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최초고용계획(CPE)이 마침내 철회됐다. 젊은이들의 반발이 가장 큰 이유가 됐지만, 이 제도는 도입 과정에서부터 지극히 ‘프랑스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추진돼 태생적으로 실패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그럼 ‘프랑스적’이란 것은 과연 무엇인가. 프랑스 시위 사태를 전한 상당수 언론은 ‘프랑스적’인 것을 ‘나태’ ‘시대착오적’ ‘낙후된 국제경쟁력’ 등과 동의어로 정의해왔다. 정말로 그런지 따져볼 필요가 있겠지만, 이런 것들과는 또 다른 ‘프랑스적인’ 특징을 알아야 이번 사태의 성격을 더욱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영화 ‘히든’은 지식인의 이중성을 다룬 작품인데 이 영화에서 흥미를 끈 것 중 하나가 주인공의 직업이다. 주인공 조르주는 방송사에서 지적인 대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회자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직업을 가진 그에게 팬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다. 프랑스 영화에는 이를테면 이런 지적인 직업들이 많이 등장한다. ‘책 읽어주는 여자’에 나오는 책을 읽어주는 직업이란 것도 참 생소하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프랑스적’인 직업일 듯하다.
이런 생소한 느낌은, 그러나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하고 장수한 프로그램 중 하나가 독서 프로그램이란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부이용 드 퀼튀르(문화의 용광로)’라는 서평 프로그램의 사회자 베르나르 피보가 2002년 프랑스의 대형 서점에서 마지막 방송을 했을 때 언론 등에서는 ‘국가적 슬픔’이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프로가 모든 계층에게 골고루 인기를 끌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의 대학 수학능력시험에 해당하는 바칼로레아의 철학 문제가 공개되면, 온 사회가 수험생이라도 된 것처럼 답안을 쓰느라 토론하고 낑낑대는 장면을 보노라면, 왜 프랑스에서 사르트르와 부르디외, 푸코 같은 철학자들이 연예인 못지않게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지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의 도도한 문화적 자존심은 바로 이런 데서 나온다.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국제회의장에서 자국 대표가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로 연설하는 것에 흥분해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는 최근 에피소드에서도 이런 자존심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CPE 도입의 실패 이유가 드러난다. 이를 추진한 빌팽 총리가 이렇다 할 토론 한 번 없이 밀어붙이기 식으로 추진하는 바람에, 토론을 좋아하는 프랑스적 풍토에서 반발을 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CPE의 좌초가 프랑스 사회의 시대착오성을 보여준 것이라는 일반적 평가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프랑스적인 것의 승리라고 하는 편이 더 옳지 않을까.
영어에서 ‘프렌치(French)’가 들어가는 어휘는 대체로 낭만적이고 귀족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몇 년 전에 ‘프렌치 키스’라는 영화가 소개된 적이 있다. 영화 제목인 프렌치 키스는 혀를 상대방 입 속으로 밀어넣는 깊고 달콤한 키스를 뜻한다. 이렇게 ‘프렌치’라는 말 속에는 낭만적이지만 한편으론 놀기 좋아하고, 사랑 타령에 빠져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겹쳐 있다. 그러나 프렌치는 - ‘프랑스적’인 것은 -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걸 이번 CPE 사태는 보여주고 있다.
그럼 ‘프랑스적’이란 것은 과연 무엇인가. 프랑스 시위 사태를 전한 상당수 언론은 ‘프랑스적’인 것을 ‘나태’ ‘시대착오적’ ‘낙후된 국제경쟁력’ 등과 동의어로 정의해왔다. 정말로 그런지 따져볼 필요가 있겠지만, 이런 것들과는 또 다른 ‘프랑스적인’ 특징을 알아야 이번 사태의 성격을 더욱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영화 ‘히든’은 지식인의 이중성을 다룬 작품인데 이 영화에서 흥미를 끈 것 중 하나가 주인공의 직업이다. 주인공 조르주는 방송사에서 지적인 대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회자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직업을 가진 그에게 팬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다. 프랑스 영화에는 이를테면 이런 지적인 직업들이 많이 등장한다. ‘책 읽어주는 여자’에 나오는 책을 읽어주는 직업이란 것도 참 생소하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프랑스적’인 직업일 듯하다.
이런 생소한 느낌은, 그러나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하고 장수한 프로그램 중 하나가 독서 프로그램이란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부이용 드 퀼튀르(문화의 용광로)’라는 서평 프로그램의 사회자 베르나르 피보가 2002년 프랑스의 대형 서점에서 마지막 방송을 했을 때 언론 등에서는 ‘국가적 슬픔’이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프로가 모든 계층에게 골고루 인기를 끌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의 대학 수학능력시험에 해당하는 바칼로레아의 철학 문제가 공개되면, 온 사회가 수험생이라도 된 것처럼 답안을 쓰느라 토론하고 낑낑대는 장면을 보노라면, 왜 프랑스에서 사르트르와 부르디외, 푸코 같은 철학자들이 연예인 못지않게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지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의 도도한 문화적 자존심은 바로 이런 데서 나온다.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국제회의장에서 자국 대표가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로 연설하는 것에 흥분해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는 최근 에피소드에서도 이런 자존심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CPE 도입의 실패 이유가 드러난다. 이를 추진한 빌팽 총리가 이렇다 할 토론 한 번 없이 밀어붙이기 식으로 추진하는 바람에, 토론을 좋아하는 프랑스적 풍토에서 반발을 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CPE의 좌초가 프랑스 사회의 시대착오성을 보여준 것이라는 일반적 평가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프랑스적인 것의 승리라고 하는 편이 더 옳지 않을까.
영어에서 ‘프렌치(French)’가 들어가는 어휘는 대체로 낭만적이고 귀족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몇 년 전에 ‘프렌치 키스’라는 영화가 소개된 적이 있다. 영화 제목인 프렌치 키스는 혀를 상대방 입 속으로 밀어넣는 깊고 달콤한 키스를 뜻한다. 이렇게 ‘프렌치’라는 말 속에는 낭만적이지만 한편으론 놀기 좋아하고, 사랑 타령에 빠져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겹쳐 있다. 그러나 프렌치는 - ‘프랑스적’인 것은 -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걸 이번 CPE 사태는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