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번 주 논술 주제
- 광복 이후 우리는 서구사회의 국가 시스템과 가치관의 모방을 최고의 목표로 추구해왔다. 서구는 세계의 중심이었고, 그들을 닮는 것이 곧 근대화이자 세계화로 여겨졌다. 변방 국가인 우리는 오랜 세월 쌓아온 고유문화를 부끄럽게 여기며 스스로 열등의식을 내면화해왔다.
- 그러나 최근 한국의 국가 경제적 지위가 높아지고, 한국 문화의 우수성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사례가 늘고 있다. ‘대장금’이나 ‘왕의 남자’의 흥행에서 보듯 국내에서도 우리의 고유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한국적인 가치를 발굴하고 계발하기 위해 다양한 모색이 이루어지고 있다.
-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현재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서구 중심적인 모습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밝히고, 이에 대한 입장과 극복 방안은 무엇인지 2000자 정도로 자유롭게 논술해보자.
수업을 하고 있는 권희정 선생.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전국을 뒤덮었던 우리의 열광과 환호는 비단 축구경기에서 이겼다는 기쁨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더 근원적으로는 세계가 우리를 주목하고 칭찬하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며 낯설어했던 심리적 충격에 대한 반응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산업화 과정은 우리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을 내재화해온 과정이었다. 우리가 지향하는 진보된 사회는 합리성으로 대변되는 서구의 체제와 시스템이었으며, 극복의 대상은 정체되고 낡은 것으로 여겨졌던 우리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월드컵과 한류의 확산 등을 목도하면서 우리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도 높아졌다. 그동안 학계에서만 이론적으로 논의됐던 오리엔탈리즘(서구 중심주의)이 사회·문화적 담론의 전면에 대두됐고, 서양의 진보된 문명을 낙후된 동양 국가가 적극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한다는 관성에 대한 반성도 확산됐다.
이제 동양과 서양,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는 식의 사고에서 벗어나 재조정돼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직면해 있다. 1980년대 후반에 출생한 우리 학생들에게는 역사적으로 축적돼온 서구 중심주의적 편향을 심각하게 성찰하는 데 한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의 눈으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율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과 비전을 스스로 정립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공동체 또한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 논제를 계기로 서구 중심주의에 대해 성찰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해 고민해보길 바란다.
● 학생 예시 답안 (상명대부속여고 3학년 조혜진)
● 문제 분석
이 문제는 크게 세 가지 질문을 담고 있다. 첫째 서구 중심주의적 모습을 우리 현실에서 찾아 사례를 제시할 것, 둘째 학생의 입장을 밝힐 것, 셋째 극복 방안을 제시할 것 등이다. 개요를 짤 때 질문 순서대로 내용을 배치해도 무방하며, 입장을 먼저 밝히고 사례 분석을 통해 극복 방안을 제시해도 무난할 듯싶다.
중요한 점은 출제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례 제시’를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구체적으로 우리의 현실을 고민했는지 살펴보려는 의도다. ‘입장 확인’은 단순한 찬/반 수준이 아니라 서구 중심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원인과 조건을 다각도로 들여다보라는 우회적 질문이다. 서구 중심주의의 극복 방안을 요구하는 문제의 성격상 단순한 답변은 사고의 깊이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극복 방안’ 또한 원인을 살피기 전에는 좋은 대안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두 번째 질문과 맥이 닿아 있다. 논지 전개를 구상할 때 질문 속에 숨겨진 중간 단계의 요소를 잘 파악하는 것도 논리적 글쓰기의 핵심 요소다.
대안을 제시할 때는 ‘의식 전환이 요구된다’, ‘좀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와 같이 피상적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구체적이고 현실성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야 사고의 깊이와 글의 수준을 높일 수 있다.
● 학생 답안 분석 및 첨삭
이 학생의 글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가)는 고전소설 ‘운영전’과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비교하면서, 서구 중심주의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서론 격으로 배치하여 무난하게 중심 주제를 부각시킨 점이 돋보인다.
(나)는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세 가지로 정리해 드러내고 있다. 서구의 것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 스스로를 비하하게 되었다는 것(나)-①, 우리 것보다 서구 것을 더 높이 평가한다는 것(나)-②, 우리 것보다 서구에 대한 지식이 더 많다는 것(나)-③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내용 전개상 (나)-②가 (나)-①보다 더 앞선 현상이므로, 순서를 바꾸는 것이 흐름상 더 순조롭다.
(다)는 두 가지 극복 방안을 제시하는 내용인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는 점이 아쉽다. 나름대로는 대안의 원칙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원칙만으로는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 [대안 1]에서는 유교 가치관을 꼬집어 거론하고 있으므로 남녀평등을 저해하는 가부장제적 사고를 반성한다거나, 개인의 권리보다 우선하는 국가주의적 요소를 줄이자는 식의 한층 구체화된 문장이 삽입됐으면 한다. [대안 2]에서는 ‘아시아적 가치’의 우수성을 홍보하자는 전략인데, ⑨에서처럼 ‘서구권에 영향을 미치는 데’ 목적을 두는 것은 일의 순서를 혼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는 아시아 국가들의 장점에 관심을 갖고 발굴된 가치들을 서로 소통하면서 내부적 공감대를 강조하는 것이 우선돼야 할 것이다. 그런 연후에 서양을 마주하면서 ‘당당한 우리’를 드러내는 일이 자연스러운 과정이지 않을까.
(라)는 우리 안에 있는 고품질의 문화 콘텐츠를 중심으로 서구 중심주의를 탈색시키자는 내용의 정리 단락이다. 다만, ⑩에서 서구 중심주의를 “너무 극단적으로 옳지 않다”고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표명했다면(③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간직해야 할 긍정적인 서구의 것들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이 균형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라 생각된다.
표현적 측면에서 몇 가지를 지적해보자. 우선, 생략하면 안 될 용어와 생략하는 것이 좋은 용어를 잘 살펴야 한다. ①은 “서양의 고전 작품에 대한 반응과 큰 차이를 보인다”로 바꾸는 것이 좋다. ④는 앞선 문장이 원인을 분석한 내용이 아니므로 생략하는 것이 좋다. 또한 범주를 정확히 표현해야 한다. ②-1은 서구 중심주의가 ‘적용된 분야’를 말하고, ②-2는 서구 중심주의적인 ‘자세’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둘을 같은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극단적인 진단도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⑧은 “전통적 유교 가치관과 충돌하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로 고치도록 하자.
⑤와 ⑥은 단락의 주제문장을 뒷받침하기보다는 구어체 문장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것보다는 그렇게 된 현실의 조건을 분석하는 것이 더 낫다. 유럽의 시스템을 기준으로 삼게 된 이유(⑤)와 한국의 교육 환경보다 서양의 교육 환경을 선호하게 된 이유(⑥)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바꿔보자. 끝으로 ⑦은 우스갯소리의 공감대가 수험생의 처지에 한정되어 있다. “국어에 서투른 사람보다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이 더 부끄러워한다”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 학생 글 총평
전체적으로 봤을 때 질문에 대한 답변을 단락 구성에 충분히 반영하고 있고 글의 흐름도 자연스럽다. 단락마다 주제문장이 분명한 것도 입장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사례 제시가 (가) 이외에는 그다지 구체적이지 못하다. 또한 서구 중심주의의 원인을 분석하는 내용이 빠져 있다. 대안을 추상적으로 제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으로 보인다. 질문 속에 숨어 있는 논점을 파악하는 데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
■ 논제와 현실 사이
서구 중심주의는 뜻밖에도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한 말이다. ‘오리엔탈’은 분명 동양을 가리키는데, ‘동양에 관한 이론’쯤으로 번역돼야 할 용어가 서구 중심주의를 의미한다는 것이 학생들에게는 의외일 것이다. 이 말은 동양의 모습이 동양에 의해 스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서양에 의해 구성되고 재단된 것임을 강조한 데서 기인한다. 18세기 이후 근대화에 성공한 서양인들이 동양에 대해 연구하면서 ‘서양=합리적=이성적=논리적’, ‘동양=비합리적=비논리적=신비적’이라는 공식을 정립한 사고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인식은 서양은 문명사회, 동양은 야만사회라는 이분법적 발상으로 고정되기까지 했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인이 동양을 바라보는 관점’일 뿐이며, 동양과 서양의 지리적·문화적 차이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고 그 구조를 재생산하는 경계 짓기의 용어로 이해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국가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자성의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대학 논술문제에서도 드러난다. 2005학년도 서울대 수시 논술문제(특기자 전형)나 2002학년도 중앙대 정시 학업적성 평가에서 ‘서구 중심주의의 구체적 경험 제시와 부당성을 지적하라’는 문제가 출제됐다. 2002학년도 한양대 정시 논술고사에서는 ‘서구 중심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개인적·사회적 방안을 논술하라’는 문제가 출제됐다.
사회 경험이 적은 학생들은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는 일을 무척 어렵게 느낀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얼마든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세계지도를 펼쳐보자. 분명 대한민국은 동서양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그러나 우리의 동쪽이 서양이 되고, 정작 우리가 있는 곳은 동양이 되었다. 음악이나 의학은 서양음악과 서양의학을 가리킨다. 반면 한국의 것은 국악이나 한의학이라는 특수 명칭을 갖고 있다. 영어를 잘하고 서구 문물에 익숙한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얻게 되는 지위나 보상이 달라진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또 한국 프로야구는 ‘한국시리즈’로 끝나는데, 미국 프로야구는 ‘월드시리즈’로 끝난다. 생각을 집중하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관심이다. 새로운 개념을 접할 때 항상 우리의 현실과 연관지어 사고하는 자세를 강조하고 싶다.
■ 맥락 안에서 책 읽기
서구 중심주의는 거의 모든 학문과 문화현상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특정 분야에만 국한지어 사고할 수 없다. 개념의 맥을 따라 문제 의식이 연관된 다양한 책을 읽고 스스로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
먼저 서구 중심주의에 대해 최초로 문제 제기를 한 ‘오리엔탈리즘’을 권한다. 저자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 발생한 과정과 의도를 되짚어 보면서 서구 중심주의를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대 이전의 서양은 동양에 대해 단편적인 인상만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국주의적 확장을 계기로 과학적·인문학적 방법을 동원해 동양에 관한 이론을 체계화했다. 동양이 스스로 발전할 수 없는 세계이고 서양의 힘과 지식을 빌려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믿음, 문화적 다양성과 상대주의를 수용하지 못한 까닭이 모두 제국주의라는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임을 가르쳐준다.
‘오리엔탈리즘’이 다소 어렵다면 ‘난 몇 퍼센트 한국인일까’를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쉽고 재미있게 서구 중심주의를 설명하는 책이다. 사이드 이후에 진행된 연구도 포함했고, 특히 한국적 현실에 맞게 다양한 사례를 들어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는 점이 돋보인다. 고등학생에게도 쉽게 읽히는 점이 장점이다. 그 외에도 한국에서 오리엔탈리즘이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을 다룬 책으로는 ‘오리엔탈리즘의 해체와 우리 문화 바로 읽기’가 있다.
서구 중심주의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 더 깊이 내려가보자. 어느 한 문화가 중심이 되고 나머지 문화는 변방이 되는 관계는 옳지 않다. 그런 입장에서 문화 다원주의를 강조하는 책들도 읽어볼 필요가 있다. 마빈 해리스가 쓴 ‘문화의 수수께끼’는 다양한 문화 현상을 하나씩 살피면서 서로 이해하기 어려운 관습들도 저마다 독자적인 가치가 있음을 밝혀준다. 또한 개고기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마음을 졸이는 한국인에게는 ‘개고기와 문화제국주의’도 반갑다.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개념도 함께 익혀두기 바란다.
무엇보다 우리의 정체성을 우리의 눈으로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독해력이 있는 학생이라면 ‘아시아적 가치’를 통해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철학의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대안적 사고를 키워보자.
■ 토론 없이 논술 없다
흔히 논술을 위해 독서를 강조하지만 내용을 소화하지 못한 채 글자만 읽고 끝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 자기 것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토론이다. 당연하게 여겼던 생각이 다양한 의견에 의해 반박당하는 경험은 학생들을 당황하게 만들 것이다. 내가 읽은 내용보다 더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는 친구들에게 놀라움도 느끼게 된다. 왜 그러냐고 던지는 질문은 처음엔 남이 나에게 하지만, 토론 경험이 축적되면 혼자서 되묻게 된다. 장황한 비판 뒤에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반응이 자연스레 따라나온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듣는 태도는 의사소통의 감수성도 높여준다.
이 모든 훈련을 단시간에 가장 압축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토론이다. 수업 시간이나 등하교 시간, 또는 점심시간이어도 좋다. 또래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질문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이런 대화 속에서 논술의 힘이 길러진다.
* 이번 호 논술 지도에는 서울 상명대부속여자고등학교 철학 담당 권희정 선생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