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42

2006.07.04

어떤 사진에 강렬한 ‘필’이 꽂히는 이유는

대부분 관습적 독해 코드로 이미지 읽기 … 메시지 담긴 사진 감동이 살아 있어

  •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입력2006-07-03 11: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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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진에 강렬한 ‘필’이 꽂히는 이유는

    마이클 스노, ‘Authorization-사진사의 초상’, 1969.

    캐나다 오타와 국립미술관에 가면 재미있는 작품이 있다. 전시실 벽에 거울이 걸려 있고, 그 매끈한 표면 위에 다섯 장의 사진이 붙어 있다. 넉 장은 거울의 중앙에 함께 배치되어 있고, 나머지 한 장은 뚝 떨어져 왼쪽 상단에 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사진사가 거울 앞에 서서 폴라로이드카메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찍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먼저 그는 텅 빈 거울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즉석에서 현상된 사진은 거울에 테이프로 표시된 사각형의 한쪽 귀퉁이에 붙여진다. 그것이 거울 속 사진사의 모습을 4분의 1가량 잡아먹는다. 이어서 같은 위치, 같은 각도에서 또 한 번 셔터를 누른다. 곧바로 카메라 밑으로 삐져나온 사진은 앞 사진의 오른쪽에 나란히 붙여진다. 이제 사진을 찍는 사진사의 모습은 절반이 가려졌다.

    이어서 같은 방식으로 다시 셔터를 누른다. 이번 사진은 두 사진의 아래쪽에 배치되고, 이로써 사진사의 모습은 4분의 3이 사라진다. 이제 다시 그것을 찍어 남은 귀퉁이에 붙이면 테이프로 표시된 거울 위의 사각형에서 작가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다. 그럼 이제 찍을 것은 하나뿐이다. 사진사를 집어삼켜 버린 넉 장의 사진. 그것을 찍은 마지막 사진은 거울의 왼쪽 상단으로 올라간다.

    사진적 행위

    “주체는 자신의 복제 때문에 점진적으로 매장되고, 언제나 이미 지나간 순간을 고착시키는 재현에 의해 각각의 조준과 촬영 순간마다 조금씩 삼켜지고 지워진다.” 여기서 “주체는 사진적 행위에 의해, 그리고 그 행위 속에서 완전히 용해된다.” 주체가 사라진 곳에 남는 것은 작가의 얼굴을 집어삼킨 다섯 장의 사진으로 표상되는 것, 즉 사진을 찍는 이미지 행위(image-acte)뿐이다.



    어떤 사진에 강렬한 ‘필’이 꽂히는 이유는

    디에고 벨라스케즈,‘시녀들’, 1656.

    ‘사진적 행위’에서 필립 뒤바는 이 작품에 자신의 논지 전체를 암시하는 ‘상징의 역할’을 맡긴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벨라스케즈의 ‘시녀들’을 에피스테메론의 엠블럼으로 삼아 그것을 회화의 회화, 즉 고전주의적 표상의 표상으로 규정한 바 있다. 뒤바 역시 이 캐나다 작가의 작품을 사진의 사진, 즉 사진 찍기의 사진으로 푼다. ‘Authorization-사진사의 초상’(1969)이라는 제목은 ‘작가에게 권한을 부여한다’고 말하나, 정작 작품에서 사진사는 점차 지워진다.

    이는 물론 당시에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이라 부르고, 탈근대 철학자들이 ‘주체의 죽음’이라 불렀던 것의 사진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미학에서는 예술가를 타고난 ‘천재’로 보든, 아니면 후천적인 ‘장인’으로 보든 작품을 작가의 주체성의 표현으로 보았다. 하지만 현대 예술가들은 종종 자신을 ‘영매’로 간주하곤 한다. 이 경우 작품은 작가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어떤 객관적인 사태가 벌어지는 사건의 성격을 띠게 된다.

    실재의 거울

    뒤바는 이 작품을 작가의 주관성의 표현이 아니라 사진 그 자체의 작동(une mise en acte)으로 본다. 이는 물론 진리의 발동(ins Werk Setzen)이라는 하이데거의 개념을 불역한 것이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나 작품이 아니라 ‘그린다’는 행위 자체다. 뒤바 역시 스노의 작품에서 작가를 지우고 그것을 ‘찍는다’는 행위로 환원시킨 뒤, 이제까지 사진 이론에서 그 행위의 본질을 어떻게 파악해왔는지 추적해 들어간다.

    어떤 사진에 강렬한 ‘필’이 꽂히는 이유는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 ‘포토제닉 드로잉’, 1840.

    사진 이론의 역사를 재구성하려면 먼저 퍼스의 기호학을 알아야 한다. 퍼스는 기호를 크게 도상, 지표, 상징의 세 가지로 나누었다. 도상(icon)은 흔히 보는 그림처럼 ‘유사성’을 토대로 한 기호. 지표(index)는 남편의 와이셔츠에 묻은 루즈가 그의 바람기를 의미하듯이 ‘인과성’을 토대로 한 기호. 상징(symbol)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처럼 지시 대상과 아무런 유사성이나 인접성 없이 그저 관습과 협약에 따라 사용되는 ‘무연성(無緣性)’의 기호다.

    사진도 일종의 기호라면, 이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 처음에 카메라가 발명됐을 때 당장 사람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사진이 현실을 빼어나게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사진은 현실을 쏙 빼닮은 도상기호였다. “사진과 영화는 그 속성상 사실주의의 강박관념을 충족시켜 준다.” 현대 회화가 재현의 과제를 사진에 넘겨주고 추상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19세기 사진 이론에서 사진은 무엇보다도 ‘실재의 거울’이었다.

    실재의 변형

    하지만 우리는 이게 얼마나 소박한 생각인지 잘 알고 있다. 사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변형해서 보여준다. 루돌프 아른하임에 따르면 사진을 찍을 때 우리는 이미 관습적 도식, 즉 문화적으로 형성된 지각의 코드를 적용한다. 인류학의 연구 역시 문명 이전 사회에 사는 부족들은 종종 사진을 보고도 이해를 못한다고 보고한다. 이 역시 사진의 바탕에는 해독을 위해서 따로 배워야 할 어떤 관습적 코드가 깔려 있기 때문일 게다.

    사진은 거울처럼 실재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게 아니라 대개는 현실을 변형시켜 제시한다. 가령 지난번에 본 로젠탈의 사진은 연출된 장면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굳이 인위적으로 연출하지 않아도 사진이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건 아니다. 무엇을 찍을까, 어떻게 찍을까를 결정할 때부터 이미 사진 속에 찍히는 세계는 찍는 사람의 머릿속의 관념에 따라 변형되게 마련이다. 사진은 세계의 그림이기 이전에 그것을 찍는 이의 머릿속 그림이다.

    어떤 사진에 강렬한 ‘필’이 꽂히는 이유는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 ‘포토제닉 드로잉’, 1840.



    이 때문에 ‘카이에 뒤 시네마’ 그룹에서는 사진의 바탕에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고 보았다. 사진은 그림이기 이전에 관념이라는 것이다. 사진이 일종의 감추어진 텍스트라면, 그것은 도상기호가 아니라 상징기호가 되는 셈이다. 20세기 초의 사진 이론은 사진을 세계의 거울이 아니라 ‘실재의 변형’으로 보았다. 사진은 세계를 찍는 이의 관념에 맞게 세계를 변형시켜 제시한다. “글자를 모르는 자가 아니라 사진을 못 읽는 자가 미래의 문맹이 될 것”이라는 베냐민의 언급도 이와 관련이 있다.

    실재의 자국

    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 사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등장한다. 이미 루돌프 아른하임은 “물리적 대상들은 그들의 이미지를 빛의 광학적, 화학적 반응을 통해 스스로 자국으로 남긴다”고 말한 바 있다. 엄밀히 말하면 사진은 도상기호가 아니다. 사진기는 현실을 재현할 ‘의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반사광과 감광물질 사이의 광학적, 화학적 인과관계뿐이다.

    이는 특히 포토그램에서 잘 나타난다. 탈보트는 피사체를 인화지 위에 올려놓고 바로 현상하는 ‘포토제닉 드로잉’을 선보였다. 만 레이 같은 예술가도 비슷한 작업을 남겼는데, 그는 여기에 ‘레이요그래피’라는 이름을 붙였다. 로잘린 크라우스의 말대로 “포토그램은 모든 사진에 적용되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거나 명확하게 한다. 모든 사진은 빛의 반사에 의해 감광면 위로 이동된 물리적 자국의 결과다.”

    어떤 사진에 강렬한 ‘필’이 꽂히는 이유는

    로버트 카파, ‘인민전선 병사의 죽음’, 1936.

    물론 사진은 분명히 사물과 사람을 닮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물리적 효과, 즉 사실적인 모방 개념과 상관없는 빛 자체의 물질효과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무엇보다도 그 본성상 지표기호라고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사진은 실재의 거울, 실재의 변형을 거쳐 마침내 ‘실재의 자국’이 되었다. 이렇게 20세기 후반에 사진 이론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 ‘카메라 루시다’다.

    스투디움과 푼크툼

    우리는 사진의 의미를 독해할 수가 있다. 가령 흑인 장교가 프랑스의 삼색기에 경례를 하는 사진이 있다고 하자. 거기서 우리는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즉 ‘조국 프랑스는 피부 색에 상관없이 누구나 프랑스군의 장교로 받아들인다. 삼색기는 우리 모두의 조국이며, 그 아래서 피부색이 다른 우리 모두는 하나의 국민이다.’ 이때 그 사진은 프랑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의 시각적 표현이 된다.

    어떤 사진에 강렬한 ‘필’이 꽂히는 이유는

    만 레이, 레이요그래피 ‘키스’, 1935.

    이렇게 사진을 읽을 때 관습적으로 동원되는 독해 코드를 바르트는 ‘스투디움(studium)’이라고 부른다. 스투디움에 대해 무지할 때 우리는 사실상 문맹자가 되어 사진 속 이미지를 그대로 세계의 거울로 생각하는 주술적 의식에 빠지게 된다. 때문에 사진의 의미를 읽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투디움을 이해해야 한다. 이로써 사진은 상징기호가 된다. 하지만 사진의 본질이 과연 그런 일반적인 해석의 틀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가끔 어떤 사진을 볼 때, 그 모든 의미의 해석에 앞서 이른바 ‘필이 꽂히는’ 체험을 하게 된다. 스페인 내전 당시 인민전선의 병사가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을 포착한 로버트 카파의 사진을 생각해보라. 이런 강렬한 체험을 일으키는 것은 그 사진의 의미를 읽게 해주는 ‘일반적’ 해석의 틀이 아니라 그 사진의 ‘개별적’ 존재가 찌르는 고유한 효과다. 이는 곧 사진이 우리 신체에 남긴 ‘자국’이라 할 수 있다. 이 촉각적 효과를 바르트는 ‘푼크툼’(punctum)이라고 부른다. 사진의 진정한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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