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대성, 서재응, 박진만, 이종범, 박찬호, 이승엽 (위부터).
한국이 3월14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미국을 이겼을 때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는 이렇게 놀라움과 경악을 표시했다.
해외파 선수들이 합류한 이번 대표팀은 한국 야구 101년 역사상 최고의 드림팀이었다. 그들은 ‘아시아의 맹주’ 일본을 거푸 격파했고, 세계 최강을 자부하는 미국을 무너뜨렸다.
세계를 놀라게 한 대표팀의 쾌거는 한국 야구의 영웅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부상으로 교체된 김동주를 포함해 31명의 출전 선수 모두가 ‘변방’의 한국 야구를 ‘만방’에 알린 일등 공신이다. 그중에서도 박찬호, 이종범, 박진만, 구대성, 이승엽의 활약은 돋보였다.
연봉이 1500만 달러인 선수, 세계 최고의 무대 메이저리그에서 100승을 돌파한 선수. 그런 선수가 “나라가 원한다면 기꺼이 뛰겠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자존심을 구겨가면서 “반드시 선발투수가 아니어도 좋다, 불펜투수라도 감수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더욱 힘들다.
백의종군 박찬호, 선발·마무리 오가며 마당쇠 역할 완벽 수행
그러나 ‘코리안 특급’ 박찬호(33·샌디에이고)는 그렇게 했다. 지난해 12월 WBC에 참가하는 한국대표팀이 구성될 무렵, 박찬호는 해외파 선수 가운데 가장 먼저 출전 의사를 밝혔다. 백의종군의 뜻도 확실히 했다. 서재응(LA 다저스), 김병현(콜로라도) 등 메이저리그 후배들도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대표팀의 일본 전지훈련이 한창이던 2월 말. 박찬호는 또 한번 고민에 빠졌다. 소속팀 샌디에이고가 스프링캠프를 열었는데, 구단은 박찬호가 한국대표팀에 늦게 합류하기를 바랐다. 박찬호 개인적으로도 올해는 5년 장기계약이 끝나는 해로 치열한 선발 경쟁에 매진해야 할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박찬호는 망설임 없이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박찬호는 대표팀의 ‘입’ 노릇도 했다. 일본대표팀의 간판 선수 이치로가 “한국이 향후 30년간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했을 때 박찬호는 “이치로가 고민 좀 되겠다. 앞으로 한국을 만날 때마다 부담이 될 것 같다. 자꾸 한국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우리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맞받아쳤다. 박찬호 덕분에 한국은 경기 전 ‘기 싸움’에서 일본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번 대회에 출전한 박찬호의 능력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기량이 하향세에 접어들었다는 게 대세였다. 그러나 이번 대회는 박찬호를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였다.
3월3일 대만전에서 박찬호는 뜻밖의 마무리 투수로 기용돼 한국팀의 승리를 지켜냈다. 3월5일 일본전은 더욱 극적이었다. 역시 마무리로 한 점 차 승부를 지켰는데 공교롭게도 마지막 타자가 이치로. 이치로는 박찬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미국에서 열린 본선 라운드에서 박찬호는 마무리와 본업인 선발투수를 오가며 전천후로 나섰다. 모두 대성공이었다.
3월14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 에인절스타디움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라운드 한국-미국의 경기에서 한국 교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하고 있다.
‘큰형님’ 이종범, 분위기 메이커로 장외에서도 일등 공신
‘머리가 다 큰’ 선수들에게 합숙은 힘든 일이다. 특급 스타들이 모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WBC 한국대표팀도 처음엔 걱정이 많았다. 선수들끼리, 특히 박찬호를 비롯한 해외파 선수들과 국내파 선수들이 잘 융합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대표팀은 첫 단추를 잘 끼웠다. 이종범(36·기아)을 주장으로 뽑은 것이다. 대회 기간 내내 이종범의 카리스마는 곳곳에서 발휘됐다.
대회 직전 이종범은 “이번이 나에게는 태극 마크를 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고 말했다. 이 같은 각오 때문이었을까. 이종범이 한국 야구에 남긴 마지막 선물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2월19일부터 일본 후쿠오카에서 시작된 전지훈련. 밤이면 밤마다 선수들은 이종범의 방으로 모여들었다. 선수들이 야구 이야기와 인생 이야기, 그날 있었던 사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통에 이종범의 방은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이종범 덕에 경기를 치를수록 팀 분위기는 점점 좋아졌다. ‘팀 케미스트리(team chemisty·팀 조화 또는 팀 화합)’가 최고조에 이른 것은 이종범의 공이다. 어느 순간부터 큰형님 이종범의 말 한마디에 해외파를 포함한 선수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객관적인 전력의 열세에도 일본과 미국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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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5일 WBC 아시아 예선에서 일본을 이긴 한국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일본에서 열린 WBC 아시아 예선과 미국 본선에서 그는 말 그대로 펄펄 날았다. 3월5일 일본전에서는 몸에 맞는 공 2개와 안타로 일본을 꺾는 데 견인차 구실을 했고, 3월16일 본선 3차전에서는 0대 0이던 8회 극적인 좌중간 2루타로 일본 격파의 선봉에 섰다. 이 한 방으로 한국은 전승으로 4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박찬호의 솔선수범과 이종범의 리더십이 팀의 사기를 높였다면 탄탄한 수비와 마운드는 실제 경기에서 승리의 주춧돌이 됐다.
박진만 중심의 내야 수비에 각 팀 감독들 ‘깜짝’
3월13일 멕시코와의 경기가 끝나고 파퀸 에스트라다 멕시코 감독에게 물었다. 한국 선수 중 누가 가장 인상적이었냐고. 대답은 “유격수를 본 선수”였다. 3월14일 미국전이 끝나고 같은 질문을 했다. 벅 마르티네스 미국 감독 역시 “유격수로 뛴 친구”라고 답했다. 3월3일 대만과의 예선 첫 경기에서도 같은 질문을 했다면 린화웨이 감독 역시 “유격수 때문에 졌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름까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플레이에 매료된 것이었다. 주지하듯, 상대팀 감독들을 매료시킨 유격수는 이번 대회의 ‘숨은 MVP’ 박진만(30·삼성)이다.
이번 대회에서 박진만이 지키는 한국 내야는 단연 세계 최강이었다. 매 경기 상대팀 선수들의 어깨 힘을 쭉 빠지게 만드는 진기명기급 수비가 나왔다. 미국전에서 박진만은 치퍼 존스(애틀랜타)의 강습 땅볼 타구를 넘어지면서 잡아 등을 바닥에 댄 상태에서 병살타로 연결시켰다. 대만전에서도 9회 동점이 되는 중전 안타성 타구를 슬라이딩 캐치, 한국의 승리를 지켰다.
홈런을 때리는 타자도, 결승타를 치는 선수도 아니지만 9명이 서는 그라운드에서 박진만의 존재감은 확연히 눈에 띄었다. 흔히 좋은 수비가 나왔을 때 ‘메이저리그급 수비’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바로 그 메이저리거들조차 “훌륭하다”고 인정할 만큼 박진만의 수비는 빼어났다.
박진만을 키운 건 김재박 현대 감독이다. 96년 입단 당시 수비 능력 빼곤 볼 것이 없던 박진만을 명(名)유격수 출신인 김 감독은 한눈에 알아봤다. 틈만 나면 일대일 교육을 했고, 꾸준히 출장 기회를 줬다. 방망이가 부진하다고 해서 빼는 일도 없었다. 김 감독의 믿음을 먹고 자란 박진만은 수비뿐 아니라 공격에서도 한몫을 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2004년 시즌 후 자유계약선수(FA)로 풀렸을 때 삼성은 4년간 최대 40억원의 거액을 주고 박진만을 잡았다. 어지간한 거포나 15승 투수도 받기 힘든 돈이었다. 박진만은 자신의 가치를 WBC를 통해 다시 한번 증명해 보였다.
마운드의 맏형인 구대성(38)은 ‘국제적’ 선수다. 프로야구가 인기 스포츠인 한국, 미국, 일본에서 그를 모르는 야구팬은 거의 없다. 90년대 후반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왼손 투수였으니 한국에선 두말할 나위가 없고, 2001년부터 4년간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에서 뛰었으며 미국 팬들은 ‘쿠(Koo)’라는 애칭으로 구대성을 기억한다.
구대성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지도가 높은 것은 그가 뉴욕 메츠에서 뛰면서 빼어난 성적을 올렸기 때문이 아니라 지난해 5월22일 뉴욕 양키스전에서 친 사고(?) 덕분이다. 그날 구대성은 타석에서 세기의 왼손 투수인 랜디 존슨을 상대로 2루타를 쳤다. 후속 타자의 보내기 번트 때는 야수들의 방심을 틈타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홈을 밟았다. 이를 통해 구대성은 ‘재치 있는 투수’라고 미국 팬들에게 각인돼 있다.
이번 대회에서 그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전성기 시절 기량을 선보였다. 미국, 일본, 대만, 멕시코전 등 주요 경기에서 어김없이 마운드에 올랐고 상대를 철저히 막았다. 선동열 투수 코치(삼성 감독)는 “우리 팀에서 가장 믿을 만한 투수는 구대성이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잘할 수 있었을까 싶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구대성은 ‘동네 아저씨’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마운드에만 오르면 사람이 달라진다. 타자와의 수 싸움에 능하고 공격적인 투구를 한다. 전성기에 비해 구속은 많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구석구석에 공을 꽂아 넣는다. “나이는 먹었지만 체력은 20대와 같다”는 그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지금쯤 구대성을 버린 뉴욕 메츠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쓰린 속을 부여잡고 땅을 치고 있지는 않을까. 지난 시즌을 마지막으로 뉴욕 메츠에서 방출된 구대성은 최근 한화와 5억5000만원에 계약했다.
투타의 핵 구대성과 이승엽 ‘역시 이름값’
이승엽을 빼놓고 ‘영웅 얘기’를 마무리할 수는 없다. 삼성 시절이던 2003년 이승엽은 56개의 홈런을 쳤다. 이는 오사다하루(55개·일본 국가대표팀 감독)의 기록을 뛰어넘은 한 시즌 아시아 홈런 신기록. 그러나 일본 언론은 마지못해 인정하는 분위기였고, 메이저리그에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3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세계 야구는 이승엽을 주목하고 있다. 일본 기자들은 “스고이(대단하다)”를 연발했으며, 미국 기자들은 이승엽이 누구인지를 취재하느라 분주했다. 미국 최고의 권위지 중 하나인 뉴욕타임스는 이승엽을 위한 특별 인터뷰를 황급히 마련하기도 했다.
이번 대회에서 이승엽의 활약은 따로 말이 필요 없다. 3월5일 아시아 예선 일본전에서의 8회 역전 결승 홈런에 도쿄돔을 가득 메운 관중은 숙연해졌고, 이승엽이 3월14일 미국전에서 지난해 메이저리그 다승왕인 돈트렐 윌리스에게 선제 결승 홈런을 터뜨리자 전 미국이 경악했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는 “이승엽의 방망이는 다이너마이트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방망이를 세게 휘두를 필요가 없다”고 극찬했다. 마크 테익세라(텍사스)를 비롯한 메이저리그 선수들 역시 “그가 왜 아직 아시아 무대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의 ‘국민 타자’가 아시아를 넘어 최고의 무대인 메이저리그에서도 홈런 타자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이승엽을 슬러거로 만든 곳은 한국이지만, 세계적 타자로 키운 곳은 일본이다. 일본 프로야구에서의 시련이 세계가 인정하는 홈런 타자가 되는 디딤돌이 된 것이다. 일본 진출 첫해인 2004년 그는 난생처음 2군을 경험했다. 그는 사석에서 “야구를 포기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때 흘린 피와 땀이 고스란히 지금의 결실로 돌아온 셈이다.
2003년 시즌 직후 이승엽은 헐값을 제시한 LA 다저스의 제안을 뿌리치고 일본 지바롯데에 입단했다. “한국의 국민타자가 무시를 당하면서 미국에 가고 싶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승엽은 이제 미국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한눈에 받는 특급 스타가 됐다. “지금도 내 꿈은 여전히 메이저리거”라는 그는 올 시즌을 마친 뒤 당당하게 미국 땅을 밟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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