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그룹은 2000년 11월20일 독일 바스프사와 계약을 하고 한화석유화학 지분 일부를 1억1000만 달러에 넘기기로 했다(좌).<br>1998년 10월29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 (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오른쪽에서 세 번째) 등 구조조정 모범기업 대표를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우).
1998년 2월7일자 한 경제신문 기사가 재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김 회장이 그룹 정상화를 위해 백의종군할 계획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부도나 법정관리 등에 의하지 않고 재벌 오너가 경영에서 물러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더욱이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진영에서는 “은행 빚을 끌어다 쓰면서 오너는 책임지지 않는 풍토를 개선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었기 때문에 재계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앞서 김 회장은 2월4일 계열사 주식과 금융자산, 집문서 등 사재를 담보로 은행권에 5000억원의 협조융자를 요청했다. 한화는 외환위기 이전부터 외국계 금융기관의 자금 회수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여기에 외환위기로 한화에너지가 수입 신용장을 개설할 수 없게 되면서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고, 이에 따라 그룹 해체 소문이 나돌았다.
물론 이 기사는 오보였다. 98년 2월6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회동을 마치고 나오는 김승연 회장에게 경제신문 기자가 “혹시 은행권에서 협조융자를 조건으로 경영권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지 않았는가”라고 묻자 김 회장이 “그룹을 위해 필요하다면 퇴진까지 하겠다는 각오로 대처할 것이다”라고 비장한 심경을 밝혔다. 신문은 김 회장의 이 발언을 ‘당장 퇴진’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결과적으로 회사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 기사를 본 공장 근로자들이 연판장을 돌리면서 ‘우리가 명예퇴직할 테니 회장님은 물러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이 일은 김 회장에게 큰 힘이 됐고, 임직원도 단합하게 됐다. 한화가 이후 구조조정을 차질 없이 추진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분위기도 일조했다.
오랫동안 경영 같이 해온 해외 파트너에 양도
한화의 구조조정은 97년 12월 한화바스프우레탄 지분 매각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이는 외환위기 상황에서 이뤄진 우리나라 기업 최초의 본격적인 구조조정 사례이기도 했다. 한화바스프우레탄은 한화종합화학과 독일 바스프사가 88년 50대 50의 지분으로 설립한 MDI(자동차 내장재로 쓰이는 화학소재) 생산 회사. 한화는 한화 측 지분 50%를 1200억원에 넘겼다.
한화는 이어 98년 1월 한화기계와 일본정공(NSK)사가 합작으로 설립한 한화NSK정밀의 한화 측 지분 50%를 NSK에 200억원에 매각한 것을 비롯해 한화GKN(32억원, 98년 5월), SKF한화(22억원, 98년 10월) 및 한화자동차부품(43억원, 99년 1월) 등의 합작회사 지분을 매각해 한화바스프우레탄 지분 매각 금액을 포함해 총 1497억원을 조달했다.
또 한화기계의 베어링부문과 2건의 화학분야 비주력 사업부문을 매각해 각각 3000억원과 3863억원을 확보했다. 계열사 보유 부동산 32건도 1800억원에 처분했다. 이 밖에 공작기계, 과산화수소 사업부문 매각을 통해 외자 2000억원을 조달했다. 99년 9월에는 그룹 외형의 35%를 차지하는 주력인 한화에너지를 현대정유에 넘겼다. 현대정유가 한화에너지 부채 3조원을 인수하는 일종의 ‘빅딜’이었다.
한화는 한화에너지 매각으로 부채 3조원을 덜어 부채비율을 255%로 낮추고 99년 말에는 180%로 개선할 수 있었다. 한화종합화학, ㈜한화 등 주력 계열사들이 안고 있던 한화에너지 채무보증도 일시에 해소됐다. 그룹 매출액은 12조원 규모에서 7조원대로 떨어졌지만 협조융자 6487억원을 1년 만에 전액 상환하는 감격을 맛보기도 했다.
한화의 구조조정은 오랫동안 경영을 같이 해온 해외의 합작 파트너에게 지분을 양도하는 방식으로 계열사 매각을 추진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당연히 상호신뢰가 밑받침됐고, 해당 회사 근로자들의 고용승계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그러나 한화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김승연 회장은 99년 5월31일 한 세미나에서 “뼈와 살을 깎아내는 고통 정도가 아니라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갈비뼈를 들어내고 폐 하나를 잘라내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한화기계와 한화에너지는 선친으로부터 승계받은 것인데 선친의 사업을 지켜내지 못해 고통스러웠다”는 것.
무엇보다 구조조정 과정에 자금사정이 더 꼬이는 어려움을 겪었다. 한화바스프우레탄 등 3, 4개 기업을 매각했는데 매각 대금을 단자사인 종금사에서 바로 회수해갔다. 한화에너지 매각 추진 사실이 알려지면서 원유 공급사들이 현금이 아니면 원유를 공급해주지 않아 그룹 전체의 자금사정이 더욱 악화된 것.
한화 관계자는 “97년 12월9일엔 한화바스프우레탄 매각 본계약서를 가지고 주거래 은행인 한일은행(현 우리은행)에서 800억원을 긴급 차입해 부도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한화의 자금난은 98년 10월29일 청와대에서 열린 구조조정 우수기업 초청 간담회에 김 회장이 초대받고 난 후 회사채 발행에 성공하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구조조정 과정에 겪은 가장 큰 아픔은 5000여 명의 임직원이 한화를 떠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 노사분규나 잡음이 없었다는 게 한화의 자랑이다. 한화 관계자는 “김승연 회장이 매각되는 회사 구성원들의 고용 안정을 최우선 원칙으로 삼았던 데다 퇴직한 임직원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김승연 회장은 한화에너지 매각 협상이 지루하게 계속되자 99년 3월18일 현대정유 정몽혁 사장을 만나 “20억~30억원은 손해볼 테니 근로자들을 100% 고용승계하는 조건으로 신속히 매듭짓자”고 설득해 극적인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남보다 한발 먼저 착수 … 99년 1차 완료 선언
남보다 한발 먼저 구조조정에 착수한 것도 성공 요인이다. 한화는 외환위기 이전인 96년 10월9일 김 회장의 ‘혁명적 개혁’ 선언을 계기로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그룹 창립 44주년 기념일인 이날 김 회장은 “94년부터 추진해온 ‘제3의 개혁’은 구호나 말로만 떠들어대는 개혁이었다”면서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던 것.
김 회장의 혁명적 개혁 선언에 따라 한화는 적자 사업 정리에 나섰다. 한화종합화학의 조립식 욕실사업이나 한화에너지의 윤활유 사업도 이때 매각했다. 한화 관계자는 “한화바스프우레탄 지분 매각 작업이 그룹 생존이 불확실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이뤄졌음에도 제값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외환위기 이전에 협상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한화는 99년 말 1차 구조조정 완료를 선언했다. 역경을 딛고 구조조정에 성공한 그룹의 새 출발을 축하라도 하듯 한화이글스는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한화이글스가 우승을 확정짓는 순간,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김 회장은 경영난으로 마음고생하던 순간이 떠오르는 듯 눈물을 훔쳤다. ‘구조조정의 마술사’란 찬사를 받은 김 회장이 이날 흘린 눈물은 한화 안팎에서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