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상, ‘두통에 관한 490장의 진술서’(왼쪽), ‘집착으로 구성된 440장의 가족사진’(1998~99).`
이로써 ‘조각’ 하면 으레 따라다니는 그것이 사라진다. 바로 견고한 물질성이다. 3차원 공간을 차지한 저 조각상은 아마도 속이 텅 비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눈앞에서 보는 것은 복제 이미지의 표면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다. 오늘날 세계는 점점 더 복제 이미지로 변해간다. 견고했던 세계는 증발되고, 그것의 표면을 핥는 사진들만 남아 속이 텅 빈 현실을 구성하게 된다.
문자에서 영상으로
인터넷에 올라온 개벽이들.
선형적인 스토리의 마지막 반전. 이게 바로 문자문화의 전형적인 유머다. 하지만 ‘개’를 가지고 이와 다르게 웃길 수 있다. 몇 년 전 누리꾼(네티즌)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모았던 ‘개벽이’를 생각해보라. 거기에는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상황을 뒤집는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폭소를 자아낸다. 그런 장면을 보고 셔터를 누를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 이것은 완전히 다른 감각, 즉 영상적 유머감각이다.
과거의 개그에는 스토리가 있었다. 가령 최양락의 ‘도시의 사냥꾼’ 같은 경우, 스토리가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 반전을 일으킨다. “에구, 에구, 그날 난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았다.” 하지만 요즘 개그에는 스토리의 시간적 전개란 게 없다. 순간적인 인상으로 웃기는 짧은 콩트들의 연속. 이는 젊은이들의 감각 자체가 이미 문자가 아니라 영상으로 조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디지털 다다
어느새 인터넷 유머 사이트에서 말로 된 농담을 찾기란 힘들게 됐다. 대부분의 유머가 사진이나 만화, 혹은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DC 인사이드’라는 곳에 들어갔더니 누리꾼들이 ‘짤방’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무슨 뜻인가 했더니 ‘잘림 방지’의 약자란다. 즉, 포스트를 올릴 때 영상을 첨부하지 않으면 아예 글을 잘라버린다고 해서, 글이 잘릴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억지로라도 갖다 붙이는 사진을 가리키는 말이다.
‘DC 인사이드’에 올라온 각종 패러디물.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930년대에 서구의 다다이스트들은 문자와 의미를 파괴하는 실험을 했다. 알 듯 모를 듯한 ‘자’들의 선문답은 다다이스트들의 무의미 시를 연상시킨다. 사진을 편집해 만든 몽타주와 패러디를 강력한 정치적 비판의 무기로 활용하는 것도 다다이스트들의 특징이었다. 디지털 다다. 미디어의 발전이 한국의 대중에게 과거에 소수 전위예술가들만이 독점하던 표현의 도구를 손에 쥐어준 것이다.
이미지의 전쟁
중요한 정치적 계기가 있을 때면 인터넷은 패러디물로 범람한다. 가장 흔한 것은 포토샵을 이용해 패러디한 영화 포스터. 2004년 탄핵 때 대중은 영상 패러디로 자신들을 대의하지 못하는 국회를 초토화했다. 읽을 시간을 필요로 하는 텍스트와 달리 이미지는 직관적이어서 메시지가 순간적으로 전달된다. 전파 속도도 텍스트와는 비교가 안 된다. 한마디로 정치 패러디는 자기 증식을 하는 디지털 시대의 ‘삐라’다.
언젠가 ‘헤딩라인뉴스’라는 프로그램에서 박근혜 대표를 마사치오가 그린 ‘낙원추방’ 속의 이브로 묘사했다가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이렇게 대중이 영상편집을 하는 첨단성과 “아무리 고전이라도 나체의 묘사는 허용할 수 없다”는 시대착오가 공존하는 곳이 대한민국. 한번은 역시 박 대표를 나체로 패러디한 포스터가 청와대 게시판에 오르는 바람에 의원들이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패러디가 정치문제로 비화되는 나라가 또 있을까?
대중은 편을 갈라 이미지 전쟁을 벌이고 있다. 원래 영상을 선도한 것은 개혁성향의 누리꾼들. 잇따른 대선의 패배로 우익들도 학습효과를 얻었는지, 최근엔 우익의 활동이 활발하다. 영상 편집이야 컴퓨터만 좀 다루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거기에 미감까지 자동으로 따라주는 것은 아니다. 우익 특유의 무지막지함은 종종 몰취미로 귀결된다. 가령 대통령의 머리에 저격수의 표적을 그려 넣는 파쇼 취향. 이것은 보는 이에게 섬뜩한 느낌을 준다.
어떤 전체주의
카메라폰이나 디지털 카메라를 쥔 수백 개의 손.
토털 카메라. 원래 카메라는 입학식이나 결혼식, 혹은 소풍이나 여행을 다닐 때에나 들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인의 주머니 속에는 늘 카메라가 있다. 오늘날 한국에선 세계 전체를 언제 어디서든 시각적으로 인용할 수 있다. 이 전면적인 복제 속에서 아우라의 파괴는 총체적이다.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 한 인터넷 신문에 들어가 보니, 좀전에 인사동에서 본 무지개의 복제영상이 벌써 올라와 있었다.
아마도 DMB가 도시 풍경에 또 다른 섬뜩한 장엄함을 줄 것이다. 소니의 워크맨은 음악은 집에서 듣는 것이라는 상식을 깼다. DMB는 TV는 집에서 보는 것이라는 또 하나의 상식을 전복시킨다. 머잖아 지하철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든 휴대용 모니터를 내려다보는 광경을 접하게 될 것이다. 유비쿼터스 시청문화 역시 또 하나의 전체주의적 장관을 만들어낼 것이다.
영화계에도 어떤 전체주의가 있다. ‘관객 1000만 명 돌파’라는 기사는 이제 뉴스거리가 되지 못한다. 이른바 가치관의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현대사회에서 국가권력의 개입 없이도 영화관에 이렇게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여기에도 어떤 전체주의가 있다. 보드리야르가 말한 ‘토털 스크린’은 한국에서 현실이 되었다.
자기를 연출하는 대중
옛날에 한국인들은 거리에서 카메라를 만나면 잔뜩 긴장했었다. ‘왜 우리는 외국인들처럼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럽지 못한가?’이렇게 푸념을 하던 것도 어느새 옛말이 됐다. 젊은 세대는 물론이고, 요즘에는 나이 드신 분들도 카메라 앞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을 연출한다. ‘출연’은 더 이상 연예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토털 카메라의 문화에서 모든 사람은 다소간 연예인이 된다.
발터 벤야민은 복제매체로 인해 소비에트의 대중이 예술적 연출의 주체가 되었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벤야민의 기대는 완벽하게, 그러나 자본주의적으로 실현됐다. 이른바 ‘셀카’ 놀이를 하는 젊은이들은 과거에 모델이나 탤런트, 배우들이 하던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의 대중은 월드컵 응원을 하다가, 대학로에서 춤을 추다가, 혹은 학교 앞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다가 사진이 찍혀 실제로 연예인으로 발탁되기도 한다.
탤런트들은 거울에 비친 것보다 카메라에 비친 제 모습에 더 민감하다고 한다. 카메라에 비친 모습이 현실의 자아를 교정하는 기준이 되는 셈이다. 오늘날 셀카 놀이를 하는 이들은 자신의 각도를 정확히 알고 있다. 과거에 배우들만이 하던 행동이 오늘날 한국에선 대중의 일상이 되었다. 카메라가 현실을 쫓아가는 게 아니라 현실이 카메라 앞에서 자신을 연출할 때, 삶은 은막이 된다. 토털 스크린.
영상의 시대란 그저 도처에서 카메라와 모니터를 보는 시대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영상의 시대란 대중이 카메라를 위한 신체가 되는 그런 시대다. 라캉이 말했던가? “자의식은 거울을 통해서 형성된다”고. 하지만 현대의 대중은 렌즈를 통해 자의식을 구성한다. 자아는 이제 카메라 앞에서 형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