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의도는 섬이지만 전형적인 농촌입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왜 이렇게 우리 고향은 가난할까’ 하는 의문을 떨치지 못했어요.”
전남 신안군 하의도를 무대로 한 ‘하의도 농민운동사’(책과함께 펴냄)를 펴낸 김학윤(70) 씨는 13대에 걸쳐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해온 향토사 연구가다. 그가 ‘역사의 그늘’에서 끄집어낸 것은 농지 수탈에 대항해 부단한 항쟁 끝에 마침내 승리를 얻어낸 하의도 농민의 수난사이자 투쟁사다. 하의도 농민의 ‘내 땅 되찾기’ 투쟁은 1623년 인조 임금이 정명공주에게 하의도·상태도·하태도 등 하의3도의 농지 20결(약 8만 평)에 대해 4대손까지 세미(稅米)를 징수토록 어명을 내린 데서 비롯됐다. 이는 혼기를 넘긴 정명공주와 결혼하는 부마에게 땅을 주겠노라고 한 선조의 공언에 따른 것.
이후 세도가들과 협잡꾼,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관권(官權), 해방공간의 신한공사 등으로 인해 9차례나 땅 주인이 바뀌는 곡절을 겪으며 350여 년에 걸친 기구한 역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국내 기록이라곤 학자들의 논문 3편과 소설 1편이 전부. 결국 사료 수집과 현장답사, 집필에 10여 년이 걸렸다. 김 씨는 집필을 위해 수필가로도 등단했다. 다행히 운도 따랐다. 집필과정에서 일본 변호사 고노 부쓰노스케, ‘조선 하의도 소작쟁의’라는 수기를 남긴 노동운동가 아사히 겐즈이, 번역작가 가토 겐지 등과 인연을 맺으면서 한층 적확한 하의도의 옛 상황을 접할 수 있었던 것.
“권력의 핍박에도 꺾이지 않은 농민들의 자주정신을 되새기고, 남의 나라 문제임에도 국경과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어 관심을 가진 정의로운 몇몇 일본인의 삶을 통해 한-일 양국이 상생의 시대를 열어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 씨는 전남대 농대 출신으로 농협중앙회에 근무하다 정년퇴임했으며, 현재 (사)하의3도 농지탈환운동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남 신안군 하의도를 무대로 한 ‘하의도 농민운동사’(책과함께 펴냄)를 펴낸 김학윤(70) 씨는 13대에 걸쳐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해온 향토사 연구가다. 그가 ‘역사의 그늘’에서 끄집어낸 것은 농지 수탈에 대항해 부단한 항쟁 끝에 마침내 승리를 얻어낸 하의도 농민의 수난사이자 투쟁사다. 하의도 농민의 ‘내 땅 되찾기’ 투쟁은 1623년 인조 임금이 정명공주에게 하의도·상태도·하태도 등 하의3도의 농지 20결(약 8만 평)에 대해 4대손까지 세미(稅米)를 징수토록 어명을 내린 데서 비롯됐다. 이는 혼기를 넘긴 정명공주와 결혼하는 부마에게 땅을 주겠노라고 한 선조의 공언에 따른 것.
이후 세도가들과 협잡꾼,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관권(官權), 해방공간의 신한공사 등으로 인해 9차례나 땅 주인이 바뀌는 곡절을 겪으며 350여 년에 걸친 기구한 역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국내 기록이라곤 학자들의 논문 3편과 소설 1편이 전부. 결국 사료 수집과 현장답사, 집필에 10여 년이 걸렸다. 김 씨는 집필을 위해 수필가로도 등단했다. 다행히 운도 따랐다. 집필과정에서 일본 변호사 고노 부쓰노스케, ‘조선 하의도 소작쟁의’라는 수기를 남긴 노동운동가 아사히 겐즈이, 번역작가 가토 겐지 등과 인연을 맺으면서 한층 적확한 하의도의 옛 상황을 접할 수 있었던 것.
“권력의 핍박에도 꺾이지 않은 농민들의 자주정신을 되새기고, 남의 나라 문제임에도 국경과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어 관심을 가진 정의로운 몇몇 일본인의 삶을 통해 한-일 양국이 상생의 시대를 열어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 씨는 전남대 농대 출신으로 농협중앙회에 근무하다 정년퇴임했으며, 현재 (사)하의3도 농지탈환운동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