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만화책 뒤에 있던 독자 만화란에 가장 많이 그려진 캐릭터는 손의성(69) 선생의 ‘혁 형사’였을 것이다. 매끈하게 쫙 빠진 혁 형사의 모습을 잘 그리면 주위에서 만화 실력을 인정해줄 정도로 혁 형사는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전국의 수많은 만화가 지망생들이 손 선생의 만화 주인공 ‘혁’을 그리면서 만화가의 꿈을 키웠는데, 무협만화를 그리는 황재를 비롯해 지금 활동하고 있는 중견작가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혁 형사는 시원시원하고 멋진 손의성 선생과 닮은 점이 많다. 선생은 ‘신촌 백구두’의 핵심 멤버로 지금도 구두만큼은 전성기 때 모습 그대로 백구두를 신고 다닌다. 그렇다고 선생이 외양만 멋쟁이인 것은 절대 아니다. 선생의 대표작 ‘동경 4번지’에 등장하는 주인공 ‘김혁’처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리의 사나이, 쾌남아로 통한다.
전성기 땐 팬레터가 매일 한 보따리 쌓일 정도
당시 선생의 만화는 한국이 아닌 일본 도쿄를 배경으로 하는데,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당시는 만화에 대한 당국의 검열이 무척 심했다. 열혈남아가 활극을 펼치는 만화조차 검열이 걱정돼 선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생은 배경을 도쿄로 설정한 것이다. 손 선생이 그려 크게 인기를 얻은 무협만화 ‘운명의 4444’와 독립운동 만화 ‘매국노’ ‘동경 4번지’ 등이 모두 검열을 피해 나온 작품이다.
선생의 전성기였던 60년대 중반, 선생은 한 권 원고료로 1만4000원을 받았다. 이 액수는 당시 정부의 고위직 공무원 월급보다 많은 것이다. 이 돈이면 대식구였던 선생의 가족과 문하생들 모두가 매달 생활하고도 3분의 1 가량이 남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거래하던 출판사가 매달 판매 이익금으로 권당 1만6000원씩 더 보내왔으니 결과적으로 권당 3만원의 원고료를 받은 셈이다. 선생은 이 같은 만화를 한 달 평균 5권씩 그렸으니 매달 15만원의 수익을 올렸던 것이다. 이렇듯 많은 돈을 벌자 주위에서 손 벌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 선생은 이 때문에 매우 힘들어하기도 했다.
손 선생은 역시 스타 작가였던 이근철, 하고명, 백산 등과 신촌, 무교동을 누볐는데 웨이터들에게 항상 ‘인기 짱’이었다. 당시는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아 선생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술집에서 ‘손의성’이라는 이름만 대면 클럽의 아가씨와 웨이터들, 그리고 손님들까지 “와~!” 하고 탄성을 지르며 술을 갖다줄 정도였다.
‘동경 4번지’를 그릴 때는 신촌 우체국에 팬레터가 매일 한 보따리 이상 쌓여, 우체국에서 감사패까지 받았다. 선생의 팬레터는 당시 유명 영화배우보다 많았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팬레터에 대한 답장을 착실히 했는데 워낙 편지가 많아 회신을 담당하는 문하생을 따로 두었다. 신혼 초엔 선생의 부인도 하루 종일 편지를 읽고 답장을 쓰는 일에 ‘동원’됐다. 선생의 부인은 편지 말미에 ‘대필 최정희’라고 적었는데, 그 편지를 받은 여러 독자들이 ‘최정희’가 문하생인 줄 알고 찾아오기도 했고, 소개해 달라는 청탁이 들어오는 등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았다고 한다.
선생은 주생주사(酒生酒死)로도 유명하다. 총각 시절에는 밥을 거의 먹지 않고 술만 마시다시피 해 몸이 깡말랐다. 어느 날 검문에 걸렸는데 경찰이 아편쟁이인 줄 알고 팔에 주삿바늘이 있는지 검사할 정도였다고 한다.
최근 방송인 강석 씨 등 올드팬들 모여 팬클럽 결성
선생은 성인만화에서도 크게 히트했는데 뜻하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선생의 대표작인 ‘복수’와 ‘도시의 킬러’ 등은 경고와 함께 판매금지를 당했다. 지금 보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지만 당시 선생의 그림은 사실적인 데다 스토리 전개가 빠르고, 와일드한 활극이 주를 이뤘기 때문에 유독 심의가 심했다. 선생은 그 책들을 회수해 원고를 수정하고 다시 찍어야만 했다.
선생의 작품에 대해 일본 것을 베꼈다느니 하는 소리가 간혹 들리는데 이는 선생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 선생은 일본과 일본 만화를 싫어하고 일본 만화를 베끼는 후배조차 싫어한 사람이다. 선생은 미국에 갔다가 도쿄에 잠깐 기착할 때 나리타 공항을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아직 일본 땅을 공식적으로 밟지 않았다. ‘동경 4번지’로 인기를 얻은 선생이 일본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선생의 올드팬들이 인사동에 모여 팬클럽을 결성했다. 지금은 사회 지도층이 된 50대 인사들로 교수, 소설가, 박사, 방송인 등이 주류를 이뤘다. 그들은 어린 시절 우상이던 선생이 생존한 것만으로도 열광했다. 그중 열혈팬인 방송인 강석은 선생을 만날 수 있다면 다음 날 방송 스케줄이 있어도 폭탄주를 마시면서 추억을 이야기하겠노라며 찾아왔고, 나중에 선생 생일에 꽃다발과 와인을 보내 오랫동안 존경해온 마음을 전달하기도 했다.
선생은 처음부터 스타 작가였고, 지금까지도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스타로서 인생 대부분을 보낸 선생이기에 인생을 재미있게, 신나게, 행복하게 산 작가였노라고 회상한다. 선생만큼 행복한 만화가가 또 있을까.
혁 형사는 시원시원하고 멋진 손의성 선생과 닮은 점이 많다. 선생은 ‘신촌 백구두’의 핵심 멤버로 지금도 구두만큼은 전성기 때 모습 그대로 백구두를 신고 다닌다. 그렇다고 선생이 외양만 멋쟁이인 것은 절대 아니다. 선생의 대표작 ‘동경 4번지’에 등장하는 주인공 ‘김혁’처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리의 사나이, 쾌남아로 통한다.
전성기 땐 팬레터가 매일 한 보따리 쌓일 정도
손의성 선생의 만화 표지와 대표적 캐릭터인 ‘혁 형사’.
선생의 전성기였던 60년대 중반, 선생은 한 권 원고료로 1만4000원을 받았다. 이 액수는 당시 정부의 고위직 공무원 월급보다 많은 것이다. 이 돈이면 대식구였던 선생의 가족과 문하생들 모두가 매달 생활하고도 3분의 1 가량이 남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거래하던 출판사가 매달 판매 이익금으로 권당 1만6000원씩 더 보내왔으니 결과적으로 권당 3만원의 원고료를 받은 셈이다. 선생은 이 같은 만화를 한 달 평균 5권씩 그렸으니 매달 15만원의 수익을 올렸던 것이다. 이렇듯 많은 돈을 벌자 주위에서 손 벌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 선생은 이 때문에 매우 힘들어하기도 했다.
손 선생은 역시 스타 작가였던 이근철, 하고명, 백산 등과 신촌, 무교동을 누볐는데 웨이터들에게 항상 ‘인기 짱’이었다. 당시는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아 선생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술집에서 ‘손의성’이라는 이름만 대면 클럽의 아가씨와 웨이터들, 그리고 손님들까지 “와~!” 하고 탄성을 지르며 술을 갖다줄 정도였다.
‘동경 4번지’를 그릴 때는 신촌 우체국에 팬레터가 매일 한 보따리 이상 쌓여, 우체국에서 감사패까지 받았다. 선생의 팬레터는 당시 유명 영화배우보다 많았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팬레터에 대한 답장을 착실히 했는데 워낙 편지가 많아 회신을 담당하는 문하생을 따로 두었다. 신혼 초엔 선생의 부인도 하루 종일 편지를 읽고 답장을 쓰는 일에 ‘동원’됐다. 선생의 부인은 편지 말미에 ‘대필 최정희’라고 적었는데, 그 편지를 받은 여러 독자들이 ‘최정희’가 문하생인 줄 알고 찾아오기도 했고, 소개해 달라는 청탁이 들어오는 등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았다고 한다.
선생은 주생주사(酒生酒死)로도 유명하다. 총각 시절에는 밥을 거의 먹지 않고 술만 마시다시피 해 몸이 깡말랐다. 어느 날 검문에 걸렸는데 경찰이 아편쟁이인 줄 알고 팔에 주삿바늘이 있는지 검사할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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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방송인 강석 씨 등 올드팬들 모여 팬클럽 결성
선생은 성인만화에서도 크게 히트했는데 뜻하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선생의 대표작인 ‘복수’와 ‘도시의 킬러’ 등은 경고와 함께 판매금지를 당했다. 지금 보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지만 당시 선생의 그림은 사실적인 데다 스토리 전개가 빠르고, 와일드한 활극이 주를 이뤘기 때문에 유독 심의가 심했다. 선생은 그 책들을 회수해 원고를 수정하고 다시 찍어야만 했다.
선생의 작품에 대해 일본 것을 베꼈다느니 하는 소리가 간혹 들리는데 이는 선생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 선생은 일본과 일본 만화를 싫어하고 일본 만화를 베끼는 후배조차 싫어한 사람이다. 선생은 미국에 갔다가 도쿄에 잠깐 기착할 때 나리타 공항을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아직 일본 땅을 공식적으로 밟지 않았다. ‘동경 4번지’로 인기를 얻은 선생이 일본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선생의 올드팬들이 인사동에 모여 팬클럽을 결성했다. 지금은 사회 지도층이 된 50대 인사들로 교수, 소설가, 박사, 방송인 등이 주류를 이뤘다. 그들은 어린 시절 우상이던 선생이 생존한 것만으로도 열광했다. 그중 열혈팬인 방송인 강석은 선생을 만날 수 있다면 다음 날 방송 스케줄이 있어도 폭탄주를 마시면서 추억을 이야기하겠노라며 찾아왔고, 나중에 선생 생일에 꽃다발과 와인을 보내 오랫동안 존경해온 마음을 전달하기도 했다.
선생은 처음부터 스타 작가였고, 지금까지도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스타로서 인생 대부분을 보낸 선생이기에 인생을 재미있게, 신나게, 행복하게 산 작가였노라고 회상한다. 선생만큼 행복한 만화가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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