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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를 가다⑤

쿠처 고성 성벽에 고선지 장군 함성이

다섯 차례 서역 원정 출발 개선 장소 … 음악과 춤 오랜 명성 키질 석굴에서 눈으로 확인

  • 글·문건영 변호사 사진·서해성 작가

쿠처 고성 성벽에 고선지 장군 함성이

쿠처 고성 성벽에 고선지 장군 함성이

밍우타거산의 산기슭을 따라 3km에 걸쳐 조성된 키질 석굴.

새벽녘 쿠처역에 내리자마자 호텔로 갔다. 기차에서 이틀 밤을 지낸 뒤라 움직이지 않는 잠자리에 눕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이나 기뻤다.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지고 싶었다. 그러나 쿠처의 불교사원 유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호텔을 나섰다.

사원 터는 쿠처 강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불교가 크게 흥했던 쿠처의 중심 사원으로, 국사에 대한 전국 대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코끼리나 낙타를 타고 깃발을 앞세운 수천명의 사람이 이곳에 모였다고 한다. 천년 전 혜초는 신라에서 바닷길로 동인도를 거쳐 페르시아까지 간 다음 파미르고원을 넘어 쿠처에 다다랐다. 정수일 선생은 이 사원에서 큰 종교적 집회가 열렸던 만큼 혜초도 틀림없이 이곳에 들렀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고구려 유민 고선지도 쿠처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무예를 닦았다. 그는 다섯 차례나 서역 원정에 나섰다. 패전한 탈라스 전쟁을 빼고는 그 출발지와 개선지가 모두 쿠처였다. 중국의 종이가 고선지를 통해 서쪽으로 퍼졌고, 오늘날의 중국 국경이 그에 의해 어느 정도 그어졌다. 무수한 전쟁을 치렀던 고선지도 이곳에 들러 마음을 다스렸을까. 그들을 기념해 자갈을 하나 주웠다.

고선지는 사원보다는 주로 성에서 활동했다. 그의 흔적이 남은 쿠처 고성은 성벽인지 흙무덤인지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허물어져 잔해만 남아 있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쓰레기도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입구에 세워진 푯말만이 이곳이 성터였음을 알리고 있었다. 정수일 선생은 너무도 안타까워하면서 우리와 관련 있는 해외 유물들을 준문화재라는 개념으로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즉석에서 그곳에 고선지를 기념하는 비를 건립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오후에는 밍우타거산의 산기슭을 따라 3km에 걸쳐 조성된 키질 석굴을 방문했다. 키질 석굴은 둔황 모가오굴보다 빠른 3세기부터 만들어졌다. 석굴 맞은편 산맥에는 산줄기마다 하얗게 눈이 쌓였는데, 발밑의 호수와 어우러져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입구에 들어서자 안내인이 열쇠로 석굴의 문을 하나씩 열어주며 해설을 해줬다.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독일의 알렉산더 폰 르콕 일행이 벽화를 훑다시피 떼어간 데다, 그나마 남은 것이라곤 이슬람을 믿는 현지인들이 눈, 코 등을 긁어버린 그림이나 부서져 조각난 불상들뿐이었다. 처참한 폐허만이 우리를 맞고 있었다.

3세기부터 조성된 키질 석굴 처참한 폐허만 남아

그런데 10동 석굴은 독특했다. 원래 선방이었던 곳이어서 벽화는 없고, 한낙연이 새긴 글만 붙어 있었다. 중국 옌볜 룽징에서 태어난 한낙연은 정수일 선생의 고향 대선배다. 1924년 상하이 미술전문학교 서양학과에서 2년간 공부하고, 1929년에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루브르 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며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항일구국 투쟁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소수민족의 생활상과 풍경들을 많이 묘사했고, 석굴 벽화의 복원에도 힘써서 키질의 벽화를 모사한 작품도 20여 점이나 남겼다.

벽에 쓴 그의 글에도 벽화가 손상된 것에 대한 아쉬움이 표현돼 있었다. 그는 자신이 그 모사를 위해 노력했음을 알리면서, 후세 사람들에게 석굴의 보전을 당부하고 있었다. 글 옆의 초상화 속에서 동그란 안경을 쓴 그가 웃고 있었다.

쿠처 고성 성벽에 고선지 장군 함성이

쿠처민속가무단의 공연 모습.

다음 굴로 가려는데 일행 중 누군가가 갑자기 큰 소리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한낙연을 기념하는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일행은 안내인에게 우리끼리 한국인 한낙연을 위한 간소한 기념식을 행하려고 하니 잠시 나가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했지만 분위기를 깰 수 없어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안내인이 나가자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품 안에서 사진기를 꺼내더니 한낙연의 사진과 글을 배경으로 정수일 선생을 찍었다. 사진기는 입구 관리소에 맡기도록 돼 있는데 숨겨온 것이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나머지 일행은 얼떨결에 조그맣게 난 창으로 망을 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동굴 안이 순간 환해지며 번쩍거렸다. 누군가가 사진기 플래시를 사용한 것이다. 이래서는 들키기 십상이다.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들어설 때부터 일행조차 모르게 두세 사람이 계획한 거사의 전말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정수일 선생이 언제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지 몰라 한낙연의 초상화와 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어주기로 모의한 것임을 뒤늦게 알았다. 한 사람은 안내인의 주의를 돌리려고 바닥에 방향 표시로 그어둔 화살표까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받았는데도 안내인은 열심히 설명을 해줬다.

쿠처 고성 성벽에 고선지 장군 함성이

10동 석굴에 새겨진 한낙연의 글. 카메라 촬영이 금지된 곳이라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그런데 한바탕 소동의 결과는 무척 실망스러웠다. 도둑 촬영의 주된 임무를 맡은 사람의 디지털 사진기에 담긴 영상이 대부분 엉망이었던 것이다. 마치 키질 석굴을 주제로 한 포스트모던 추상화 같았다. 플래시 없이 노출 시간이 길었던 탓에 손이 흔들렸던 것이다. 반면에 들킬 위험을 감수하며 플래시를 터뜨려 찍은 다른 사진은 선명하게 나왔다. 촬영에 실패한 게릴라는 비밀 임무 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대담성이 없다며 남은 여행 기간 내내 놀림을 당했다.

쿠처는 음악과 춤으로 중앙아시아와 장안까지 유명했던 곳이다. 현장도 이곳의 관현기악이 이름 높다고 전했다. 키질 석굴에는 비파를 켜는 모습의 벽화가 있고, 이곳에서 유래한 오현비파가 발견되기도 했다. 막가무라는 신장의 리듬은 우리와도 큰 관련이 있다. 신라 때 유행한 산예라고 불린 사자춤도 원래 쿠처의 것이다. 그러니 쿠처까지 와서 악무단의 공연을 안 볼 수는 없었다. 수소문을 해 비수기라 흩어져 있던 단원들을 겨우 찾아 호텔로 초청했다.

뱀 가죽으로 만든 북은 다프, 바이올린처럼 생긴 악기는 쿠시타르, 울림통이 훨씬 작은 현악기는 러와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공연은 이 악기들의 합주로 시작됐다. 눈썹이 짙고 수줍으면서도 매혹적인 미소를 지닌 무희의 춤이 그 뒤를 이었다. 머리 위에 접시를 올리고 추는 마이시라이프는 결혼식 같은 즐거운 자리에 어울릴 만한 춤이었다.

뱀 가죽으로 만든 북, 다프 소리에 몸 저절로 흔들려

무희의 이름은 파티쿨리였다.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며 돌 때마다 몇 갈래로 땋은 긴 머리카락이 몸과 함께 힘껏 돌다가 다시 몸에 감겼다. 춤을 마친 뒤에는 머리 위의 접시에서 물을 따라낸다. 그 신기함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쿠시타르의 연주자는 쿠처의 꽃을 독주했다. 선율이 아름답고 연주 솜씨도 뛰어났다. 다른 노래는 음의 떨림이 동양적이었던 반면 쿠시타르의 연주는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 7음계를 사용하고 있었다.

쿠처 고성 성벽에 고선지 장군 함성이

쿠처 고성을 알리는 푯말(왼쪽). 쿠처 불교사원 유적은 성벽인지 흙무덤인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허물어져 있다.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다프 소리였다. 연주자는 다프를 양손의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받친 뒤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뱀 가죽을 두들겨 연주했다. 자유로우면서도 어딘가에 규칙이 숨어 있는 듯한 리듬이었다. 내 안의 박자와 맞았는지 그 리듬에 맞춰 몸이 저절로 흔들렸다. 아트 블래키의 거침없는 드럼 연주를 듣는 듯했다.

공연이 끝난 뒤 연주자에게 다프를 잠시 빌려 연주를 해보았다. 의외로 소리 내기가 어려웠다. 맑고 큰 소리를 기대했는데 반대로 작고 둔탁한 소리만 났다. 실망스러웠다.

다프 연주자는 나의 연주를 미소 띤 얼굴로 지켜봤지만 자신의 악기가 망가질까 봐 불안한 모습이었다. 통역을 통해 들으니 연주 경력만 20년이란다. 일본까지 가서 타악기 공부를 하고 온 실력파였다.

그곳에 그의 문하생으로 남겠다고 큰소리쳤던 나는 카슈가르의 시장에서 기념품으로 파는 다프만 하나 사들고 돌아왔다. 그는 실크로드의 일부였고, 나는 나그네였다.



주간동아 537호 (p84~86)

글·문건영 변호사 사진·서해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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