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39

2018.05.23

권재현의 심중일언

“이밥에 고깃국은 조선시대 일상이었다”

농사꾼이 된 ‘식민지근대화론의 저격수’ 김동진 박사

  • 입력2018-05-22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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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진 박사. [박해윤 기자]

    김동진 박사. [박해윤 기자]

    20세기 한국을 추동한 강력한 근대화 구호 가운데 하나가 ‘이밥에 고깃국’이었다. 근대화를 통해 쌀밥에 쇠고깃국을 원 없이 먹는 날이 오도록 해주겠다는 소리였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이 땅에 살던 사람들에게 쌀밥과 쇠고깃국이 ‘그림의 떡’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전 시대에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보릿고개의 설움을 맛본 20세기 초·중반에 태어난 세대에게 이는 너무도 자명한 문제였다. 근대화와 공업화를 겪지 않은 조선시대에 쌀밥에 쇠고깃국이 어디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런데 이런 상식에 반기를 들고 나온 역사학자가 있다. 지난해 출간한 ‘조선의 생태환경사’(푸른역사)와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위즈덤하우스)를 펴낸 역사학자 김동진(49·사진) 박사다. 그는 이밥과 고깃국이 언제가 이뤄야 할 미래지향적 목표물이 아니라, 과거 조선시대 향유하던 것을 복원하기를 희구한 망탈리테(집단적 심성구조)의 표현으로 풀어냈다. 쉽게 말하면 조선시대 사람이 일상적으로 먹던 이밥과 고깃국이 일제강점기 이후 불가능해지자 그것이 가능하던 시절로 돌아가기를 꿈꾸며 이 표현을 썼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근대역사학이 당연시하던 역사적 가정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그냥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출판사를 통해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뜻밖에도 그는 지난 연말부터 충남 아산으로 낙향해 홀로 농장을 가꾸며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5월 15일 아산시 선장면 장곳리에 있는 그의 ‘별빛생태농원’을 찾아갔다.

    농사짓는 역사학자

    별빛생태농원은 물이 가득 찬 간척지 논들에 둘러싸인 4565㎡(약 1380평)의 작은 농장이었다. 김 박사는 거기서 더덕, 쥐오줌풀 같은 약용작물과 푸른 달걀을 낳는 청계(靑鷄) 150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학계에 자리 잡기 어렵고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차라리 농사지으며 좋아하는 역사공부나 실컷 하자고 결심했죠. 제가 충북 증평에서 자란 촌놈이라 어려서부터 농사를 지은 경험도 있는 데다 조선시대 생태환경사를 공부했잖아유. 처음엔 인삼을 키울까 했는데, 그게 또 농약을 많이 쳐야 하더라고요. 우리 전통 작물 가운데 가장 최근에 재배되기 시작한 더덕과 뿌리가 생약성분의 불면증치료제로 쓰이는 쥐오줌풀을 키워보고 있어요.” 

    사투리 살짝 섞인 특유의 충청도 말투와 심드렁하게 내뱉는 말에서 알게 모르게 학계에서 받은 상처가 배어났다. 자세히 들어보니 그건 환멸에 가까웠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교사가 되면 먹고는 살겠지 싶어 한국교원대 역사교육학과에 진학한 그는 졸업논문을 쓸 무렵 역사학 공부에 빠졌고, 박사 과정에 들어가서는 교사직까지 팽개치고 공부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기초로 해 마르크스 이론에 입각한 사회경제사. 그런데 관련 국내 역사서를 읽어보면 구체적 생산력에 관한 통계는 빠진 채 생산관계에 대한 사상누각 짓기만 난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외국 역사서를 보면 생생한 현장조사를 바탕으로 생산력 문제를 먼저 해명한 뒤 이를 토대로 생산관계에 대한 이론을 구축해 이해가 쉬웠다. 

    “당시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주명철 교수님이 프랑스 고교 역사교과서를 우리말로 번역해 읽어주셨어요. 그런데 우리 역사책은 이해가 안 가도 무작정 외울 것투성이인데 프랑스 역사교과서는 구체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하나하나 설명해주니 낯선 프랑스사도 절로 이해되더라고요. 제 학사 논문이 미국 노예제의 경제적 이익성에 대한 것이었는데, 미국 사료를 쫙 뽑아 경제성을 비교해보니 북부 임노동이 남부 노예제보다 훨씬 생산성이 높다는 것이 수치로 증명되더라고요. 자율성에 기초한 임노동제 하에서는 ‘어떡하면 일을 잘할까’를 고민하는데 노예제에선 ‘어떻게 하면 일을 덜 할까’를 고민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생산성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때 생각했어요. 한국에서도 이런 생산력 문제를 먼저 규명하는 사회경제사를 해보자고.” 

    그는 우리 역사학계를 매섭게 비판했다. 매번 구체적 사료가 없다는 소리를 늘어놓지만 비조선시대 법전인 경국대전만 꼼꼼히 읽어봐도 각종 통계와 수치를 충분히 뽑을 수 있다며 ‘비겁한 변명’이라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한문 실력이 형편없어 주어진 사료조차 오독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학계에서 한학 실력이 출중하다고 소문난 한 경제사학자가 조선 순조 때 조선의 재정·군정을 요약한 ‘만기요람’ 내용을 소개한 논문을 썼는데, 그걸 읽고 세 번 놀랐어요. 만기요람 같은 문서는 본문과 그 아래 잔글씨로 주석을 단 잔주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과 잔주를 하나로 이어 떡하니 번역해놓은 거예요. 그게 첫 번째 놀라움이었고, 그걸 어떻게든 말이 되게 이어 붙여놓은 것에 두 번째로 놀랐죠. 마지막으로 그런 오류를 보고도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 것에 더 놀랐습니다. 그 사료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거죠.”

    인구 2.5배 증가, 경작지 4배 증가

    1399년 발간된 우리나라 최초 수의학서 ‘조선우마의 방’에 실린 다양한 한우들. [사진 제공 · 푸른역사]

    1399년 발간된 우리나라 최초 수의학서 ‘조선우마의 방’에 실린 다양한 한우들. [사진 제공 · 푸른역사]

    김 박사의 연구는 그렇게 기존 역사학자들이 제대로 보지 않은 사서에서 찾은 수치와 통계에 기초한다. 이미 발표된 통계에 대해선 그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구체적 사례를 들어 새롭게 규명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 역사학계에선 그의 이런 연구를 불편해했다고 한다. 역사학계 스승들이 주장한 내용을 뒤집거나 반박하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논 한 마지기에서 생산되는 쌀이 평균 40말이라 기록돼 있는데, 일제강점기 논 한 마지기에서 생산된 쌀 역시 40말이거든요. 한국 역사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의 쌀 생산력이 같거나 조선시대 기록이 과장됐다고 분석합니다. 도량형이 바뀌어 조선시대 쌀 한 말이 약 6ℓ라면 일제강점기 한 말은 18ℓ로 3배나 차이가 난다는 걸 간과한 탓에 벌어진 엉뚱한 분석입니다.” 

    김 박사는 각종 사료를 토대로 14세기 고려 말 최대 경작지를 약 100만ha(1만km2)로 추산한다. 그런데 농본국을 표방한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경작지 면적은 480만ha로 4배가 넘게 증가한다. 480만ha는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의 최종 결과다. 

    조선총독부가 1910년 토지조사 때 추정한 농경지는 240ha 정도에 불과했다. 조선시대 세금 수취를 위해 작성한 토지장부인 양안(量案)의 기록을 토대로 추산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조선시대에는 양안에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개간지가 엄청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비가 오면 홍수로 물이 넘쳐흐르는 천변 땅을 뜻하는 무너미의 개간이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하천 범람을 막으면서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천방(川防)을 설치하고 논과 밭을 개간하는 작업이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17세기 무렵이면 국내 무너미 개간이 대부분 이뤄진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후기가 되면 개간이 어려운 산간지역 중심으로 풀과 나무를 불사르고 그 자리를 파서 일구는 화전(火田) 개간이 집중적으로 시행된다. 

    “농사짓기 좋은 땅과 나쁜 땅이 있다면 어떤 땅부터 개간할까요? 당연히 농사짓기 좋은 땅이죠. 조선 전기 무너미가 농사짓기 좋은 땅이라면 조선 후기 화전은 농사짓기 나쁜 땅이에요. 그럼 단위 면적당 생산성은 어떤 땅이 좋을까요? 화전보다 무너미, 무너미보다 고려시대 개간된 문전옥답이겠죠. 그런데 이를 간과하고 조선시대 농업생산성이 갈수록 떨어졌다고 비판합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반하는 주장입니다. 한계효용이 0이 될 때까지는 황무지에 가까운 땅도 계속 개간하니까 생산성은 계속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걸 모른 거죠.”

    물소와 교배로 동북아 최고 소가 된 한우

    물소를 형상화한 17세기 문인화가 김식의 ‘우도’. 사진 제공 · 푸른역사]

    물소를 형상화한 17세기 문인화가 김식의 ‘우도’. 사진 제공 · 푸른역사]

    쌀밤은 이렇게 개간된 농경지에서 얻는 소출을 상징했다. 조선시대 초 인구는 대략 75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조선 말에는 1500만~2000만 명으로 늘어난다. 인구가 2~2.5배 증가하는 동안 농경지는 4배 넘게 늘었으니 당연히 쌀을 먹을 수 있는 인구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농경지 확대와 호환(虎患)의 상관관계에 대한 김 박사의 통찰도 빼놓을 수 없다. 농지 개간은 곧 야생동물 서식지와 그 최상위 포식자인 호랑이, 표범의 먹잇감 축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들 야생동물이 인간과 가축을 공격하는 일이 조선시대 들어 빈번하게 발생한 것이니 호환의 피해자는 오히려 호랑이와 표범인 셈이다. 

    “조선이 건국된 이래 200여 년 동안 전국 군현에서 1년마다 3마리씩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 그 가죽을 나라에 바쳐야 했는데 군현 수가 대략 330여 개에 이릅니다. 매년 1000여 마리의 호랑이와 표범이 희생된 거죠. 이를 토대로 당시 한반도에 살던 호랑이와 표범의 수를 계산해보면 5000마리가량 됐을 겁니다. 그러다 영조가 즉위한 1724년 무렵 이 제도가 폐지되는데, 이후 호랑이와 표범의 개체수가 급감하게 됩니다.” 

    조선시대 경작지 급증은 장정 10명 이상의 몫을 하는 농우(農牛)에 대한 수요를 끌어올렸다. 김 박사는 여러 통계자료를 토대로 조선시대 초 전국적으로 키우던 소의 수가 3만 마리 안팎이었다 20세기 초 110만 마리까지 36배가량 늘어난 것으로 집계했다(그래프 참조). 또 조선소가 동북아 최대 소로 덩치가 커진 것도 농사에 투입될 우력(牛力)을 키우고자 세조 때 일본 오키나와에서 들여온 덩치 크고 힘 좋은 물소와 교배해 종자개량을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1903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러시아 학자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가 “한국소는 물소와 여러 차례 교배된 특징이 확실히 나타난다. 한국소의 큰 키와 강인함, 큰 활동성은 바로 거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증언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렇게 소를 집중 사육한 것은 산업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려는 불교국가라 육식 자체를 기피했다. 그러다 유교국가 조선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그 맛에 눈 뜨게 된 것도 소 사육 급증의 이유가 됐다. 실제 고려시대까지 교통과 군사 목적으로 소보다 더 많이 키운 말이 조선시대 내내 3만~10만 마리였다는 점과 비교하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조선시대 농사지을 농우를 확보하고자 소를 잡아먹지 못하게 한 우금령(牛禁令)이 실시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제사나 잔치를 위해 소를 잡는 것은 허용됐다. 조선시대 초까지만 해도 제수용 고기로 사슴고기를 썼으나 16세기 무렵 사슴이 멸종되다시피 하면서 왕실제사에서도 쇠고기를 사용하게 됐다. 또 16세기 중반부터는 쇠고기 식용이 성행해 우역(牛疫·소의 전염병)이 돌 때를 제외하면 우금령은 사실상 사문화될 때가 더 많았다는 설명이다.

    1인당 쇠고기 섭취량 40kg을 자랑한 조선

    [자료 제공 · 푸른역사]

    [자료 제공 · 푸른역사]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200년 동안 전국에서 하루 1000여 마리의 소를 잡았습니다. 숙종 때 ‘승정원일기’를 보면 ‘도성의 시전에서 각 고을의 시장, 거리의 가게까지 모두 합해 하루에 도축하는 것이 1000마리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19세기에 쓰인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도 나라에서 매일 잡는 소가 500마리, 개인이 잡는 소가 500마리라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쇠고기 값이 비쌌느냐. 공급량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습니다. 18세기 헐값일 때는 소 한 마리에 10냥이었는데 당시 쌀 한 섬(두 가마니) 가격이 5~8냥이었으니 쌀 한두 섬이면 소 한 마리를 살 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전기 200년간 매년 1000마리의 호랑이와 표범이 사냥됐다면 조선시대 후기 200년간은 매일 1000마리의 소가 도축된 셈이니 조선의 ‘쇠고기 광풍’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 박사는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에서 “조선시대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가 소고기였고, 1인당 섭취량은 20세기 말 한국인들이 섭취한 양보다 많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자료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직접 물었다. 

    “18세기 후반 연간 도살되는 소의 수가 38만~39만 마리 됩니다. 소 한 마리가 300kg이고, 도체율이 50%라면 고기 양은 150kg가량 됩니다. 당시 조선 인구를 1500만 명 정도로 잡으면 연간 인당 쇠고기 섭취량이 약 4kg이 나옵니다. 통계청 자료를 찾아보면 한국인의 연간 인당 쇠고기 섭취량이 4kg을 넘어선 게 1995년 이후입니다. 따라서 20세기 내내 한국인은 조선시대 사람보다 쇠고기를 못 먹고 살았단 소리가 됩니다.” 

    이런 이유로 조선소는 동북아 최고 소로 우뚝 서게 됐다. 이는 19~20세기 한우를 목격한 외국인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한우를 대거 반출해갔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황교익 음식평론가는 “냉면은 한반도 전역에서 먹던 음식이었는데 유독 평양냉면이 유명해진 것은 평양우라는 쇠고기 육수 맛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이 평양우의 상당량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고 밝힌 바 있다. 

    “요즘 일본이 자랑하는 와규(和牛)도 우리 한우를 끌고 가 교배, 육성한 종자일 개연성이 큽니다. 어떤 분들은 한우와 물소가 종자가 다른데 어떻게 교배가 가능하냐고 주장하는데, 오키나와에서 들여온 물소가 지금 우리가 아는 물소인지도 알 수 없고, 당시 한우를 그린 그림을 보면 그 종류가 참 다양해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당시 그림 가운데 물소를 닮은 소가 많이 등장합니다. 우리 미술계에선 이를 두고 중국 남종화를 모방한 상상화라고 재단했다던데, 제 연구를 보고 사실화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씀하시더군요.”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조선시대 사사에 등장하는 우역은 2가지다. 하나는 구제역을 닮은 돌림병이고, 다른 하나는 1636년 중국 선양(瀋陽)에서 발병해 조선을 거쳐 일본과 전 세계로 퍼져나간 치사율 90% 이상의 ‘린더페스트(rinderpest)’다. 그런데 놀랍게도 린더페스트의 백신이 조선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됐다. 

    “17세기 이후 조선에서 린더페스트가 발병하면 농민들이 아예 소가 감염되기 전 잡아먹어버렸기 때문에 강력한 우금령이 시행됐고, 소를 살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조선시대 후기에 가면 린더페스트의 치사율이 50%까지 떨어집니다. 다른 나라에선 반대로 95%까지 올라갔는데 말입니다. 그 백신을 20세기 초 일본이 개발했는데 그 장소가 바로 부산 우역혈청제조서였습니다. 우역에 대한 조선소의 면역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거기서 항체를 추출해 백신을 만든 겁니다.” 

    결정적 한 방이 더 남아 있다. 설령 쌀과 쇠고기 생산량이 풍부했다 해도 지주와 소작농의 불평등한 관계로 이를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이 상류층에 한정됐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소작농 착취는 일제시대 산물”

    농장에서 푸른빛깔이 도는 달걀(오른쪽)을 낳는 청계를 키우는  김동진 박사. [박해윤 기자]

    농장에서 푸른빛깔이 도는 달걀(오른쪽)을 낳는 청계를 키우는 김동진 박사. [박해윤 기자]

    “소작농 개념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겁니다. 조선시대에는 소작(小作)이 아니라 병작(竝作)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병작이란 말 자체가 돈 있는 사람은 자금을 대고 노동력 있는 사람은 힘을 보태 함께 황무지를 개간하면 그 논밭의 소출을 반반씩 나눠 갖는다는 뜻이었죠. 농경지를 개간한 사람에겐 대대로 경작권을 보장해줬어요. 소유권의 절반을 인정해준 겁니다. 그런데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면서 일물일권의 근대적 소유권 개념을 확립한다며 이런 병작지의 소유권을 지주 일방에게 줘버린 겁니다. 지주와 대등한 관계였던 병작농들이 소출의 80~90%까지 갖다 바쳐야 하는 소작농으로 전락한 거죠. 당연히 소작농으로 전락한 사람들이 항일투사가 되고, 지주 가운데 양심적인 일부를 제외하곤 친일파가 된 겁니다.” 

    조선시대에도 물론 기근이 있었다. 하지만 보릿고개라는 표현은 20세기 이후에나 등장한다는 것이 김 박사의 주장이다. 

    “조선시대에 ‘10년에 한 번 기근이 오고 100년에 한 번 3년 기근이 온다’는 말이 있었고 대개 맞아떨어졌습니다. 당시 지배계층은 이때에 대비해 식량을 비축할 수 있었지만 일반 백성은 그럴 여력이 없었기에 주기적으로 굶주림에 시달린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매년 봄철마다 쌀이 떨어지고 보리를 수확하지 못해 굶주렸다는 것은 일제강점기 경험을 거꾸로 과거에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조선시대 사서에서 보릿고개에 해당하는 표현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일제가 시작한 근대화를 통해 한국 경제번영의 토대가 마련됐다는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 이보다 통쾌한 반격이 또 있을까. 하지만 정작 그 저격수는 우리 역사학계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한 채 농사를 짓는 현실이 너무도 씁쓸했다. 그는 달걀이 푸른 것을 처음 봤다는 기자에게 청란을 삶아주며 말했다. 

    “차라리 잘됐슈. 학교에 남아 강사로 박봉을 받으며 뒤치다꺼리하는 것보다 이렇게 몸 쓰는 일을 하면서 밤에는 내 책을 쓸 수 있으니 몸도 맘도 훨씬 편합니다. 앞으로 인삼이 어떻게 재배작물이 됐는지, 고추와 감자, 고구마 같은 외래종이 조선 경관을 어떻게 바꿔놨는지, 조선시대 세금 수취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졌는지 등 일상사를 차근차근 책으로 써나갈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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