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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배우는 논술

100년 전의 세계화, 총과 칼의 만남

  • 박진성 도서출판 늘품미디어 상임연구원

100년 전의 세계화, 총과 칼의 만남

현재 국내적으로나 세계적으로 가장 첨예한 의제 중 하나는 세계화(globalization), 더 정확하게는 세계화와 그것에 대한 반작용(또는 대응)으로서의 지역화(localization)의 긴장과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세계화는 자본과 인력의 국경 없는 교류와 교역이 증가하여 국가 간 상호 의존도가 증대하고, 그것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각종 제도와 규칙이 국제적으로 표준화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경제적 측면에서의 세계화와 함께 자연스레 논의되는 것이 바로 세계화의 문화적 측면이다. 경제 영역에서 세계화를 주도하는 초국가적 거대자본은 ‘초국가 미디어 산업’에 의한 세계적인 대중문화를 양산함으로써 특정 문화를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킨다. 이 글에서 살펴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라스트 사무라이’ 역시 거대자본이 생산해낸 문화 상품의 하나다. 문화적 측면에서의 세계화는 ‘서구적 문명화’로 귀결되는 경향이 강하고, 이런 문화적 획일성은 다른 문화의 파괴와 해체에 따른 문화적 다양성의 훼손으로 이어진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세계화의 특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단어는 바로 ‘단일성’이라 할 수 있다. 국가 간 자본과 인력의 유통을 원활히 하는 단일한 제도, 무역규칙, 단일한 상품이 보편적으로 유통되는 단일한 시장, 업무의 효율성과 인력 고용의 유동성을 높이는 단일한 언어와 단일한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은 세계화를 지탱하는 힘이다. 예컨대 우리가 흔히 쓰는 컴퓨터 OS인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프로그램은 단일한 언어와 소프트웨어의 전형이다. 영어를 기반으로 프로그래밍된 ‘윈도’는 전 세계 컴퓨터 OS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으며,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MS Window라는 단일한 ‘창(window)’을 통해 세계와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적 측면에서의 세계화는 특정한 지배적 문화를 유일한 삶의 양식으로 재생산하고 확산시키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화와 민족문화의 관계’는 논술의 주제로서 매우 중요하다. 세계화와 문화적 다양성의 문제를 한국 영화시장의 개방 논의와 관련시켜 학생의 생각을 밝힐 것을 요구한 경희대 2004학년도 수시 1학기 문제와, 문화적 다양성과 문화 사이의 관계를 물은 고려대 2005학년도 수시 2학기 논술시험이 대표적인 예다. 또한 ‘국가들 간의 관계를 국제적으로 규제하는 것이 필요하고 정당한가’를 물은 98년 고려대 문제 역시 세계화와 관련된 것이다. 국가적, 국제적 현안인 세계화 논제는 논술의 주제로 출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Once Upon A Time In Asia’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배경은 1876년의 일본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130년 전 일본의 근대화(메이지유신) 과정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1876년이라는 특정 연도가 지니는 상징성 때문이다. 한국 근대사에 있어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인식되는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해이기도 한 1876년, 비슷한 시기에 일본 역시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9세기 말 동아시아의 근대화는 곧 서구화를 의미했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게 없는 사실이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근대화에 의해 소멸돼가는 ‘마지막 무사’에 관한 이야기다. 130년 전 일본의 사무라이들과 동아시아인들이 겪었던 근대화(서구화)의 경험과 현재 우리가 겪는 세계화의 경험은 상당히 유사하다. 예컨대, 미국인 대위 네이든 알그렌(톰 크루즈 분)을 거액의 연봉을 주고 신식 군대의 교관으로 스카우트하는 일본 정부 관료의 모습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당시 근대화는 자본을 매개로 이루어졌다. 미국 경제학자 폴 스위지(Sweezy, Paul Marlor)의 견해에 따르면, 세계화의 특징인 세계적인 시장의 확대와 자본 수출은 현재보다 19세기 말에 더욱 활발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은 19세기 말 당시 외국 차관이 조선과 중국을 옥죄어 식민지화를 가속화했던 역사적 사실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한편, 신식 군대 체제의 도입으로 인해 무사계급이 몰락하는 영화 스토리는 19세기 말의 근대화가 동아시아 전통적 삶의 양식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역의 고유한 삶의 양식이 곧 전통문화의 일부분임을 감안할 때, 당시 이 같은 변화는 세계화로 인해 지역 문화의 고유성이 상실되는 현재의 상황과 상통한다. 예컨대 교토에 입성한 가쓰모토(와타나베 켄 분)의 아들 노부타다가 ‘사무라이 금지법’에 따라 신식 군인들에 의해 상투를 잘리고 사무라이의 생명과도 같은 칼을 빼앗긴 채 오열하는 것은 전통문화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처럼 19세기 말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과 현재의 세계화는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130년 전 일본의 근대화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무라이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세계화 과정의 경제적·문화적 성격을 탐색해볼 수 있는 것이다.

세계화와 지역화

세계화든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지역화든 모두 두 문화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이 만남은 권총을 든 미국의 카우보이 알그렌과 일본도(日本刀)를 든 일본의 사무라이 가쓰모토, 두 ‘무사’의 만남으로 형상화된다. 두 문화가 만나는 가운데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문화적 충격 내지 충돌은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미국 군대의 무자비한 인디오 학살을 경험한 알그렌은 ‘야만적인 근대식 군대’에 환멸을 느끼는 인물이다. 가쓰모토의 사무라이 부대와 최초의 전투를 벌이다 포로로 잡힌 알그렌은 가쓰모토의 부하들이 포로의 목을 베는 장면을 목격하고 사무라이 문화의 섬뜩한 야만성을 경멸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사무라이 문화에 무지한 알그렌의 오해에 불과했다. 사무라이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살을 택하는 경우가 흔하다. 보통 할복자살이 명예로운 자살로 추앙받는데, 여기에는 상당한 고통이 따른다. 이런 고통을 빨리 끝내주기 위해 할복 직후, 그 사람의 목을 쳐주는 보조 무사가 바로 ‘가이샤쿠(介錯)’다. 알그렌이 본 것은 단순히 포로를 처형하는 야만적 살인행위가 아니라 무사의 명예를 지키는 숭고한 죽음을 돕는 인도주의적 사무라이 문화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이런 오해를 푼 알그렌은 가쓰모토 아들의 영지에서 사무라이 문화에 서서히 젖어들게 된다. 교토에서 노부타다가 신식 군대 군인들로부터 받는 모욕이 사무라이 전통을 ‘구습(舊習)’으로 폄하하는 세계화의 단면이라면, 노부타다의 영지에서 알그렌이 일본 문화를 습득해가는 과정은 지역화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알그렌은 젓가락질을 배우고 일본말을 익히는가 하면, 온천욕을 경험한다. 물론 무사로서 사무라이 검술을 익혀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되는데, 이런 알그렌의 ‘지역화’는 영화의 마지막에 알그렌이 일본 전통의 사무라이 갑옷을 갖춰 입고, 가쓰모토로부터 일본도를 받는 것으로 완성된다.

서구의 특수한 경험을 강요하고, 비(非)서구문화를 무시하는 세계화의 횡포를 막기 위한 대안은 문화적 다양성의 확보이며 그것을 위해 ‘다른 무엇보다 문화에는 국경이 있어야 한다’는 고(故) 정운영 선생의 말에 동의한다면, 세계화의 공간인 교토와 지역화의 공간인 노부타다 영지의 대비를 통해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전망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사무라이의 상투와 기모노가 조롱거리가 되고, 생명과도 같은 일본도가 흉기에 지나지 않는 교토의 혼란스러움(노부타다는 교토에서 칼과 활로 신식 군대에 저항하다가 총에 맞아 숨진다)과는 달리 백인인 알그렌이 젓가락으로 밥을 먹고, 검술을 배우며 명상을 통해 수련을 행하는 노부타다의 영지는 평화롭다. 알그렌이 사무라이가 되어 가는 노부타다의 영지는 타 문화에 대한 존중을 통해 문화적 다양성이 확보되는 공간인 셈이다.

가쓰모토가 남긴 칼

100년 전의 세계화, 총과 칼의 만남
일본의 ‘마지막 무사’ 가쓰모토가 남긴 칼은 일본 전통문화의 수호를 상징한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가쓰모토의 유품인 일본도를 전해 받은 젊은 천황이 일방적인 미국과의 협정을 파기하고 일본의 전통문화를 지킨다는 설정을 통해 고유의 전통문화를 수호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물론 영화의 이런 메시지가 제작자의 진의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화에 대한 저항과 그 대안으로 지역화의 고수가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세계 문화의 큰 흐름을 무시하고 전통문화를 고수하는 것은 문화의 고립화를 초래해 결국 전통문화의 발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지역 문화가 갖는 특수함과 협소함이라는 전근대성은 서구자본의 무한한 확장인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했던 마르크스도 일관되게 비판한 사항이었음을 상기할 때, 문화적 다양성의 논의에는 세계화와 지역화 사이의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예컨대 가쓰모토가 남긴 칼을 서구 ‘침략자’를 베는 무기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그 칼에 담긴 정신을 세계화 시대에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간동아 556호 (p99~101)

박진성 도서출판 늘품미디어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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