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최고급 호텔의 하나인 뭄바이의 타지마할 호텔(왼쪽).
뭄바이에 도착했으니 인도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뭄바이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최고의 관광지임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1911년, 영국 왕 조지 5세 내외의 인도 방문을 기념해 세워진 인도문은 그 옛날 로마인들이 개선장군을 기리기 위해 축조한 개선문을 본뜬 것이다. 역대 영국 총독들은 이 문을 통해 인도로 들어와 식민통치를 이어나갔다.
거기서 뒤돌아서자 최고급 호텔 타지마할이 위용을 드러냈다. 인도 최대의 토착기업인 타타그룹을 창업한 잠제트지 나세르완지 타타가 영국 친구와 함께 아폴로 호텔에 식사하러 갔다가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출입을 거절당하자 바로 그 호텔 앞에 1903년 인도 제일의 호텔로 지은 것이다. ‘인도의 자존심’답게 외부 장식도 대단했지만 내부 장식이나 구조는 인도 상류층의 삶이 어떠한지를 짐작케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거기서 나와 시내 중심의 처치게이트 역에서 출발하는 교외선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 마하락슈미 역에 내리자 이와는 전혀 딴판의 풍경이 펼쳐졌다. 역사부터가 허름하기 짝이 없는 데다 온갖 쓰레기가 길을 뒤덮었고 일대에 들어선 집들도 매우 낡았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도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햇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세탁물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던 것이다. 널린 세탁물 사이사이로 빨래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는데, 그 수는 한둘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도비가트였다.
계층과 계급 이동 엄격히 금지 … 짐승보다 못한 대우
여기서 도비란 세탁 일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그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인도인들은 ‘도비왈라(빨래를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라 불렀다. 인도에선 세탁과 쓰레기 치우기, 야자열매 따기, 넝마주이, 염색, 채석 일, 시신 처리 등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최하층 계급 사람을 불가촉천민(Untouchables)이라 하는데, 도비왈라는 바로 이런 부류에 속했다.
호기심이 일어서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누군가가 다가오더니 ‘사유물’이라며 돈을 내라고 했다. 200루피 부르는 것을 150루피로 깎고는 도비가트 안으로 들어갔다. 젊은 안내인은 탁한 물이 담겨 있는 물통과 잿물 처리장, 빨래 삶는 시설 등을 보여주었다. 뭄바이에서 나오는 세탁물을 다 모아놓은 듯 빨랫감의 양은 실로 엄청났다.
도비왈라들은 빨랫감을 잿물 통에 담갔다가 꺼내서는 손으로 찌든 때를 제거하기도 하고, 더러는 물먹은 빨랫감을 돌바닥에 열심히 내리치기도 했다. 대부분 거의 반라 차림에 맨발이었는데, 여자들도 적지 않았다. 안내인은 모두 5000명쯤 될 것이라고 했다. 이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았다. 이왕 할 일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하자는 뜻으로 보였다. 심지어 이방인인 나를 보고는 반갑다는 표시로 씩 웃기도 했다. 세탁장 밖에선 릭셔와 자전거로 세탁물이 연신 실려 오고 실려 나갔다.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이나 집은 볼품없는 게 빈민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뭄바이의 야외공동 빨래터인 도비가트 전경(왼쪽 사진). 도비가트에서 세탁 일을 하고 있는 달리트들.
인도에선 신분은 어떠한 경우에도 바뀔 수 없으며, 따라서 직업을 바꿀 수도 없다. 계층과 계급 이동이 엄격히 금지돼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카스트 간에는 결혼도 못하며 함께 교육을 받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이 신분제도는 기원전 1000년경 유럽에서 건너온 아리아인에 의해 쓰여진 ‘리그베다’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21세기인 지금도 인도인이라면 누구나 살아 있는 한 이 제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걸 그들은 ‘카르마(업보 또는 운명)’라고 한다. 뭄바이에서 알게 된 것이지만 인도인들은 사람의 이름만 보고도 그가 어느 지역 출신이고 어느 신분에 속하는지 안다는 것이다.
불가촉천민은 전체 인구의 16%인 1억80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대부분이 극빈층이어서 이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빈곤 퇴치는 요원한 일일 것 같았다.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간디도 ‘주인은 영원히 주인으로, 노예는 영원히 노예로’ 살아가게 하는 제도는 옳은 게 아니라며 사회의 최약자인 불가촉천민에게 남다른 애정을 나타냈다. 그는 이들을 ‘신의 아들’이란 뜻의 하리잔으로 불렀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도 한계가 있었다. 독실한 힌두교도여서 그런지 신분제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반해 독립(1947년) 직후 인도 헌법을 기초하고 초대 법무장관을 역임한 불가촉천민 출신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박사(1891~1956)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을 헌법에 삽입하고 인간에 대한 차별을 일절 금지하는 법률도 제정하는 등 실질적인 처우 개선에 노력했다. 그는 또 이들을 ‘억압받는 자’란 뜻에서 달리트(dalit)라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는 평소 △신분제도는 인도 사회를 파멸시키고 있고 △사성제도를 기초로 인도 사회를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도 국민 전체에게도 이롭지 않으며 △인도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원리를 존중하는 종교적 바탕 위에서 재구성되어야 하고 △힌두 경전들이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① 미술관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뭄바이 학생들. 이들 중에는 달리트도 있다. ② 하층민들의 절반은 달리트라고 한다. ③ 빈 병을 나르고 있는 하층민.
그러나 그는 카스트를 기초로 성립된 힌두교가 존재하는 한 카스트의 벽을 허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956년 10월 “나는 힌두교인으로 태어났으나 힌두교인으로 죽진 않았다”며 나그푸르란 곳에서 50만 명에 이르는 달리트와 함께 카스트제도가 없는 불교로 개종했다. “붓다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곧 노예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의 해방, 계급의식으로부터의 해방, 불평등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는 연설을 한 다음이었다. 그 덕분인지 불교로 개종한 달리트는 현재 약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인도의 하층민들은 더럽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한다.
암베드카르 박사에게서 깊은 감화를 받은 달리트 출신의 일자무식 철도 노동자 ‘다무’는 자기 아들들만은 자기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만들고 싶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최고의 교육을 했다. 암베드카르 박사가 “부모는 자녀들을 교육함으로써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한때 ‘깡패’를 꿈꾸었던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엘리트 코스를 밟아 인도에서 대학을 나온 뒤 미국으로 건너가 인디애나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인도중앙은행에 들어가 현재 최고 자문관이자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맡고 있다. 그는 달리트들의 삶과 자신의 성장 과정을 담은 ‘불가촉천민’(이미 영역판도 나와 있다)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 나렌드라 자다브(1953년생) 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인도 정부에서도 공직과 주의회 의석 할당
필자는 그를 만나기 위해 경제수도 뭄바이의 샤히드 바가트 싱가(街)에 위치한 인도중앙은행 신관 8층 그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프랑스에선 신분의 벽을 허물기 위해 피를 요구한 대혁명(1789년)을 거쳤는데 과연 교육만으로 인도 사회를 바꿀 수 있는지, 그의 견해가 궁금해서였다.
그는 먼저 “달리트는 깨어나고 있다”며 말문을 텄다. 그러고는 “인도는 지금 새롭게 태어나고(re-emerging) 있다”고 덧붙였다.
“상당수의 젊은 달리트들이 지금 고등교육을 받고 있으며,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림과 춤, 영화, 음악, 컴퓨터 등 학업 외의 분야에서 자신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그리고 달리트들이 자녀 교육에 열을 올린 결과, 실력을 갖춘 젊은이들이 늘어나 인도 사회를 점점 경쟁사회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게 바로 인도를 변화시키고 있는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도는 신분상의 불평등을 혁명과 같은 급격한 방식이 아니라 교육과 자아 발견이라는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해결하고 있는 셈이다.
자다브 박사는 인도 정부가 행하고 있는 달리트 지원 정책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정부 공직과 주의회, 연방의회에서의 의석 할당 △공립학교와 국공립대학 입학 시 가산점(1000점 중 50점) 부여 △ 취업 시 일정 비율(16.5%)의 고용 의무화 등이 그것이었다.
그는 인터뷰 내내 호탕하게 웃으며 정열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호감 가는 인상의 그에게서 나는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건 인도 사회의 변화가 긍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리는 증표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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