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클리닉을 찾은 한 환자에게 내려진 처방전. 항우울제, 마약류 식욕억제제, 항경련제가 한꺼번에 처방됐다.
최 씨는 자신의 딸이 우울증 치료제의 부작용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고 생각한다. 박 양은 5월부터 7월 초까지 집 근처 산부인과의 비만클리닉에 다니며 주사와 약물로 비만 치료를 받았다. 박 양이 복용한 약은 플루옥세틴(fluoxetine)을 성분으로 하는 SSRI(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계열의 항우울제. 박 양은 6주 동안은 매일 1알씩, 3주 동안은 매일 2알씩 이 약을 복용했다.
SSRI 계열 항우울제는 ‘자살 및 폭력 성향 증가’ 논란의 한복판에 있는 약이다(주간동아 470호 참조).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항우울제를 복용한 환자-특히 어린이와 청소년-가 자살하거나 폭력 행위를 한 일이 여러 차례 보고됐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연구조사에서도 항우울제가 자살 충동을 부를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급기야 2004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모든 SSRI 계열 항우울제에 ‘자살 충동을 유발할 위험성이 있다’는 경고문을 의무적으로 부착하라고 결정했다.
정체 모르고 복용하다 자살 시도
박 양과 최 씨 둘 다 박 양이 복용한 약의 ‘정체’를 모르다가 자살 시도 이후에야 알게 됐다. 처방전에 적힌 약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본 결과 SSRI계 항우울제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게다가 박 양은 초기 3주 동안은 마약류(향정신성의약품) 식욕억제제인 펜터민(혹은 펜디메트라진) 제제도 함께 처방받았다. 그러나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심각한 심장 유해 반응’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로 SSRI계 항우울제와 펜터민 제제의 병용 처방을 금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병용 처방을 하지 말 것을 권하는 ‘의약품 안전성 서한’을 전국의 의사와 약사들에게 발송한 바도 있다.
7월 중순 박 양은 약물 복용을 중단했다. 얼굴과 온몸에 빨갛게 발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산부인과에서도 약을 그만 먹으라고 했다. 박 양이 자살을 시도한 때는 복용 중단 10여 일 후. 최 씨는 “딸이 약을 끊은 뒤 이상해졌다”고 했다. “짜증이 늘었어요. ‘엄마, 나 기분이 이상해. 내가 왜 이러지?’라는 말도 몇 번 했고요. 눈빛도 달라졌어요. 광채가 난다고 할까요. 딸에게 차마 ‘눈빛이 이상하다’고 말할 수 없어서 ‘눈 좀 작게 뜨라’고만 했습니다.” 최 씨는 “딸은 사교성 있는 성격으로 과거에 자살을 시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덧붙였다.
항우울제 복용 중단 열흘 만에 자살을 시도한 박 양의 어머니 최 씨(가운데)는 “항우울제는 무서운 약”이라고 말했다.
비만클리닉을 찾아갔다가 항우울제를 처방받는 사람은 박 양만이 아니다. 현재 많은 비만클리닉에서 항우울제를 비만치료제로 사용하고 있다. 식욕을 떨어뜨리는 이 약물의 대표적인 ‘부작용’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주간동아’는 서울의 한 약국을 통해 이 약국 주변 비만클리닉에서 나온 처방전 4장을 입수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식약청은 항우울제와 마약류 식욕억제제인 펜터민 제제의 병용 처방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 4장 모두 이 두 약물을 병용 처방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역시 뇌에 작용하는 약물인 항경련제까지 삼중으로 처방된 경우도 있었다. 항경련제는 간질 환자들이 복용하는 약으로 손발저림 등의 부작용이 흔하게 나타난다.
항우울제와 펜터민 제제를 병용 처방하는 것은 일명 ‘펜 요법’으로 불리는데, 단일 약물만 처방하는 경우보다 체중감량 효과가 훨씬 뛰어나다. 그러나 1997년 미국에서 펜 요법을 받은 8명의 환자가 심장판막증으로 사망하자 미국 FDA에서 병용 처방을 금했다. 그러나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펜 요법이 아주 흔하게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식욕 저하’ 효과만 생각
이 약국의 약사 A 씨는 “비만클리닉에서 나오는 처방전 중 절반은 병용 처방한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항우울제 또는 마약류 식욕억제제를 단일 처방한 것”이라고 밝혔다. A 씨는 “체중감량 효과가 적으면 단일 처방을 병용 처방으로 바꾸기도 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A 씨가 지적하는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약들을 처방하는 의사들이 정신과 전문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보통은 피부과, 성형외과, 산부인과 등에서 비만클리닉을 운영하면서 이러한 처방을 합니다. 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식욕 저하의 효과만을 이용하는 것 같아요. 적정한 복용량을 저한테 문의하는 의사도 있고, 심지어 약품명을 틀리게 적어 보내는 병원도 있습니다.”
사실 항우울제는 다양한 종류의 병원에서 처방되고 있다. 최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문희 의원(한나라당)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05년 가장 많은 항우울제를 처방한 병원은 정신과(처방 금액 134억원)였으며, 내과(84억원)가 그 뒤를 이었다. 신경과는 48억원으로 3위에 머물렀다. 산부인과(8000만원), 피부과(4600만원), 성형외과(114만원) 등도 항우울제를 다수 처방했다.
살 빼기 위해 먹는 약이 뇌에 작용하는 약물이며, 드물기는 하지만 자살 충동까지 불러일으키는 부작용 논란에 휩싸인 약이란 사실을 여성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박 양처럼 단순히 ‘식욕을 떨어뜨리는 약’이라고만 알고 있는 여성들이 많다. A 씨는 “여러 차례 비만 약의 문제점에 대한 언론 보도가 있었음에도 비만클리닉 환자 중 절반은 자신이 정신과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전했다. 그는 “환자들에게 약의 정체에 대해 알려주고 싶지만 병원 눈치가 보여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도 했다. 얼마 전 한 약국이 항우울제를 오랜 기간 복용하는 환자에게 약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며 주의사항을 일러줬다가, 환자의 항의를 받은 의사가 다른 환자들에게 해당 약국에 가지 말라고 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최 씨는 딸을 산부인과 비만클리닉에 보낸 것을 무척 후회하고 있다. 비만 약의 정체와 주의사항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던 병원에 대해서도 몹시 화가 난 상태다. “약의 부작용에 대해 설명해줬더라면 딸이 몹시 예민한 상태라는 것을 이해했을 테고, 그날 딸에게 잔소리하지 않았을 텐데….” 최 씨는 결국 눈물을 훔쳤다.
“며칠 전 딸에게 ‘네가 희생양이 되라’고 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젊은 여성들이 항우울제를 쉽게 복용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단지 살을 빼기 위해서 이 약을 먹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