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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내 딸은 스토킹 당했어요”

5월 큰딸 사망 유모 씨의 恨 “경찰 수사 ‘내연녀’ 언급 너무 억울 반드시 책임 물을 것”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죽은 내 딸은 스토킹 당했어요”

“죽은 내 딸은 스토킹 당했어요”

숨진 은혜 씨의 생전 모습.

“내연의 관계가 아니라 일방적인 스토킹이었습니다.”

유모(48·여) 씨는 살해된 딸의 명예회복을 위해 1년 넘도록 싸우고 있다. 지난해 5월 그의 큰딸 은혜(가명·당시 22세) 씨는 직장상사인 이모(당시 37세) 씨에게 살해됐다. 언론에는 ‘내연녀 살해 30대, 죄책감 자수’ ‘유부남인 이 씨는 숨진 ○○와 같은 직장에서 알고 지내면서 지난 10여 개월 동안 부적절한 만남을 가져왔다’ 등으로 보도됐다. 하지만 유 씨는 “은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내연의 관계가 아닌 일방적인 스토킹이었다”고 주장하면서, ‘허위 사실’을 알린 경찰관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그러나 죽은 딸의 명예를 회복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씨는 제 딸에게 ‘안 만나주면 죽여버리겠다’ ‘이혼할 테니 결혼해달라’며 스토킹을 했어요. 그런 이 씨를 어떻게든 떼어내려고 애를 쓰다가 그만 살해된 거죠. 사건이 일어나기 사흘 전 토요일에도 ‘회사 직원 결혼식이 있다’며 집을 나갔다가 다음 날 아침에 얼굴 여기저기에 상처가 난 채 들어온 일이 있었어요.”

“직장상사가 사사건건 간섭”

은혜 씨의 절친한 친구인 유모 양이 작성한 진술서에는 “은혜가 이 씨의 괴롭힘과 집착 때문에 힘들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라고 적혀 있다. 유 양은 이어 “인사과장인 이 씨가 ‘은혜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은 다른 부서로 옮겨버리겠다’ ‘팀장이 괴롭히면 말하라’며 은혜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너 없이 못 살겠다’ ‘부인과 이혼하겠다’라고도 했고, 전화를 받지 않으면 ‘뭐 했냐’ ‘어딜 갔었냐’ ‘누굴 만났냐’라며 은혜를 구속하려 든다고 했다. 자꾸 일방적으로 선물을 보내고 차 안에서 스킨십도 시도했다고 한다. 또 은혜는 ‘직장상사가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까지 사사건건 간섭해서 회사생활을 하기 힘들다’고 말하기도 했다”라고 밝혔다.



“죽은 내 딸은 스토킹 당했어요”

피의자 측이 제시한 은혜 씨가 주었다는 메모(왼쪽)의 글씨체는 유 씨가 보관하고 있는 딸의 수첩 글씨체와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경찰관 고소 사건을 맡은 춘천지방검찰청 원주지청은 4월 경찰관들을 불기소 처분했다. 검찰은 불기소 이유를 △‘은혜 씨로부터 이 씨와 사귀는데 헤어지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라는 직장동료 고모 씨의 진술 △경찰은 ‘교제하는 사이’라고 기재된 브리핑 자료를 기자들에게 배포했을 뿐 ‘내연의 관계’ 또는 ‘불륜 관계’라고 말한 사실이 없음 △수사 결과를 브리핑한 과정에서 사건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의도로 부득이하게 ‘교제하는 사이’라고 기재한 것인 만큼 명예훼손의 범의가 있다고 보기 어려움 등으로 밝혔다.

하지만 유 씨는 “경찰이 브리핑 자료만 배포한 것이 아니라 ‘내연의 관계’라고 적힌 경찰 내부 문서를 기자들에게 보여줬다”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기사화했던 통신사 뉴시스의 기자도 “경찰이 ‘내연의 관계’라는 표현이 들어 있는 상황보고서를 보여줬고, 기사에도 ‘내연’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밝혔다.

“죽은 내 딸은 스토킹 당했어요”

인터뷰 중 눈물을 훔치는 유 씨 .

유 씨는 잘못된 경찰의 수사에도 분통을 터뜨렸다. 경찰은 수사기록에 은혜 씨가 이 씨에게 보냈다는 e메일 기록을 첨부했다. ‘e메일’은 사랑과 이별에 관한 내용.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은혜 씨가 이 씨에게 e메일을 보낸 것이 아니라, 이 씨가 은혜의 개인 미니홈페이지를 방문해 글을 읽고 나간 흔적이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경찰도 잘못된 수사였음을 시인하는 e메일을 유 씨에게 보내왔다. 유 씨는 “경찰은 수사보고서에 이 씨가 ‘내연의 관계란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라고 써놓고는, 같은 날 작성한 부검의뢰서에는 ‘내연의 관계로 지내오다’라고 기재했다”면서 “경찰이 내연의 관계로 몰아간 것 아니냐”며 흥분한 목소리로 토로했다.

유 씨는 춘천지검 원주지청 수사과 직원으로부터도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2005년 12월과 2006년 1월 두 차례 원주에 내려가 명예훼손 고소 건과 관련해 조사를 받았는데, 검찰 직원이 자신을 추궁하고 자존심을 묵살하는 언행을 했다는 것이다. 유 씨는 “그 직원이 ‘둘이 호텔에 간 것 같으냐, 아니면 여관에 간 것 같으냐’라고 묻는 등 모멸감과 수치심을 줬다”고 말했다.

유 씨는 이 검찰 직원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에 진정서를 냈지만 결국 기각됐다. 서면조사에서 이 직원이 유 씨의 주장을 부인했기 때문. 유 씨는 “검찰 직원과 나를 대질조사 해보지도 않고 종결시키는 인권위가 야속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인권위는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가급적 소환조사나 대질조사를 하지 않고 서면조사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인권위 관계자는 “인권을 침해당했다는 증거자료가 없기 때문에 피진정인이 부인하면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며, “경찰이나 검찰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며 진정한 사건의 경우, 대개 유 씨의 경우처럼 입증이 안 돼 기각되는 것이 보통이다”라고 전했다.

유 씨는 살인사건 법정에서 이 씨 측이 증거자료로 활용한 ‘메모’에 대해서도 의혹을 가지고 있다. 은혜 씨가 이 씨에게 주었다는 메모는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알게 됐음을 감사하세요…’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유 씨는 “1월 이 씨 측이 법정에서 마치 치정에 얽혀 우발적으로 살해한 것으로 하기 위해 이 메모를 우리 딸이 이 씨에게 준 것으로 주장했는데, 이 메모는 딸의 필체가 전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유 씨가 보여준 딸의 수첩에 적힌 글씨체는 이 메모의 글씨체와 확연히 달랐다. 유 씨는 이 건에 대해서도 고소한 상태로, 수사를 맡은 서초경찰서는 원주에서 메모의 원본이 올라오는 대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보내 필체 감정을 할 예정이다.

피해자 입장 외면 다시 한번 상처

갑작스럽고 억울한 죽음만으로도 깊은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는 범죄 피해자의 가족들. 그러나 섣부르고 경솔한 경찰의 사건 처리로 인해 이들은 더욱 깊은 상처를 입고 있다. “경찰은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무조건 치정 관계로 몰아가려고 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명예를 회복하는 방법은, 애초에 딸의 죽음을 세상에 잘못 알린 경찰에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9월7일 서울고등검찰청도 유 씨의 항고를 기각했다. 유 씨는 “대검찰청에 항고하고, 그래도 안 되면 헌법재판소까지 갈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경찰이 정중하게 사과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명예훼손 고소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2005년 7월 원주경찰서로 찾아갔을 때 경찰관이 저에게 ‘옷 벗을 각오가 되어 있으니 맘대로 하라’고 하더군요. 한 경찰관은 서울 서부지검 피해자지원센터에까지 올라와서는 저보고 ‘너무하십니다’라는 말만 반복했고요. 정말 어느 누구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주지 않았습니다.”



주간동아 557호 (p34~35)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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