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8

2006.03.28

금속활자로 혁명 완성 꿈꾸었나

서적포 설치해 책 대량생산 주창… 불교 제거, 성리학 보급 의도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입력2006-03-27 10: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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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속활자로 혁명 완성 꿈꾸었나

    삼봉 정도전의 초상화.

    혁명은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무력에 의해 혁명은 일단 성공하지만, 그 성공이 곧 혁명의 완성은 아니다. 혁명이 주장한 이데올로기가 사회 구성원의 대뇌에 온전히 장착되고, 그 이데올로기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다수 출현했을 때 비로소 혁명은 완성된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통해 혁명의 이데올로기를 인간의 대뇌에 장착할 것인가? 현대에는 교육과 미디어가 그 수단이지만 과거에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을까? 고려를 엎고 조선을 세웠던 혁명가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무엇으로 혁명을 완성하려고 했던가. 이 문제를 풀어보자.

    ‘서적포 설치하는 시’로 동료들에 도움 청해

    정도전의 문집 ‘삼봉집(三峰集)’에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置書籍鋪詩)’란 흔하지 않은 제목의 시가 있다. 시 앞에 서문이 붙어 있는데, 이게 읽어볼 만하다.

    -대저 선비가 아무리 학문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해도 서적을 얻지 못한다면 또한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 동방은 서적이 적어 배우는 사람들이 모두 독서의 범위가 넓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긴다. 나 또한 이 사실을 아프게 생각한 것이 오래다. 나의 간절한 바람인즉 ‘서적포’를 설치하고 동활자(鑄字)를 만들어서, 무릇 경(經)·사(史)·자(子)·서(書)·제가(諸家)·시(詩)·문(文)과 의학(醫學)·병(兵)·율(律)의 서적까지 깡그리 인쇄해내어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이 모두 그 서적을 구해 읽어 학문의 시기를 놓치는 한탄을 면했으면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모두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 모쪼록 이 일에 공감해주기를 바란다. -



    서문에 이어 시가 실려 있다.

    ‘물어보자, 어떤 물건이 사람에게 지식을 더해줄까? 타고난 자질이 좋지 않으면, 문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법. 한스럽게도 우리나라에는 서적이 적어서
    금속활자로 혁명 완성 꿈꾸었나

    정도전의 사당인 경기 평택 문헌사에 보관돼 있는 ‘삼봉집’ 목판.

    책을 읽었다 한들 열 상자가 되는 사람도 없다네. 늘그막에 못 본 책을 얻는다 해도 읽고 나서 덮으면 이내 까먹어버린다오. 다짐해 바라노니 부디 서적포를 설치하여 후학에게 책을 널리 읽게 하고 무궁토록 전했으면 그대 보라, 저 오랑캐가 윤리를 해치는 것을, 그들의 책 시렁과 동량(棟樑)을 꽉 채웠네. 저들은 성(盛)하고 우리는 쇠했다 탄식할 것 있으랴? 본디 우리들이 뜻이 강하지 못한 것을. 여러분께 청하노니 서적 인쇄 비용을 도우시어 모쪼록 사도(斯道)가 더욱 빛을 발하게 하소.’

    금속활자로 혁명 완성 꿈꾸었나

    문헌사 모습.

    금속활자로 혁명 완성 꿈꾸었나

    직지심경 본문.

    서적포를 설치하고 서적을 많이 인쇄해 보급할 수 있도록 가까운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동활자를 만들어서 책을 인쇄하자는 제안이다. 동활자란 바로 금속활자다.

    고려의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의 활자보다 2세기나 앞서 발명돼 ‘세계 최초’란 타이틀을 갖는다. 한국인은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자랑의 이면에는 서구와 근대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최초’가 아니라, 그것으로 무엇을 했는가에 있을 것이다.

    목판은 제작과 보관이 어렵다. 또한 쉽게 닳는 단점이 있다. 거기다 목판은 단 1종의 인쇄물밖에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금속활자는 마모되지 않고 대량의 인쇄물을 생산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활자의 가동성(可動性)은 많은 종수의 책을 생산한다. 금속활자에는 대량의 인쇄물, 그리고 일부에게 독점된 지식을 해방시키는 근대의 이미지가 투영돼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 그리고 조선의 금속활자도 이 이미지대로 사용됐을까. 한국의 금속활자는 대량의 인쇄물이 아니라, 오로지 다종(多種)의 인쇄물을 짧은 시간에 얻는 데 목적이 있었다.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세종 13년 2월28일).

    “좌전(左傳)은 학자들이 마땅히 보아야 할 서적이다. 주자로 인쇄한다면 널리 반포하지 못할 것이니 ‘목판’에 새겨 간행하라.”(세종실록)

    금속활자로 혁명 완성 꿈꾸었나

    정도전 숭덕비.

    대량의 부수는 금속활자본이 아니라 목판본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종류의 인쇄물을 얻는 것이 고려의 금속활자를 탄생시킨 압력이었을 것이다.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이 강화도에서 만들어졌다는 데 주목해보자.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개경의 책을 제대로 가져올 수 없었다. 따라서 많은 종수의 책이 필요했고, 그것이 금속활자를 탄생시킨 배경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절에서 금속활자가 만들어진 것도 그렇다.

    정도전이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를 쓴 해는 1390~1392년으로 짐작된다. 1377년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직지심경’이 인쇄됐으니, 정도전이 살던 시대에는 금속활자의 사용이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혁명가의 예리한 안목은 이 금속활자의 무궁한 이용 가능성을 포착했던 것이다.

    신흥사대부들에게도 불교 여전히 남아 있어

    정도전이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기 위해 설치하자고 제안했던 서적포는 정도전이 처음 언급한 이름이 아니다. 서적포는 국자감(國子監)의 인쇄기관이었다. 고려 숙종 6년(1101) 3월 비서감(秘書監)의 목판을 국자감에 이관해 인쇄를 담당하도록 했는데 국자감이 요즘 말로 하자면 국립대학이니 서적포는 대학의 출판부쯤 된다. 특히 ‘포’는 가게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서적포는 학생들에게 서적을 인쇄해서 파는 곳이 아니었을까 짐작하지만, ‘고려사’에는 더 이상의 사료가 없기 때문에 무어라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서적포를 설치하자는 정도전의 말로 보건대, 서적포는 아마도 없어졌거나 유명무실한 상태였을 것이다.

    금속활자로 혁명 완성 꿈꾸었나

    구텐베르크(왼쪽)와 그가 발명한 금속활자로 간행된 ‘구텐베르크 성경’.

    정도전이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를 썼을 때 국자감은 이미 성균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고려의 성균관에 모종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1300년경 성리학이 수용된 이후다. 안향(安珦, 1243~1306)은 1290년경 베이징에 있을 때 처음 성리학을 접하고 주자의 서적을 베껴 가지고 온 사람이다. 그는 귀국한 뒤 퇴락한 성균관을 재건하고 성리학을 보급하는 데 열중했다. 안향 이후 성균관은 성리학이란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보급하는 기지로 변신했던 것이다.

    성균관은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2차 침입 때 소실되고, 16년(1367)에 다시 지어진다. 새 성균관을 이끈 주역은 누구였던가? 겸대사성(兼大司成)은 이색(李穡), 박사(博士) 겸 대사성은 정몽주, 교관(敎官)은 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이었다. 이들은 이른바 신흥사대부들의 핵심이다. 이들은 성리학을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였다. 정도전 역시 공민왕 19년(1370)에 성균박사에 임명돼 위의 인물들과 함께 성리학에 대한 담토(談討)를 자주 가졌고 새로운 사상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성균관은 어느새 사회개혁의 기지가 돼 있었고, 곧 혁명의 기지로 변신할 참이었던 것이다.

    사대부들에게 성리학은 매력 있는 사유였다. 그것은 장대하고도 치밀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우주의 생성에서 인간의 마음까지 그리고 정치, 경제, 문학, 역사, 인간 일상에서의 소소한 행위 규범들까지 모든 것을 망라하는 이 거대한 사유에 비견될 것은 아마도 마르크스주의밖에 없으리라. 뿐인가? 성리학은 종교를 대신한다. 곧 불교를 대체할 수 있었다. 정도전이 혁명을 꿈꾸었던 것은 다름 아닌 고려 사회를 유지하는 한 축인 불교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을 것이다.

    정도전이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를 쓸 무렵 고려는 이미 회생 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었고, 새로운 왕조의 창건은 거의 기정사실이 돼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성리학으로 철저히 무장해야 할 신흥사대부 내부에도 불교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혁명가 정도전은 불교를 비판하는 논설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쓸 정도로 철저하게 불교와 결별했다. 아울러 그는 동료들의 사상적 분열이 걱정스러웠다. 그는 동료이자 정적(政敵)이었던 정몽주(鄭夢周, 1337~1392)에게 편지를 쓴다.

    -근자에 오가는 말을 듣자니, “달가(達可·정몽주의 자)가 ‘능엄경’을 보고 있으니 흡사 부처에게 아첨하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합디다. 나는 “능엄경을 보지 않고서야 불교의 삿됨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달가가 능엄경을 보는 것은 불교의 병통을 알아내어 고치자는 것이지, 불교를 좋아하여 정진하자는 것이 아닐세”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뒤 나는 혼잣말로 “나는 달가가 부처에게 아첨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증할 수 있다. …달가는 사람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어 그의 행동은 사도(斯道)의 흥폐(興廢)와 관계되는 바이니, 자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게다가 백성들이란 무식하고 어리석어 유혹을 쉽게 받는 반면 깨우쳐주기는 어렵습니다. 모쪼록 달가는 생각해보소서.-

    공손한 어조지만, 정몽주가 능엄경을 읽는 것이 성리학의 전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불경을 읽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몽주가 누구인가. 이 시기에 성리학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인물이 아닌가. 그런데 불경을 읽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몽주뿐만 아니라 다른 신흥사대부들 역시 불교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었다. 신라 이래 1000년 동안 인간의 심성을 지배하던 불교가 어떻게 그렇게 쉽사리 사라질 것인가.

    정도전의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는 불교의 제거를 내포하고 있다.

    ‘그대 보라, 저 오랑캐가 윤리를 해치는 것을/ 그들의 책이 시렁과 동량(棟樑)을 꽉 채웠네/ 저들은 성(盛)하고 우리는 쇠했다 탄식할 것 있으랴?/ 본디 우리들이 뜻이 강하지 못한 것을.’

    윤리를 해치는 오랑캐란 불교다. 그가 생각한 서적포는 불교를 제거하고 성리학을 보급하는 의도를 갖는 것이었다.

    자신은 뜻 못 이뤘지만 혁명 완성 발판 다진 셈

    금속활자로 혁명 완성 꿈꾸었나
    강명관
    ●1981년 부산대 국어교육과 졸업
    ●1992년 성균관대 대학원 한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문학박사
    ●저서 :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1997)’‘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1999)’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2001)'’‘조선의 뒷골목 풍경(2003)’


    혁명가 정도전은 인간의 대뇌에서 불교를 제거하고 성리학을 설치할 것을 꿈꾸었다. 그 수단으로 빠른 시간 안에 더 많은 종수의 책을 발행할 수 있는 금속활자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때까지 금속활자는 주로 불경을 인쇄하고 있었으니, 정도전은 적의 무기로 적을 공략하는 전략을 선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은 조선의 금속활자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정도전을 죽인 태종 이방원은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고, 세종은 그것을 개량하여 갑인자(甲寅字)를 제작해 막대한 종수의 서적을 봇물처럼 쏟아내었다. 그 책으로 성리학에 의해 사고하고 움직이는 사대부가 만들어졌고, 이들이 조선을 500년 동안 지배했다. 정도전 자신은 금속활자를 만들지 못했지만, 그의 구상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혁명은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도전이 생각했던 금속활자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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