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9

2006.11.07

자취생 상징으로, 사랑의 매개체로

  • 이서원 자유기고가

    입력2006-11-06 11: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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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취생 상징으로, 사랑의 매개체로

    ‘꽃피는 봄이 오면’

    1978년 김기영 감독의 영화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에는 라면을 세상에서 가장 맛없게 끓이는 한 남자가 나온다. 바로 주인공 영걸이다. 그는 라면을 끓이는 데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한 손으로 봉지를 뜯어 냄비에 면과 스프를 넣은 뒤 불을 켜고 몇 번 휘저은 다음 그냥 먹는다. 그래 놓고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니 그냥 죽는 게 낫겠다고 투덜거린다. 조금만 신경 써서 끓이고 달걀이라도 하나 풀어 넣는다면 라면도 그렇게 못 먹을 음식은 아니다.

    또 같은 라면이라도 먹는 연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느껴지는 맛이 다르다. 예를 들어, 일일 연속극 ‘열아홉 순정’에서 주인공 국화(구혜선)가 끓이는 라면은 영걸의 라면과 재료 면에서 특별히 다르지 않다. 하지만 주인공이 라면을 워낙 맛있게 먹어서, 보고 있노라면 군침이 돈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와 ‘열아홉 순정’에서 라면은 가난하거나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적절한 소품으로 활용됐다. 즉,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에서 라면은 의미 없이 반복되는 지옥 같은 일상을, ‘열아홉 순정’에선 배고프고 서글픈 현실을 대변한다.

    최근에 나온 영화 중 라면을 가장 적절히 활용한 작품은 ‘꽃피는 봄이 오면’이다. 영화배우 최민식이 가난한 탄광 마을 학교의 밴드부 지도교사를 연기하는 이 영화에서 그가 먹는 건 오로지 라면이다. 그나마도 그릇에 따로 담지 않고 냄비째, 주변에 지저분하게 흘리면서 먹는다. 이 영화에서 라면은 주인공이 전형적인 게으름뱅이 자취생처럼 살고 있음을 상징한다.

    ‘봄날은 간다’에서 라면은 이영애와 유지태를 맺어주는 도구로 변한다. 이영애는 집 앞까지 따라온 유지태에게 사심이 없는 듯한 태도로 가볍게 묻는다. “라면 먹고 가지 않을래요?” 이 말에 유지태는 곧바로 이영애의 아파트로 들어간다.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에서는 마침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김남진이라는 걸 알게 된 배두나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읊는 대사 “라면이 없어, 라면이 먹고 싶은데”는 사랑을 고백하는 밸런타인데이 카드처럼 사용됐다.

    물론 다른 식의 접근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일본 영화 ‘담뽀뽀’의 라면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스턴트식품이 아닌 하나의 명품 요리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라면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다르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가 만들어진 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라면도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다양해졌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라면은 우리에게 가장 값싸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식품일 뿐이다.



    영화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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