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6

2006.10.17

중국에 사신 행차 때마다 책 사는 데 올인

말단 관리 ‘서반’ 통해 전량 구입 … 1720년 방문 때 51종 1328권 사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입력2006-10-16 14: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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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 사신 행차 때마다 책 사는 데 올인

    이의현의 글이 새겨져 있는 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의 표충비(오른쪽)와 표충비각.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사명당 송운대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국가에 큰 어려움이나 전쟁 등의 불안한 징조가 보일 때 비에서 땀이 흐른다 하여 ‘땀 흘리는 표충비’로 유명하다.

    앞서 허균이 중국에서 책을 대량 구입했던 일에 대해 말하면서 나는 적잖이 미진했다. 그는 북경에서 책을 어떻게 구입했던가. 서점이었던가? 그러면 그가 찾아간 서점은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했던 것인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사신단은 북경에서 책을 구입했지만 구입 경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이 점을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의 예를 통해 검토해보자.

    병자호란이 끝났다. 조선 조정은 앙앙불락(怏怏不樂)하며 북벌 운운하면서 복수심을 불태웠지만, 해보는 말이었을 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거대한 제국 청(淸)의 천하 경영이 안정의 길로 접어들자 현실을 인정하고 사대(事大)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다시 사신단이 파견됐고, 책이 수입되기 시작했다. 한데 18세기 후반이면 북경 유리창(琉璃廠)의 서적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사신단이 거기서 직접 서적을 구매하지만, 아직 이의현의 시대는 아니었다.

    사신들 북경 시내 나들이 자유롭지 못해

    이의현은 1720년과 1732년 북경에 파견된다. 1720년에는 예조참판으로서 동지사 겸 정조사(正朝使), 성절사(聖節使)의 정사(正使)로 파견됐다. 동지사는 동지에, 정조사는 정조(1월1일)에 맞추어, 성절사는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는 사신인데, 이때에 와서 청나라 측에서 번거롭다 하였으므로 한데 뭉쳐 파견했던 것이다.

    1720년 연행(燕行) 때 이의현은 북경에서 42일 동안 체류했다. 지낸 곳은 조선 사신의 전용 숙소인 옥하관(玉河館)이었다. 이곳에 여장을 푼 이의현은 북경 시내를 마음대로 구경할 수 있었을까. 명대에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청(淸)의 치하인 1720년이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1765년에 청을 방문한 홍대용(洪大容)의 연행일기인 연기(燕記)에 의하면, 그 전까지 북경 시내 출입을 금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또 사신단의 정식 수행원은 공무 때문에 시내를 자유로이 출입할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이의현은 태액지(太液池), 창춘원(暢春苑), 정양문(正陽門) 밖의 시가를 본 적은 있지만 문산묘(文山廟), 천주당(天主堂), 망해정(望海亭), 각산사(角山寺)를 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중국에 사신 행차 때마다 책 사는 데 올인

    1904년 박종우가 만든 ‘도곡선생문집(陶谷先生文集)’의 표지와 서문.

    하지만 그가 이런 곳을 방문했는지 여부는 별로 중요치 않다. 나는 그가 북경 시내에서 책을 구입했는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는 1720년 연행의 일기인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에서 북경 정양문 밖의 번화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가지 북경 정양문 밖이 가장 번화하고 고루가(鼓樓街)가 그 다음이다. …시가의 상점은 모두 목판(木板)을 달거나 세우고, 혹은 융으로 장막을 쳐서 좋은 이름을 붙였는데, ‘무슨 누(某樓)’, ‘무슨 가게(某肆)’, ‘무슨 포(某鋪)’라는 식이다. 일용의 음식, 서화(書畵), 기완(器玩)에서 백공(百工), 천기(賤技)까지 진열해놓고 팔지 않는 것이 없다. 희고 넓은 베를 가게 앞에 가로로 치거나, 깃대를 높이 걸어 거기에 어떤 물건을 판다고 크게 써 붙여, 행인이 언뜻 보고도 알 수 있도록 하되, 반드시 멋있는 이름을 붙인다. 예컨대 술이라면 난릉춘(蘭陵春), 차라면 건계명(建溪茗)이라는 식이다.

    아마도 공무를 보기 위해 관부(官府)로 가는 길에 시내를 통과했을 것이고, 위의 묘사는 그때 본 모습일 터다. 하지만 그가 직접 상점에 들어가 물품을 구입했을 것 같지는 않다. 훗날의 박지원이 관광객이라면, 그는 국가를 대표하는 공식 외교사절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1720년 연행 때 대량의 서적과 서화를 구입해 온다. ‘경자연행잡지’에서 책이름과 권수를 꼼꼼히 기록하고 있는데, 정리하면 51종 1328권의 서적과 서화 10종 15건을 구입했다. 1732년에도 19종 346권을 구입했으며, 다른 사람의 부탁으로 모두 20종의 책을 따로 구입한다. 1732년에는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와 대화를 나누고, ‘삼산논학기(三山論學記)’와 ‘주제군징(主制群徵)’ 등 천주교 서적을 받아오기도 했다.

    ‘서반’들 책 독점 공급으로 이익 챙겨

    이 방대한 서적을 어떤 경로를 통해 구입했던가. 18세기 후반이면 당연히 유리창을 떠올릴 테지만, 1720년 연행일기에서 유리창이란 지명은 보이지 않는다. 요컨대 그는 인사동과 교보문고를 방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서적과 서화를 구입할 수 있었던가. ‘경자연행잡지’ 끝 부분에서 그는 구입했던 서적의 목록을 죽 나열한 뒤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 중에서 잡서(雜書) 몇 가지는 서반(序班)들이 사사로이 준 것이다.” 즉 점잖은 체면에 좀 무엇한 책들은 자신이 주문한 것이 아니라, 서반들이 공짜로 주기에 받은 것이라는 해명이다.

    바로 이 서반이 서적의 공급자다. 서반에 대한 그의 증언을 보자.

    서반이란 곧 제독부(提督府)의 서리다. 오래 근무하면 간혹 승진해 지현(知縣)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북경의 사정을 알려면 서반을 통해 알 수밖에 없다. …그들의 집은 거개 남방(南方)이다. 서책은 모두 남방에서 오고, 이자들이 매매를 맡는다. 우리나라의 거간과 같다. 역관들이 중간에 끼여 있어, 사신이 책을 사려 하면 반드시 역관들을 시켜 서반에게 구하게 한다. 이들은 서로 이익을 보기 때문에 친분이 아주 깊다.

    곧 서반이란 우리나라의 서리에 해당하는 축으로, 이들이 우리나라 사신에게 서적을 전매했던 것이다. 요컨대 조선 사신이 구입한 책은 모두 서반을 통한 것이었던 것이다.

    서반은 명대의 홍려시(鴻寺) 소속으로 궁정에서 예식을 거행할 때 백관의 반위(班位)를 정리하던 관원이었다(이 구실은 청대에도 같았다). 조선 사신단은 황제를 만나는 의식을 미리 연습해야 했던 바, 이 의식 절차를 익히도록 안내하는 이들이 서반이었던 것이다(이의현도 홍려시로 가서 청 조정에서 행할 의례를 연습했다). 이런 이유로 조선 사신단이 북경에 도착하면 중국 예부에서 서반 10명을 뽑아 배정해주었고, 이들은 의식의 연습뿐만 아니라 중국 관원과 조선 사신단 사이의 심부름을 맡았던 것이다.

    조선 전기의 허봉(許, 1551~1588)이 1547년 신종(神宗)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성절사로 북경에 다녀와서 쓴 ‘조천기(朝天記)’에 이런 기록이 있다. “서반들이 조선 사람들이 북경에서 구입하는 황자색(黃紫色) 비단이나 역사서적 따위는 국경을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에 서반이 사실을 알고 협박해 뇌물을 요구한다.” 구체적인 양상은 알 수 없지만, 이는 임진왜란 이전에도 서반이 서적 구입에 개입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이의현의 말처럼 조선 사신단이 구입하는 서적의 판매를 독점하고 있었다. 홍대용은 그의 ‘연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외성(外省)에서 선발되어 온 사람들로서 봉급이 아주 적었다. 그래서 수십 년 이래 북경의 물화 중 조금 고상한 것은 서반에게 매매를 담당하게 하고 그 이문을 먹게 했다. 예컨대 서적이나 서화, 붓이나 먹, 향과 차 등은 다른 상인이 끼어들 수가 없었다. 이런 까닭에 상품 값이 해마다 올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건 값이 폭등하는 것을 괴로워하여 몰래 사고팔다가 온갖 욕을 보곤 한다.” 홍대용은 서반이 유리창과 융복시(隆福市)를 따라다니면서 책을 구입하는 것을 감시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서반은 서적 등의 독점 판매를 위해 조선 사신단이 북경 시장에 나가서 직접 책을 구입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이런 식이었으니, 과연 북경에서 새로운 책이 나올 때마다 즉각 직접 구입할 수 있었을 것인가. 궁금한 점이 적지 않다. 이쯤에서 덮어두자.

    ‘경자연행잡지’에 서반에게서 책을 구입하는 장면은 없지만, 서화를 구입하는 장면을 유추해볼 수는 있다.

    신종(神宗) 그림이 있는 가리개는 값이 너무 비싸 사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역관 중에 서반과 친한 자가 있어 중간에서 흥정을 해보라 하여, 부채, 부싯돌, 어물(魚物) 등의 잡물을 주고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고의로 위조해 높은 값을 받으려는 수작이 아님을 알 수가 있었다. 서양화도 샀다. 남경의 중이 ‘오륜서(五倫書)’ 2투(套) 62책을 가지고 와서 팔았다. 흰 종이에 큰 글씨로 썼고, 책이 아주 길고 크다. 푸른 베로 표지를 했고, 권마다 안에 정통황제(正統皇帝)의 어보(御寶)를 찍었다. 아주 진귀한 것이었지만 너무 비싸 사지 못했으니 한스럽다.

    서반을 통해 명나라 신종 황제의 그림을 사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책과 서화를 구입했던 것이다. 요컨대 서반은 조선의 지식인계에 중국의 서적을 공급하는 유일한 파이프라인이었으니, 뜻하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책 많았지만 주자학 외에는 눈 안 돌려

    이의현이 산 책은 거질이었다. ‘책부원귀’ 301권, ‘속문헌통고’ 100권, ‘도서편’ 78권, ‘삼재도회’ 80권, ‘한위육조백명가집’ 60권, ‘전당시’ 120권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런 책은 조선에서 도저히 찍을 수 없는 책이었다. 조선의 지식계와 서적시장은 워낙 협소해 출판과 구입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또 이의현의 장서에는 명·청대의 최신 서적이 즐비했다. 이탁오(李卓吾)와 원굉도(袁宏道), 서위(徐渭) 등 양명학파 계열의 저자들이 끼여 있기도 했다.

    이의현은 자신의 에세이집 ‘도협총설(陶峽叢說)’에서 자기 장서를 자랑스레 늘어놓았다. 하지만 새 서적들이 그의 사유에 변화를 일으킨 것 같지는 않다. ‘도협총설’의 한 토막을 읽어보자.

    나는 젊어서 최창대(崔昌大, 1669~1720)와 한원(翰苑)의 동료로 재직했다. 어느 날 최창대가 큰 소리를 쳤다.

    “주자(朱子)의 학문은 취할 것이 없어!”

    나는 너무나 놀라 그를 나무랐다.

    “그대가 어쩌자고 이런 악한 말을 하는가. 저 하늘이 두렵지도 않단 말인가?”

    “그대 역시 세속의 논의에 빠진 사람이로구먼. 그대는 주자의 ‘태극문답(太極問答)’을 읽어보게. 단지 장사꾼의 말일 뿐이지 어디 수양하는 사람이 해야 할 것이 조금이라도 있던가?”

    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다시는 그와 말을 하지 않았다.

    주자의 학문이 볼 것이 없노라는 최창대의 말은 참으로 대담하다. 그는 인조대의 명신이었던 최명길(崔鳴吉)의 증손이자, 또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의 아들이다. 배경이 있어서 말이 과감했던가.

    이의현은 중국의 새로운 사유를 섭취했지만, 여전히 주자가 하늘이었다. 이것은 또 노론의 입장이기도 했다. 이의현은 영의정까지 지냈으니, 출세의 끝에 도달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이세백(李世白) 역시 좌의정을 지냈으니, 부자가 정승에 오른 당대 최고의 명문이었던 것이다. 이의현은 ‘사변록’의 저자 박세당을 공격했던 김창협의 제자다. 그런가 하면 이세백은 송준길(宋浚吉)의 제자다. 송준길은 송시열과 함께 노론 정권의 핵심이었으니, 이의현 역시 골수 노론일 수밖에 없다.

    어떤 새로운 진리도 계급적·정치적 입장을 고수하면 소용이 없음을 이의현의 경우에서 확인한다. 새 책과 새 사상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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