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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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인가 환영인가

  • 김준기 미술평론가

    입력2006-05-08 09: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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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재인가 환영인가
    백자를 그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찾아간 것은 아니었으나 가나아트센터 전시장 입구에서 카탈로그를 받아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표지가 영락없는 경매 카탈로그였기 때문이다. 표지 전면에 자리 잡고 있는 용문청화백자대호를 보면서 ‘아뿔싸, 이건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지’ 하는 생각으로 첫 번째 전시장으로 들어서서야 비로소 평상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고영훈의 대표작인 커다란 돌그림이 전면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오랜 활동을 통해서 특정한 이미지를 구축해낸 화가의 전시를 볼 때 느끼는 장점이자 단점이긴 하지만, 어쨌든 용이 그려진 백자 표지를 대했을 때의 당혹스러움을 감싸주는 것이 그의 1970년대 초기작 돌그림과 대학 시절에 그린 군화와 코카콜라였다.

    고영훈의 30년 전 그림을 본다는 것은 그의 개인사적인 흐름뿐만 아니라 우리 미술사의 일단을 들여다보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하다. 그러고 보면 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을 단색 평면회화의 시대라고 단정하는 그 오만하고 독선에 가득 찬 편견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미술사의 예단이란 가끔 당대의 미술 권력을 장악한 특정 흐름을 한 시대를 대변하는 전체로 포장하는 무지막지한 구석이 있다. 70년대에 단색 평면회화가 패권을 장악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고영훈이 20대 초반부터 ‘형상을 가진 사물을 그려내는’ 작업을 해왔다는 사실을 재확인함으로써 ‘절제로부터 표현으로의 전환’이라는 새로운 시대 패러다임의 맹아가 패권의 그늘 아래서 일찍이 싹트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꽃그림들은 고영훈의 완곡한 전환을 시사한다. 돌과 같은 무기물과 책이나 도구들과 같은 오래된 사물들을 그려온 그가 살아 있는 생물을 그린 것이 극히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예의 낡은 책장 위에다가 호박넝쿨을 얼기설기 얽어 그렸다. 호박줄기 마디마디에서 노란 호박꽃이 피어난다. 신사임당의 단골 메뉴 같은 작약과 나비, 악기 속에 들어 있는 붓꽃은 또 어떤가. 오래된 책장을 붙여 만든 책 이미지 위에 좌우 한 쌍을 이룬 보라색과 흰색의 목련 가지에 이르면 고영훈은 죽은 사물들로부터 살아 있는 생물의 세계를 그려내는 ‘환영의 연금술’의 절정을 보여준다. 도자기와 목조각 작품이 함께 전시된 세 번째 방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실재와 환영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만든다. 달항아리며 청화백자 등 실재의 도자기와 고영훈이 옮겨 그린 도자기 그림들 사이를 오가는 동안 실재하는 것과 재현된 것 사이를 헤매는 관객은 즐거운 혼란에 빠진다. 목각 동자상과 사천왕상 뒤에 고영훈의 재현회화를 배치함으로써 실재와 대결하는 이미지, ‘일루전 회화’의 진수를 전달하고 있다. 같은 대상을 재현한 세 점의 청화백자 그림들이 초점이 흐린 것과 또렷한 것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림이란 ‘실재를 재현한 환영’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해볼 정도다. 5월14일까지, 가나아트센터, 02-7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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