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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주의’가 세계화 폐해를 제어한다

세계시장주의 ·세계시민주의 이념 득세 … 국가의 성격과 사명 변화 구심력 더 필요

‘애국주의’가 세계화 폐해를 제어한다

  • 광복(光復)은 우리에게 국가를 되돌려줬지만 민족은 양분됐다. 미국 같은 다민족 국가는 애국주의를 표방한다. 반면 오랜 세월 단일민족 국가였던 우리에게 국가와 민족의 구분은 못내 불편하다.
  • 이 같은 불편한 상태가 60여 년간 지속되면서 우리의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는 현실공간에서 다양하게 변용됐다. 세계화가 대세가 된 지금, 우리에게 민족주의와 애국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
  • 8·15를 맞아 다 함께 곱씹어보자는 뜻에서 이 글을 마련했다. - 편집자 -
‘애국주의’가 세계화 폐해를 제어한다
세계화에서 ‘세계’라는 단어는 시간적 의미의 ‘세(世)’와 공간적 의미의 ‘계(界)’로 이뤄져 있다. 세계화는 인류가 직립해 공간이동을 시작한 이래 지속돼온 현상이다. 인간 이성의 진보에 따른 과학기술의 발전은 전 지구적 시공간의 압축을 가져왔고, 이제 그 속도를 조절할 수는 있어도 피할 수 없게 됐다. 인터넷을 통해 이뤄지는 전 지구적 자본 이동과 지식의 교류는 눈부시다. 현란한 세계화의 와중에서, 세계시장주의(global marketism)와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로 대표되는 ‘세계주의’가 하나의 세계에 공존하는 사람들을 향도할 이념적 나침반으로 각광받고 있다. 전자가 우파적 세계주의라면 후자는 좌파적 세계주의다.

우파적 세계주의로서의 세계시장주의는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묶고자 할 뿐 아니라, 공공문제를 시장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을 선호한다. 냉전에서 승리한 앵글로색슨주의적 열광,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종언론, 그리고 복지국가 모델의 퇴조와 국가쇠퇴론 등이 세계시장주의를 뒷받침했다.

우파적 세계주의로서의 세계시장주의가 시장과 자본의 세계화를 의미하는 ‘위로부터의 세계화’와 짝을 이룬다면, 좌파적 세계주의로서의 세계시민주의는 시민 간의 연대, 노동자 간의 연대를 의미하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와 짝을 이룬다.

세계시민주의의 역사는 길다. 기원전 400년경 디오게네스는 출신 배경을 묻는 질문에 “나는 세계의 시민이다”라고 대답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니아 병사와 페르시아 처녀들 간의 집단결혼식을 주재함으로써 혈통적 세계제국 시민을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실험은 인종간 결혼 확대를 통해 세계제국 시민의 육성을 꿈꿨던 슐레진저(Arthur Schlesinger, Jr., 1917~2007)의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고드윈(William Godwin, 1756~1836)은 “물에 빠진 두 사람 중 먼저 구조할 한 사람을 결정하는 데 혈연관계나 국적을 고려해선 안 된다”는 말로 세계시민주의의 요체를 설명했다. 이러한 고드윈의 주장은 6·25전쟁을 경험했던 고마태오 신부의 다음과 같은 고백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부상당한 미(군) 비행사와 인민군, 둘을 다 살려낼 수 없었던 그 절박한 상황에서 나는 사상의 동지이며 조국의 은인인 비행사보다, 적이나마 우리와 피를 같이한 동족을 선택했습니다.”



국적과 인종의 차이를 넘어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할 것을 호소하는 마르크스주의나 프랑켄슈타인처럼 국가 조직에 대한 저항을 표방하는 무정부주의는 세계시민주의와 친화성을 지닌다. 세계시민주의를 표방하는 인류적 보편주의는 한 개인이 바쳐야 할 충성은 인류공동체에 대한 것이고, 인류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들의 가치는 동등하게 존중돼야 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세계시민주의는 보편적 인권의 옹호를 위한 노력과 잘 부합하며, 최근 국제정치에서 많이 인용되고 있는 인간안보의 개념과도 잘 맞는다.

세계시장주의이든 세계시민주의이든 세계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충성을 서약하는 것은 국적을 넘어서려는 시도일 뿐 아니라 자연(발생)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삶의 모든 현실성, 특수성, 그리고 실체들을 넘어서려는 시도”다. 세계시민주의는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자행됐던 반인권적 사례들에 주목한다. 나치에 의한 대량학살의 경험은 많은 유대계 지식인을 세계주의로 인도했다. 마찬가지로 일본 국가주의에 의해 유린당한 경험, 군부독재에 의해 억압당한 경험, 개발독재적 국가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자본의 욕구는 모두 세계주의와 쉽게 결합한다.

자본의 욕구 모든 세계주의와 쉽게 결합

그렇다면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 세계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신(神)’에게 귀의하려 열망하면서도 왜 애국(민족)주의의 대상인 국가와 민족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것은 유럽이 휠씬 앞서 경험한 보편주의적 세계관의 광폭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근대유럽의 국제체제를 수립한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 이전의 전쟁은 흔히 30년 종교전쟁이라 불린다. 그 규모와 함의로 볼 때 근대 세계사에서 6대 전쟁 중 하나로까지 언급되는 30년 종교전쟁은 프로테스탄트적 보편과 가톨릭적 보편이 충돌한 결과였다. 신교에 대칭되는 구교의 의미로 사용되는 가톨릭(catholic)이란 어휘는 아직까지 ‘보편적’ 또는 ‘만인에 공통되는’이라는 뜻을 지닌다. 유대교가 특수한 개별 민족에 한정된 신념체계였던 데 반해, 가톨릭은 만민에 적용되는 신념체계를 의미했다. 또한 유대교가 유대민족국가와 짝을 이루는 신념체계였다면, 가톨릭은 민족국가보다는 제국과 짝을 이루는 신념체계였다.

1517년 루터의 반박문 발표 이후 각각의 보편을 추구하기 위한 종교전쟁의 잔혹성을 경험하던 와중에 보댕(Jean Bodin, 1530~1596)은 국민, 영토와 함께 국가구성의 3대 요소 중 하나인 주권에 관한 이론적 기초를 확립했다. 그리고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사회계약론을 통해 개인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논증하면서 국가 권위를 확립했다. 이에 더해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는 국가와 국가 간의 약속을 통해 평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국제법이론을 발전시켰다.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체제는 보편적 세계관의 광기를 제어하기 위한 국가이성(raison d’Etat)의 위대한 발명품이었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애국(민족)주의를 극복의 대상, 세계주의를 맹목적 추구의 대상으로 설정하기는 어렵다.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기본적으로 국가(민족)주의가 주도한 전쟁이었지만, 보편적 세계주의의 광폭성이 공존하고 있었다. 1905년과 1917년에 발발한 러시아혁명의 이념적 귀결점인 공산주의적 세계주의는 러시아정교적 세계주의의 대척점에 있었다. 이는 라스푸틴(Grigorii Rasputin)으로 상징되는 종교적 보편에 대한 광신적 집착에 대한 반발이었지만, 반대로 무신론적 보편에 대한 광신적 집착을 낳았다.

일본은 일찍이 서구중심의 세계주의가 교황무오설을 표방했던 것과 유사하게 천황무오설을 발전시켰다. 일본의 이런 태도는 오랜 기간 중국의 천자적 세계주의에 맞서 발전해온 것이기도 했다. 중국의 천자적 표준과 일본의 천황적 표준은 단순히 애국주의의 차원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와 민족들을 복속하기 위한 이념적 기제로서 세계주의적 경향을 지닌 것이었다.

세계화시대의 우파 명품 또는 좌파 명품이 되고 있는 세계주의에 비해,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는 언뜻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파 명품으로서의 세계시장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미국인의 애국주의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좌파 명품으로서의 세계시민주의를 전파하는 사람들은 프랑스 좌파의 애국주의를 어떻게 이해할까? 세계화 맷돌의 중심부는 천천히 돌지만, 맷돌의 주변부는 중심부를 따라잡기 위해 요란스럽게 돈다. 세계화시대 주변부의 지식인들이 각기 왼손과 오른손을 치켜들고 반목하는 와중에도 세계화의 중심에는 좌뇌와 우뇌를 공유한 국가들이 있다. 주변부가 처한 세계적 상황을 도외시한 채, 각기 중심부의 좌뇌나 우뇌와 연결된 주변부 지식인들은 세계화의 진행에 따라 점점 더 그들의 말에 경청하는 귀를 잃게 될 것이다.

세계는 모호하고 국가는 구체적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는 ‘인간에 관한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신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사랑한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반드시 개체에서 전체로 올라간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고결한 정신이 깨어나도록 돕는다. 작은 조약돌이 고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듯 중심에서부터 동심원이 퍼져나간다. 먼저 친구·부모·이웃을, 그 다음에 나라를, 그 다음에 온 인류를 포옹한다.”

세계는 멀고 (민족)국가는 가깝다. 세계는 모호하고 (민족)국가는 구체적이다. 세계화 또는 세방화(世方化·glocalization), 유럽연합 같은 초국가적 지역협력체의 출현을 통해 (민족)국가는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국가가 소멸하고 있다기보다 (민족)국가의 성격과 사명이 변화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혈연적, 숙명적으로 주어진 표준이 아니라 합의된 표준으로서의 (민족)국가가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애국주의나 민족주의 자체를 폐기하기보다, 애국주의나 민족주의가 빠질 수 있는 극단을 민주주의와 국제주의를 통해 끊임없이 견제하면서 애국주의와 민족주의가 세계 인류를 위해 복무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애국주의나 민족주의가 반드시 반(反)세계적인 것은 아니다. 세계주의자들은 흔히 자본이나 인간의 접촉 빈도가 상호간 친밀도의 증가로 귀결되리라 낙관한다. 이처럼 전 세계적 네트워크의 확대를 강조하는 세계주의적 견해를 스파게티 그릇 모형의 세계화라고 칭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애국주의나 민족주의를 통해 통제 가능한 세계화로 가고자 하는 것은 샐러드 그릇 모형의 세계화다. 각각 단위체에서 이뤄지는 민주적 결정을 존중하는 원칙을 바탕으로 한 세계화인 것이다.

일본의 경우 애국주의와 세계주의의 대립은 야스쿠니신사파 대 히로시마평화공원파의 대립으로 표출된다. 야스쿠니신사파의 나쁜 애국주의는 이웃 국가들뿐 아니라 자국민에게 큰 부담을 안기고 있다. 다른 한편, 히로시마평화공원파식 세계주의로의 편안한 의탁은 국가적 사죄를 회피하기 위한 탈출구 기능을 하면서 좋은 애국주의의 발전을 막는 측면이 있다. 그 결과 일본은 ‘국제적이지만 결코 지역적이지 못한(internaional, but not regional)’ 국가(민족)에 머물고 있다. 세계주의를 표방하면서 인근 국가들과의 문제를 회피하는 일본인, 그리고 과거의 나쁜 애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한 일본인 사이에 사죄 주체로서 국가(민족)를 설정하는 좋은 애국주의가 있을 수 있다. 자국민의 불행에 대해 슬퍼할 수 없는 사람이 과연 타 국민의 불행에 대해 온전히 슬퍼할 수 있을까? 타인에 대한 의례적인 조문도 자기 부모를 잃는 슬픔을 겪고 난 후에는 새로운 질량감을 지니게 된다.

일본의 애국(민족)주의가 좋은 애국(민족)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헌법 9조의 변경에 좀더 신중해야 할 것이다. 최근 일본의 개헌 논의는 9조에 포함돼 있는 국제적 약속의 의미를 간과했다. 일본의 헌법 9조는 1조부터 8조까지의 조항과 긴밀히 연관돼 있다. 천황에 대한 규정을 담은 1조부터 8조까지의 조항을 통해 전쟁의 최고 책임자인 천황을 폐위하지 않고 존속시킬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상응조치로서 9조가 마련됐던 것이다. 좋은 애국(민족)주의는 다른 나라와의 약속을 존중해야 하며, 다른 나라의 좋은 애국(민족)주의와 공존해야 한다.

문제는 나쁜 애국(민족)주의이지 애국(민족)주의 자체가 아니다. 나쁜 애국(민족)주의는 맹목적 국가숭배, 국수주의(쇼비니즘), 국가(민족)에 대한 우상화 등을 의미한다. 좋은 애국(민족)주의는 이와 구별될 뿐 아니라, 이와 투쟁한다. 그렇다면 나쁜 애국(민족)주의를 좋은 애국(민족)주의로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이는 민주주의와 국제주의(제국주의의 반대어로서)를 통해 부단히 견제받는 제도로서의 국가를 ‘매일매일의 국민투표를 통해’ 공유함으로써 가능하다. 이 같은 국가(민족)는 물방울로서의 개인이 아시아주의라는 호수를 거쳐 세계주의라는 바다로 흘러 들어가기 이전의 소담한 연못과도 같다.

나쁜 애국주의 vs 좋은 애국주의

‘내셔널 인터레스트(National Interest)’라는 말은 오랫동안 국제정치적 사유의 키워드였다. National Interest는 우리말로 ‘국가이익’과 ‘민족이익’으로 번역될 수 있다. 애국주의자들은 전자의 번역을, 민족주의자들은 후자의 번역을 선호할 터다. 종교전쟁 와중에 프랑스 가톨릭의 추기경이자 재상이던 리슐리외와 그의 후계자 마자랭은 팍스 에스파니아를 견제하기 위한 프랑스의 National Interest를 위해 기꺼이 개신교 국가들 편에 섰다.

코리아(한반도)의 건국세대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애국주의의 대상이 될 2개의 국가를 세웠지만 민족적 분단을 낳았다. 그 결과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적대적 관계가 형성됐다. 산업화세대는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앞세워 부유한 국가를 만들었지만 계층주의와 지역주의의 씨앗을 뿌렸다.

민주화세대는 민주주의 구현을 통해 ‘나쁜 국가’를 ‘좋은 국가’로 변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애국주의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나쁜 국가’를 부정하던 관행은 그들이 이룩해낸 ‘좋은 국가’에 대한 애국주의마저 부정하는 자승자박의 상황을 만들었다. 좋은 애국주의마저 거부하는 ‘향토적 지역주의’는 ‘도민’을 ‘국민’으로 승화시키지 못한다.

애국주의를 거부하는 지역주의는 애국주의를 우회해 세계주의 또는 민족주의와 결합하고자 한다. 그 결과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대립은 초월하지 못한다. 상당 기간 1민족 2국가 단계를 거칠 수 밖에 없는 코리아의 상황에서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연결하고 아우르려는 노력의 결핍은 국가를 경영해보겠다고 나선 정치인들이 정작 애국주의에 맞서 국민적 지지를 상실하는 결과를 낳는다.

세계화시대에 오히려 민족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증폭되듯, 한국에 작용하고 있는 세계화의 원심력은 애국주의라는 구심력의 필요를 더욱 절감하게 한다. 세계화로 인한 폐해에 주목할수록 세계화의 광폭성을 제어할 수 있는 좋은 애국주의의 필요성은 증대된다. 세계시장주의가 애국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의 허구성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극대화하고자 하면서도 정작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에는 각종 장벽을 설치하고 있는 중심부 국가들의 이중성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또 국가 단위의 작은 민주주의와 상통하는 좋은 애국주의의 가능성은 믿지 못하면서 어찌 세계적 단위의 세계시민주의에 대해서는 그토록 순진하게 낙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보다 나는 교정 가능한 대한민국을 믿는다.



주간동아 2007.08.21 599호 (p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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