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3

2006.05.02

거리에서 매 맞는 공권력

  • 강경근 숭실대 교수·헌법학

    입력2006-04-28 11: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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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에서 매 맞는 공권력
    내가 남한테 맞지 않고 살 수 있는 이유는 국가 공권력인 경찰의 치안유지권이 나를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내 돈을 남한테 뺏기지 않고 살 수 있는 이유 역시 절도나 강도행위를 범죄로 규정해 처벌함으로써 사유재산 제도를 지켜주는 국가 공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 전문은 국가는 국민의 자유와 안전과 행복을 지켜줄 때에만 존재 의의가 있음을 명문화하고 있다.

    그런 공권력이 흔들린다면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하는 국가와 국민 개개인의 삶은 파괴되고 만다. 토머스 홉스가 근대국가 탄생 직전에 저술한 ‘리바이어던’에서 말한 자연상태에서의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전근대적인 비법(非法) 상태로 회귀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권력은 우리를 자연상태의 생존에서 국가 안으로 이끌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물이나 공기와 같은 존재다.

    하지만 최근 이런 믿음을 의심케 하는 일이 또 벌어졌다. 집회신고에 포함되지 않은 불법 행진을 제지하고 참가자들을 안전지대로 유도하려던 전경 2명과 경찰관 4명이 집단 구타를 당한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냐” “그냥 넘어가야지요”라고 했다는 경찰관들의 반응이다. 모르긴 해도 시위대에 맞은 경찰관들이 성인군자라서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경찰관들은 그런 일이 새삼스럽게 문제를 제기할 만한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2000년부터 2005년까지 3000여명의 전·의경이 폭력시위를 저지하다가 다쳤다. 2005년 한 해 동안의 부상자 수만 해도 747명이다. 개중에는 경기경찰청의 한 의경처럼 평택 미군기지 반대시위대에게 대나무 창으로 눈을 찔려 실명한 경우도 있다. 거리의 구타와 불법을 제지해야 할 공권력이 오히려 구타당하는 일은 이제 일상적인 일이 돼버린 듯하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은 누구 책임인가. 정부를 먼저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불법적 폭력시위를 진압하던 경찰을 불에 타죽게 한 부산 동의대사태 관련자들을 일찌감치 민주화 인사로 인정했다. 얼마 전에는 불법 시위를 진압하다가 발생한 불상사로 인해 경찰 총수가 옷을 벗은 일도 있었다. 윗선부터가 이러니 일선 경찰관들이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 근본 흔드는 도발행위 방치 안 돼

    물론 권위주의 시절의 공권력과 민주화 시대의 공권력이 똑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민주화 시대에도 사회질서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공권력에 대한 최소한의 권위와 존중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권위를 확보할 일차적 책임은 정부와 당사자인 경찰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경찰의 정당한 공권력 행사를 보장해주기 위해 정부는 그동안 무슨 일을 했는가. 경찰의 공권력 행사가 지금처럼 위축된 배경에 경찰이 자초한 측면은 없는가. 경찰권이 지금처럼 희화화(戱畵化)되고 경시(輕視)돼서는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능조차 수행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국민도 이제는 국가 헌정질서와 공권력이 우리들의 삶과 행복을 최소한 담보해주는 기재임을 각성할 필요가 있다. 공권력이 당연히 행사돼야 할 시기와 장소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면 결국은 전체 시민의 안전이 위협받게 된다. 그럴 때의 부작용과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 자신의 몫이 된다.

    걸핏하면 경찰과 폭력적 대치를 일삼는 일부 시민사회세력은 특히 반성해야 한다. 그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집회·시위의 자유는 지난 시절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이뤄낸 민주화의 값진 결실이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탈법·불법 시위를 서슴지 않고 공권력을 짓밟는 행위를 일삼는다면, 이는 시위의 자유를 가능하게 한 민주주의의 근본을 뒤흔드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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