처럼 단순히 일로부터 풀려나거나 스스로를 게으르게 방기하는 일에 머물지 않고 자신 안의 에너지와 정열을 최대치로 발산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자아 발견의 기회를 제공한다. 여가 활동은 직업 못지않게 자신을 투자할 대상이 되고 삶의 의미를 튼튼히 지탱해주는 수단이 된다.

    밝고 화사한 색채로 레저의 여유 표현

    오늘날 올림픽 경기가 상업화되어 그 의미가 반감된 느낌이 없지 않으나 진정한 올림픽 정신은 스포츠를 통해 이처럼 순수한 정신과 열정을 고양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근대 올림픽의 정신은 바로 근대의 레저 문화가 낳은 아름다운 성취와 상통하는 것이라 하겠다.

    성적 구분의 측면에서 보면, 레저 문화의 활성화는 여성들에게도 스포츠를 즐길 기회를 좀더 많이 제공했다. 영국의 경우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여성들은 주로 활쏘기나 스케이트, 크로케 등을 즐겼다. 그러나 1870년대 론테니스가 시작되면서 여성들도 남성 못지않게 활동적인 운동을 즐기게 됐다. 론테니스의 창시자로 알려진 존 윙필드는 얼음판에서처럼 잔디 위에서도 여성과 노약자들이 즐길 수 있는 운동이 없을까 고민하던 끝에 이 게임을 고안했다고 한다.

    미술사에 등장한 레저문화의 빛

    레이버리, ‘테니스 파티’, 1886, 캔버스에 유채, 77×183.5cm, 애버딘 미술관.

    영국 화가 존 레이버리가 그린 ‘테니스 파티’(1886)는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진 잔디밭에서 남녀가 한데 어우러져 테니스를 즐기는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남성들의 복장은 그렇다 쳐도 여성들의 다소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드레스는 운동에 꽤 지장을 주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림 속의 여인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운동에 몰입하고 있다. 이렇듯 탁 트인 공간에서 격렬하게 몸을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당시의 젊은 여성들에게는 커다란 해방감을 가져다주는 드문 기회였을 것이다. 그들은 이런 격렬한 운동을 통해 건강을 도모할 뿐 아니라 전통사회에서 억눌려왔던 여성의 잠재력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패션과 스타일은 기본적으로 여성의 활동에 맞게 변하게 마련이고, 그 변화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나 지위에 대한 의식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한 시대의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레저와 스포츠 활동에 나서게 됐다는 것은 그들에게 더 많은 활동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를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갔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레저 문화는 이처럼 근대인들의 삶과 의식, 활동에 두루 밝고 긍정적인 색채를 더해주었다. 미술은 그 밝음과 자유로움을 영원한 이미지로 고정시켰다. 시대의 자녀로서 미술가들 역시 레저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대의 축복을 나눠 가졌고, 그에 대한 기쁨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가는 이 무렵의 그림이 이전 어느 시기 그림보다 밝고 화사하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인간의 행복에서 여가가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이 그림들로부터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다.

    논술 전문출판 ‘늘품미디어’가 제공하는 ‘생각 넓히기’

    ①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기계문명의 발전은 생산력의 비약적 증대를 가져왔고, 생산력의 발전은 여가생활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그러면 과연 기술은 인간은 자유를 증대시키는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해보자.

    ② 여가생활이 진정한 자아 발견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필자의 말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③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여가활동과 달리 노동은 고통스럽고, 자아 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자신의 의견과 그 근거를 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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